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53 화

루시 – 53

텔리가 스모크 샵에 나타나기 두 시간 전쯤의 일이었다. 건수는 출발하기 전에 23번에게 한국의 부모님께 전화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건수는 미국에 온 지 사흘이나 지났는데, 아직 부모에게 자기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알리지도 못하고 온 게 몹시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23번은 자기 집에 전화기가 없는 것도 아닌데도 머뭇거렸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건수의 마음에 동요가 일면, 혹시라도 그들의 계획에 차질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였다. 23번은 자기에겐 결정권이 없다고 하면서 건수에게 부탁을 흔쾌히 들어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물론 그게 23번이 결정할 일은 아니라는 것은 건수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건 결정권자인 이디레이아에게 직접 물어봤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건수는 살짝 머리를 쓴 거였다. 즉, 그는 이제 자기가 이디레이아에게 한국의 부모에게 전화하게 해달라고 물을 것이니, 23번도 자기와 함께 부탁해달라고 하는 말을 꺼내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건수는 그 얘기를 11번이 화장실에 가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꺼냈다. 만약 11번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낸다면, 그는 또 뭐라고 하면서 건수를 괴롭힐지 모를 일이었으니까. 건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뚱뚱한 백인 여성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에게 다가갔다.

“저기, 여신님.”

“네, 컨시우스. 곧 출발하려고 하는데, 나갈 준비는 다 끝났나요?”

“실은 꼭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음······. 그게 뭔가요?”

이디레이아는 조금 짜증 섞인 어투로 건수에게 물었다. 왜냐면 그녀는 평소 그런 질문을 잘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가진 여러 능력 중 하나가 바로 완벽하진 않아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대충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 능력을 사용하면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알아맞힐 수 있어서 대화나 협상의 주도권을 잡는 데 매우 유리했다. 그런데, 건수가 며칠 전, 검은 방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로 그녀는 그가 하는 생각을 조금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 무슨 용건이냐고 묻게 된 일 자체가 그녀의 신경을 건드렸다. 건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왠지 그녀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갔다. 그래서 아주 잠시 머뭇거렸다.

“네, 그게···. 저······.”

“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해요! 우리가 지금 노닥거릴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그렇게 많은 게 아닙니다.”

그러자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더 짜증스럽게 바뀌었다. 건수는 순간 전화 부탁 따위는 포기하고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갈까 싶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잠, 잠깐. 지금 난 그 무서운 텔리님을 해치러 가는 거잖아.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어떡해? 그렇게 되어버리면, 과연 내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사람도 늑대도 손으로 찢어 죽이시는 그 무서운 텔리님인데 말이야. 그래, 어쩌면 지금 어머니께 전화드리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내 목소리만은 들려드려야지.’

이디레이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는 건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11번이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건수는 한 번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에게 부탁했다.

“여신님. 다름이 아니고요. 제가 여기 뉴욕에 너무 급하게 오게 되어서, 부모님께 제가 어디 간다고 말씀도 못 드렸습니다. 제가 여기 온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아무 얘기도 없이 사라져버렸으니 부모님이 많이 걱정하고 계실 거에요. 혹시 제가 부모님께 전화 한 통씩만 드려도 될까요? 아니, 하다못해 어머니께만이라도······.”

“응? 뭐라고요? 부모에게 전화를 한다고요? 아······ 으음.”

이디레이아는 지금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미래의 일을 계산하며 오직 텔리를 제거하는 일에만 신경 쓰고 있었던 터라 건수가 그런 부탁을 할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 녀석이 이 타이밍에 이런 말을 꺼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그렇게 속으로 생각한 그녀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했지만 속으로는 몹시 당황했다. 하지만, 바로 초조해하는 기색을 감추며 건수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군요. 부모에게 전화하도록 하세요. 국제전화를 거는 방법을 모른다면 23에게 도움을 청하시고요. 하지만, 길게는 안 됩니다. 당신은 11과 23을 따라 곧 떠나야 하거든요.”

건수는 자기 예상과는 달리 이디레이아가 부탁을 쉽게 허락해준 것을 보고 의아할 정도였다. 23번에게로 발걸음을 돌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이디레이아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난 나의 다른 분열체가 있는 곳이라면 그 주변의 일을 난 거의 100%에 가깝게 예상할 수 있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난 건수가 내게 가까이 올 거라는 것도, 그리고 저런 부탁을 할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 이건 좋지 않은데. 이 시점에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야!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래, 맞아. 난 이미 너무 많은 분열을 한 상태야. 너무 많은 변이가 일어나서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나 외의 다른 분열체들은 지금 상태가 어떨까? 어서 이 육체를 떠나 다른 분열체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해서 그들의 상태를 살펴봐야 할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뉴욕에서 유난히 많이 분열했던 것이 문제가 된 건지도······.’

건수에게서 부탁을 들을 거라 먼저 예상하지 못하자, 그녀는 자신의 예지 능력에 대해 회의감이 살짝 들기 시작했다. 또, 자신의 능력이 퇴화하고 있다고 믿게 된 모양인데, 그 원인을 너무 많이 분열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지금은 부모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건수를 보러 가야 해서, 이디레이아의 특수한 사정에 대해선 후술하려 한다. 아니면, 늘 그렇듯이 말이 많은 그녀니까 언젠가 자신의 입으로 직접 얘기하는 것을 캐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건수는 23번의 핸드폰으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발신자 표시에 국제전화라고 뜰 테니, 혹시 어머니가 자기 전화를 스팸으로 착각하고 무시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녀는 단 몇 번만의 벨 울림 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겨우 며칠만에 듣는 어머니의 목소리인데 왜 몇 주, 몇 달 만에 듣는 것 같은가. 건수의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여보세요. 어머니, 저 건수에요!”

“···건···수? 건수니?”

어머니는 놀랐는지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 난 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자, 이번엔 그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들렸다.

“건수야! 이 녀석, 너 지금 어디 있는 거야? 응? 어디야?”

그는 다소 흥분했는지, 핸드폰에 대고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건수가 잠시 핸드폰에서 귀를 떼야만 할 정도였다.

“에···. 음. 아버지. 전 지금 뉴욕에 왔어요. 여기로 오는데 좀 이상한 방식으로 왔거든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야! 뉴욕? 우리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에에! 지금 너희 어머니는 너 때문에 쓰러지게 생겼다. 여보! 빨리 냉수! 냉수 좀 마셔! 냉수 좀 마시라고, 이 마누라야! 건수는 지금 뉴욕에 있대! 그래, 뉴욕! 뉴욕이 어딘지 몰라? 미국 뉴욕!”

엄청난 볼륨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리자, 건수는 또다시 핸드폰에서 귀를 떼고는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제가 여기서 일 좀 보고 곧바로 다시 돌아갈게요.”

“야! 건수, 인마! 너 언제 올 거야? 그리고 우리한테 말하지도 않고 어떻게 지구 반 바퀴 떨어진 곳에 간 거야? 와, 이놈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네!”

“아버지, 실은 지금 너무 바빠서 통화할 시간도 없어요.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제가 자꾸 말썽을 피우게 돼서 죄송해요. 아무튼, 최대한 빨리 돌아갈게요. 믿어주세요!”

건수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화장실에서 나온 11번이 이디레이아와 함께 거실 끝에서 자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