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40 화

루시 – 40

케르케로우스와 건수가 오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케르케로우스가 말을 하다 말고 온몸의 황금색 털을 삐죽 세웠다. 무서운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더니, 큰 소리로 짖기 시작했다.

“그르르르릉. 컹컹! 컹컹! 컹!”

갑자기 분위기가 변한 늑대 신수를 보고 건수는 의아했다. 케르케로우스는 아까 건수에게 농담할 때 보여주었던 싸늘한 시선 정도가 아니라, 이젠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한 방향을 노려보며 짖어댔다. 그의 몸집은 비록 자그마한 강아지 정도였지만 무서운 기세였다. 도대체 무엇이 케르케로우스를 그렇게 화나게 한 것일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는 케르케로우스를 옆에서 보고 있자니, 건수도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동안 짖어대던 늑대 신수는 심각한 분위기를 전하듯, 장난기가 쏙 빠진 점잖은 태도로 건수에게 말했다.

“음. 건수야. 아까 네가 들어온 곳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검은 문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서 살펴봐야 할 것 같구나.”

“제가 들어온 입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입구에서 일이 생겼다고요? 혹시 그렇다면······.”

“응. 아마도 이디레이아겠지. 그녀는 지금 검은 문을 마구 두드리고 있다.”

케르케로우스는 당연하다는 식으로 여신의 이름을 내뱉었다. 순간 건수의 얼굴이 구겨졌다. 건수는 자신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텔리를 제거하려는 그녀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더 검은 방을 나가기 싫었다. 왜냐면 건수는 텔리에게 좋은 감정은 없지만, 그를 죽일만큼 미워할 원한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왕 검은 방에 들어오게 된 김에, 텔리가 위기를 벗어날 때까지만 이곳에 머무르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녀의 계획이 무산되면, 그다음 일을 차차 생각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설마 그녀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케르케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요? 혹시 이디레이아님이 검은 문을 억지로 열고 여기 들어오실 수도 있나요?”

케르케로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검은 문을 굳게 닫고 있는 한,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어.”

“그럼 여신님이 왜 검은 문을 두드린다는 거죠?”

“글쎄말이다. 저런다고 내가 검은 문을 열지 않으면 절대 들어올 수 없는데도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실은 예전에 그녀는 내 허락을 받지 않고 검은 방을 통해 이 세계로 왔기 때문에, 억지를 쓰면 내가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지.”

“네? 여신님이 예전에 이곳을 허락받지 않고 들어오신 적이 있었다고요? 그럼 지금도 또 그러실 수 있는 거 아녜요?”

“예전에 그녀가 이곳을 통과할 수 있었던 건 내 힘이 너무 약했기 때문이었어. 그땐 내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직후라, 좀 긴 요양 시간이 필요했거든. 내가 쉬고 있는 동안에 엘리시움과 지구 여러 곳에 있는 검은 문들에 조금씩 작은 틈이 생겼는데, 그때 그녀의 영혼이 이 지구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거지. 그 정도 틈이라면, 육체가 있는 자들은 통과하기 어렵겠지만, 그녀는 보통 육체 없이 영혼이 이동하니까 출입이 가능했었겠지. 누구든 검은 방의 주인인 내 허락 없이 검은 방을 통과했다면, 원래 신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회의를 한 후, 당사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더 자세히 말해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일단 그녀가 있는 검은 문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구나.”

그가 막, 말을 끝낼 때였다. 갑자기 둘이 있는 곳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이 빠르게 물처럼 변했다. 파도처럼 출렁거리는 바닥을 보자, 건수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곧 검은 방의 수호자가 찾아온다는 의미였다. 케르케로우스도 당연히 그것을 알아차렸다.

“수호자. 그가 올라오잖아? 근데 왜지? 내가 감당하지 못할 위기상황도 아닌데, 그가 올라올 필요가 있을까? 왜 굳이 그가 내게 힘을 빌려주겠다는 걸까?”

케르케로우스의 말대로였다. 그와 건수가 있는 곳 바로 옆에 검은 물이 솟구쳐 오르더니 벽이 하나 생겼다. 그 후, 몇 개의 벽이 솟아올랐고 그 중간에 물로 된 기둥이 만들어지는 거였다. 그 기둥은 점점 인간의 형상으로 바뀌더니, 곧 큰 키의 검은 옷을 입은 노인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케르케로우스. 검은 방의 주인이여. 내 오랜 친구여.”

수호자가 나타나자, 케르케로우스는 자신을 친구라고 부르는 그를 반갑게 맞기보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수호자. 당신이 왜 또 나타났습니까? 난 당신을 존경하고 또 친구로서 좋아하지만, 솔직히 당신이 내가 있는 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당신이 올라왔다는 것은, 검은 방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그렇소. 하지만 위기는 아니오.”

케르케로우스는 심각한 위기상황도 아닌데 수호자가 나타난 것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럼 왜 나타났습니까? 당신이 마지막으로 이 층에 나타났던 게 불과 몇십 년밖에 안 되었다고요.”

케르케로우스는 고개를 돌려 건수를 보고 한쪽 눈을 윙크하며 말했다.

“아, 내가 몇십 년이라고 해서 건수는 헷갈리지? 내가 아까 말했잖아. 내가 검은 방의 시간을 빨리 돌려놨었다고. 넌 밖에서 하루가 좀 안 되게 시간을 보냈을 뿐이지만, 이곳에서는 벌써 몇십 년이 지났다고.”

“아··· 그렇군요.”

뭐가 “아··· 그렇군요”야. 아까 한번 말해줬던 거잖아. 아까 했던 얘기를 까먹고 다시 하는 신수도, 그새 들었던 얘기를 잊어버린 건수도 참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황금색 털의 늑대 신수는 다시 수호자에게 시선을 돌리고 이렇게 말했다.

“수호자. 당신은 여기 세상에서 유명한 양치기 소년 이야기를 몰라요? 위기상황도 아닌데 당신이 자꾸 나타난다면, 진짜 위기상황이 왔을 때 마음을 놓게 돼서 제대로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여기 상황은 나 혼자 해결할 수 있습니다.”

수호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건수를 보고 씨익 웃었다.

“이계의 아이야. 넌 왜 이렇게 빨리 검은 방으로 돌아왔느냐?”

“신수님께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일을 말씀드리려고요.”

수호자는 건수에게 천천히 다가와 손을 이마에 올렸다. 건수의 기억을 읽으려는 거였다. 케르케로우스는 그걸 보고 수호자를 말렸다.

“에헤이, 이거 왜 이러시나? 수호자, 당신도 그렇고 텔리도 그렇고 그만 좀 남의 기억을 읽어내요. 그것 때문에 내가 이 녀석에게 친 검은 방의 인이 약해지잖아요. 생각을 해보세요. 검은 방의 힘을 이용한 인과 똑같은 힘으로 깨버리는 행동을 하는데, 그러면 그 봉인이 오래가겠어요, 빨리 사라지겠어요? 이 녀석에게 검은 방의 인이란 일종의 보험이나 곡예사의 안전그물 같은 건데, 자꾸 구멍을 내면 어떡합니까?”

수호자는 늑대 신수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건수의 이마에 대고 있는 손에서 하얀빛이 나왔다. 건수는 이마가 따뜻해지나 싶었는데, 수호자는 1초 정도밖에 안 될 정도로 짧은 시간을 사용해서 건수의 기억을 읽어냈다. 그가 기억을 읽어내는 시간은 텔리보다도 훨씬 빨랐다. 케르케로우스는 건수의 기억을 읽지 말라고 하는데도 자기 말을 무시한 수호자에게 다시 뭐라고 한마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수호자가 케르케로우스를 바라보며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검은 방의 주인이시여. 이 아이의 기억을 읽은 것은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나도 알아야 하기에 그런 것이오. 내가 힘을 써서 당신의 검은 방의 인이 훼손된 것에 대해서는 내가 따로 적절한 보상을 하겠소.”

“뭐, 그러시겠다면야 난 크게 불만이 없지요. 컹! 컹!”

케르케로우스는 뭔가 더 불만을 표현하고 싶지만, 수호자가 건수의 훼손된 검은 방의 인에 대해 제대로 보상해주겠다고 말하며 선수를 치는 바람에 그냥 입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