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7 부.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97 화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97

이디레이아의 말에 두 침입자들은 고개를 숙이며 그녀 말을 따랐다. 그리고리는 그녀 덕에 위기에 빠질 뻔한 것을 모면한 셈이지만, 비굴한 모습을 보인 그의 보스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바, 지금 이게 무슨 자리입니까? 저 두 침입자들은 그렇다쳐도 예언자라뇨? 절 여기로 부르신 용건이 뭡니까?”

그의 볼멘소리를 듣고 바빌로프가 대답했다.

“아, 전에 자네가 여기 두 분의 미스닉을 만나고 간 후에 두 분이 다시 여신님을 모시고 날 찾아오셨었어. 그 때 내게 이런 저런 조언... 아니, 예언을 해주셨었지. 그리고 오늘 이렇게 또 찾아 오셨는데, 오늘은 널 좀 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래서 부른 거야. 그리고리.”

“저를요?”

“그... 그래. 그러니까 제발 침착해. 특히 여기 계신 두 분 미스닉께는 말이야. 이름값 좀 하라고. 응?”

그리고리는 자기를 만나보고 싶다고 한 노파를 무서운 눈으로 째려보았다.

“할멈. 날 보고 싶다고 날 여기로 했다고? 당신, 날 알고 있나? 내가 누군지 알고 있냐고?”

그러자, 23번이 다시 벌떡 일어나서 흥분한 목소리로 꽥 소리를 질렀다. 동시에 하얀 빛을 내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뭐라고? 여신님께 감히 할멈? 이 자식이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23번의 빛나는 주먹을 보자 그리고리는 속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애써 침착한 척 하며 정체불명의 3 인을 노려본 후, 바빌로프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 자리는 제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보스, 그리고 작정하고 감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꼭 들어주십시오. 이들이 예언이니 뭐니 지껄이는 모양인데, 그런 사기꾼 같은 얘기는 시간 낭비니 제발 듣지 마십시오.”

“뭐라고? 우리더러 사기꾼이라고! 이놈이!!”

23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리고리에게 빛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이디레이아가 손을 들었다.

“그만!”

그러자 23번은 주먹을 휘두르다가 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그 모습은 그리스 신전의 릴리프(relief)같았다.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앉아 있는 이디레이아를 바라보았다.

“아아... 여신님.... 제 몸이...!”

그녀는 서 있는 23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23..., 아니, 데피아우스. 도대체 왜 그렇게 내 말을 안 듣습니까? 내가 방금 전 말했잖아요. 보바와 그리고리가 뭐라 하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요. 당신은 늘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군요. 오히려 성미 급한 줄 알았던 게르네가 오늘은 더 점잖게 행동하잖아요?”

보드카를 마시던 11번은 그녀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니, 여신님. 어떻게 저희 진짜의 이름을 아시는 겁니까? 그 이름은 적어도 수천 년 동안 제 입으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디레이아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11번을 바라보았다.

“왜요? 게르네. 왜 그 동안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죠? 좋은 이름이잖아요.”

11번은 충격을 받았는지 보드카 잔을 쥐고 있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온몸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왜냐하면... 전.... 더... 이상 그 이름으로 부... 불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큭.”

여신은 눈알을 굴리며 웃었다.

“호호. 아니, 왜요? 그 이름은 당신의 부모가 사제에게 찾아가서 받아온 좋은 이름 아닙니까? 그럼 11번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아요?”

“아뇨! 절대 아닙니다! 11번은 저주받은 이름입니다! 하... 하지만 게르네는.... 그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전 더 이상 게르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으으윽....”

11번은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괴로워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뭐하러 저주받은 이름을 사용하나요? 게르네. 그 이름을 사용하세요.”

“그건... 그럴 수 없습니다. 그건 사람의 이름입니다. 전 사람이....”

이디레이아는 11번을 똑 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맞아요. 당신은 보통의 인간과는 아주 거리가 멀죠. 그렇다고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한 겁니까? 그래서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도 포기한 건가요?”

“아닙니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여신님, 전 사람입니까? 아님 그저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입니까? 여신님! 제발 말씀해주십시오!”

“글쎄요. 그건 당신이 결정하세요. 여기 앞에 있는 보바와 그리고리도 지난 날 행적을 보고 말한다면, 역시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잖아요?”

“그... 그렇다면 전 인... 인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11번은 떨리는 목소리를 듣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엔 인간으로서 죽을 겁니다. 제가 돕죠. 게르네, 당신은 자신의 선택으로 제게 왔으니까요.”

“여신님.... 감사합니다.”

11번은 보드카 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감정이 격해져서 아무래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아서였다. 서 있는 23번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녀가 손을 들자, 몸이 굳어 있던 23번의 마비가 풀렸다. 이제는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그는 조용히 자리에 앉더니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11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디레이아는 23번에게 말했다.

“데피아우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원하면 23번이 아닌 데피아우스로 삶을 마감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건 좀 두루뭉술한 말씀이군요. 앞으로 제게 정확히 어떤 일이 생기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그리고 그건 운명의 예언입니까, 아니면 여신님, 당신의 약속입니까?”

이디레이아는 살짝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난 이 세계에서 다가올 모든 미래를 다 볼 수 없으니까요.”

“.......”

“솔직히 말해서 난 이 세계에서 텔리에게 쫓겨난 두 암살자들을 만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난 이 세계의 여신도 아니고 이곳에서는 내가 능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우연한 기회에 만난 당신들이 나를 진심으로 돕는다면 나 역시 여러분을 도울 생각입니다. 데피아우스, 당신도 게르네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잖아요. 23번이 아니라 데피아우스로 삶을 마감하고 싶겠죠?”

23번은 눈을 깜박이며 잠시 생각했다.

“글쎄요..... 전 하도 오래 살아서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다 잊었습니다. 제 부모의 얼굴도, 형제들의 목소리도, 고향의 풍경도 전부요. 전 그냥 지금이 중요합니다. 사실 더 원하는 것도 없고, 여신님으로부터 바라는 것도 딱히 없어요.”

“아......”

그 말을 듣고 이디레이아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그리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너희들. 지금 사람은 불러놓고 너희들끼리 뭐라고 하는 거야? 보바,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디레이아는 눈을 들어 그녀를 불쾌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리고리를 바라봤다.

“바빌로프를 여기에 놔두고 어디로 간다는 거예요? 나중에도 이렇게 보스를 혼자 놔두고 가버릴 건가요? 네, 그리고리?”

“뭐라고?”

“그런 때가 온다면 말이에요. 당신은 보스 곁에 남아 있을 거냐고요? 크크크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