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7 부.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63 화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63

“와아아아!”

진행자의 짧고 강렬한 멘트가 끝나자, 장내에 우렁찬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건수 주위의 관객들은 일시에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다. 도원광은 물론이고 싸이언스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열기에 동참했다.

“예아아아아!”

주변에서 그렇게 열광의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오직 건수만 자리에 앉아 앞좌석을 시선에 고정하고 있었다. 싸이언스는 앉으면서 건수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물었다.

“야, 손 건수, 너 갑자기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냐. 아프기는.”

“그런데 왜 그렇게 시무룩해? 너 여기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기분이 좋았잖아. 무슨 일 있어? 너 오늘 이상하게 무드 스윙을 탄다?”

“무드 스윙? 그게 뭔데?”

평소에 영어를 자주 섞어 쓰는 싸이언스의 습관은 여전했다. 다만 문제는 그가 매번 그럴 때마다, 건수는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었다.

“그건 방금 전엔 기분이 좋다가 또 한순간 갑자기 기분이 다운.... 야아아! 뭐야? 뭐야? 실내가 더 어두워지잖아! 이제 시작하려고 하는 건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싸이언스가 말하는 도중 장내가 더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스포트라이트가 링 중앙에 서 있는 진행자를 비췄다.

“여러분,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 자리를 빛내주신 몇 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바쁘신 와중에 오늘 블라스트 빅 매치 대회를 찾아주신 김양국 국회의원께서 여러분께 인사드리겠습니다. 네. 저기 계시는군요! 여러분 박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계신 오진우 국회의원께서도 인사... 예, 인사를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박수! 네네, 정말 불철주야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이시지요. 그리고 또 그 옆에 앉아 계시는 국회의원.....”

진행자가 경기의 시작은 알리지 않고 계속해서 경기장에 얼굴을 비춘 유명 인사들을 소개하자, 싸이언스는 짜증이 났는지 눈을 부릅뜨고 소리 질렀다.

“아씨! 뭐야! 경기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저게 뭔 뻘짓이야? 앙!”

막 열기가 달아오르려고 하는데 찬물을 끼얹는 진행에 불만이 있는 사람은 싸이언스뿐이 아니었다. 그가 앉아 있는 좌석 주변에서도 불만의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행자는 자신이 소개할 곳이 또 남았는지, 다음 순서의 ‘자리를 빛내주신’ 이를 연속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에... 다음은 오늘의 이벤트를 가능하게 해주신 일면 매트리스 그리고 언제나 여러분에게 사랑받는 바사삭 크리스피 콘칩으로 유명한 주식회사 미미.....”

다음 순서로 넘어가지 못하고 기업 홍보까지 하는 진행자를 보고 싸이언스는 화가 났는지 양팔을 올리며 크게 소리질렀다.

“야야! 그런 쓸데없는 건 집어쳐! 이 자리를 빛내주시는... 누구누구는 무슨. 에이, 빨리 시합이나 시작하라구!”

큰 소리로 짜증내는 싸이언스를 보며 도원광이 말했다.

“너가 꼭 뭐라고만 할 게 아니라, 이런 큰 이벤트를 기획할 때는 이곳저곳에서 도움을 받는 게 많을 거야. 그리고 아마 그렇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과 기업들은 당연히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싶어하거나 홍보를 원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너무 흥분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봐. 어차피 시합은 시작할 거잖아.”

“인마, 넌 뭐라는 거야? 이 레슬링 매치랑 저 국회의원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회사들도 그래. 어차피 포스터니 배너니 여기저기 다 자기들 로고가 찍혀 있잖아. 그런데 뭘 더 바래? 난 내가 낸 돈만큼 레슬링을 볼 권리가 있다고! 야! 진행자! 나랑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간을 더 이상 허비하지 말고 빨리 시합이나 보여줘!! 다음 순서로 넘어가라~! 우우우!”

싸이언스의 태도를 보면서 도원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싸이언스의 귀에 충분히 들릴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아니, 지나 나나 공짜로 들어왔으면서 권리는 무슨.....”

참 희한한 일이었다. 세 친구가 나란히 한 줄에 앉아 있는데, 하나는 성격이 다혈질이어서 그런지 진행의 미숙함을 전혀 참지 못하고 진행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야유를 보내는데, 다른 하나는 그 녀석보다는 인내심이 많은 건지 이해심이 많은 건지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중간에 앉아 있는 건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조금 전부터 기분이 우울해져서 그런지 혼자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장내가 점점 시끄러워지고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눈치 챈 진행자는 그 때부터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말을 빨리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속사포 랩을 쏟아내는 래퍼처럼 경기장에 찾아온 나머지 유명 인사들과 기업 이름을 뱉어댔다. 원래 그가 호명하면, 해당 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중들을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하거나 손을 들어 자신의 존재를 알렸는데, 이젠 진행자의 말이 너무 빠르게 되니까 그들은 거의 앉았다 일어서기 수준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헉헉.... 예. 하하하...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진행자는 너무 빨리 말하느라 숨이 찼는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헉헉 거렸다. ‘자리를 빛내주신 분들’에 대한 소개를 마친 후 목이 메는지 잠시 몇 초간 숨을 고르느 것이었다. 아마 본인도 이런 순서는 원해서 하는 건 아닐 텐데 욕은 욕대로 먹고 힘은 힘대로 드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자, 이제 MKWA가 보내드리는 제 5차 블라스트 빅 매치를 시작하겠습니다!”

진행자는 조금 전까지 보였던 피곤한 기색은 싹 지우고 처음에 관객들을 흥분시켰던 높고 힘찬 목소리로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첫 순서는~ 모두가 주목하는 신예! 몸집은 작고 가냘프지만 그 뒤에는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늑대의 송곳니를 감춘~ 최강의 루키~~ 레드 팽!!”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온 사방을 가득 채우는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라이트가 이리 저리 돌아가며 번쩍 거리다가 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입구를 비췄다. 그리고 거기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좐슨이었다. 그녀는 붉은 색 의상을 입고 번쩍이는 망토까지 둘렀는데, 커트한 헤어스타일 때문인지 몰라도 왠지 모르게 조그만 미소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우와와와와와! 좐슨!!! 아니, 레드 팽! 우와와와와!”

싸이언스는 친구가 등장하자 흥분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괴성을 질렀다. 다른 한 편에 앉아 있던 도원광도 마찬가지였다.

“예아아아아! 레드 팽! 이겨라!”

건수도 함께 일어나 두 친구에 비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나름 소리를 높이며 친구를 응원했다.

“야아아아...... 잘 해!”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씩씩하게 링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레드 팽이었다. 그녀가 지나가는 길에 앉아 있는 관중들이 전부 일어나 그녀를 향해 환호했다. 그 분위기에 웬만한 사람은 기가 죽을 법도 했는데, 그녀는 체구도 작았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관중들을 보며 눈도 맞추고 하이파이브도 하는 등 꽤 노련한 모습이었다. 그걸 본 건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야아... 대단해. 저런 함성소리를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니!’

싸이언스는 웃으며 건수에게 말했다.

“건수야, 좐슨 자식, 키는 쪼그매가지고 인상 팍팍 쓰면서 있는 것 좀 봐라. 웃기지 않냐? 킥킥킥.”

하지만 건수는 그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번쩍이는 망토를 휘날리며 씩씩하게 걸어가는 좐슨의 모습에 온 정신을 뺴앗겼기 때문이었다.

“와... 진짜 진짜 멋지다. 레드 팽.... 대박이다....”

자기보다 훨씬 작은 체구의 좐슨이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아우라는 대단했다. 내성적인 성격의 건수는 남 앞에 쉽게 나서지 못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케이스를 목격하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와아... 나도 저럴 수 있다면! 나도 좀 더 당당하고 싶다! 내게 다시 예전과 같은 힘이 생긴다면 저렇게 당당하고 멋있을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