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45 화

루시 – 45

이디레이아의 일장 연설을 들은 검은 방의 수호자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반면, 그녀는 무슨 할 말이 아직도 그리 많은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난 텔리를 죽이고 그의 생명의 정수라도 엘리시움으로 가져갈 생각입니다. 그다음, 그를 부활시킬지 아닐지는 제 어머니이신 생명의 여신이 판단할 것입니다. 그의 시신은 당신께 넘겨드리죠. 왜냐면 그의 육체는 검은 방에서 나왔으니까요. 그러니, 그의 시신에 대해선 당신과 케르케로우스, 그리고 암흑, 그렇게 셋이서 알아서 판단하시고 처리하세요. 생사여탈권을 가진 텔리가 내 손에 죽게 되면, 엘리시움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은 오로지 생명의 여신의 대리인인 내가 맡아서 처리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이 세웠던 질서는 무너지고 내가 세운 새로운 질서가 확립될 거에요. 아, 맞다. 또 하나, 전에 강원도 산속에서 당신과 만났을 때, 내가 텔리와 또 한 명을 엘리시움으로 데려가야 한다고 했지요? 잘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검은 방에······ 속한 자··· 검은 방으로 돌아갈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는··· 검은 방에··· 있지 못한다······. 치지직······ 신이든 사람이든··· 그 누구라도 검은 방··· 을 통과시키는 것은··· 치직··· 내가··· 아니라······ 검은 방의 암흑··· 지지지직······ 그리고 그들을··· 대표하는······ 검은··· 방의······ 주인이··· 결정할 일···. 네가··· 함부로··· 요구할··· 수··· 없다······.”

“조금 전 내가 했던 말을 벌써 잊었어요? 난 원래 생명의 여신께서 맡기신 사명을 다하려고 여기 지구까지 왔던 거예요. 즉,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생명의 여신이 하시는 일이니, 검은 방에 있는 당신들에게 적어도 그 정도는 요구할 수 있는 거라고요.”

“크크크크······”

이디레이아의 말을 듣고 수호자는 큭큭 거리며 웃었다. 좀처럼 잘 웃지 않는 그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이었다. 업신여김을 당한 이디레이아는 다시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아니, 뭐가 웃긴 거죠?”

“생명의 여신이라··· 이거······ 재미··· 있군. 지직··· 지지직······ 아무리··· 생명의 여신이라도······ 지지직······ 혹은 그녀의··· 대리인··· 치지직······ 이라도··· 함부로······ 검은 방을··· 통과하지··· 못 한다······.”

“흥! 여전히 교만하군요. 당신이 아무리 죽음의 신이었다지만, 우리 모두 생명의 여신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태어났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달리 말하면, 그분은 모든 신과 신수의 시작이라고요. 생명의 여신이 계시는 이상, 엘리시움은 영원할 거고, 또 제가 그 세계를 유지시킬 겁니다. 그러니, 당신도 엘리시움의 일부인 이상, 그분의 일을 도우세요. 자꾸 권한이니, 검은 방이니 뭐니 하지 말고요.”

“크크크크······ 이디레이아··· 치직······ 이 어리석은 여신아······! 크하하하하하하······.”

수호자는 이디레이아의 말을 듣고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얼마나 큰지 숲속 전체에서 울려 퍼졌다. 이디레이아들은 그의 비웃음의 대상이 자신들뿐만 아니라 생명의 여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분노하여 각각 목청을 돋우어 그를 비난했다.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던 그들은 검은 연기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일시에 침묵했다. 그들은 수호자가 어느새 떠나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야? 검은 방의 수호자가 떠난 건가? 언제 떠난 거지? 예의도 없이 얘기하다 말고 도중에 가버렸다니. 아아, 그렇군. 결국, 도망간 거잖아? 흥! 생명의 여신을 언급했더니, 그만 기가 죽어 버렸던 모양이네. 허세를 부리려고 크게 웃어봤지만, 내가 생명의 여신의 대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아유, 가여워라. 그러게, 상대를 알고 까불었어야지. 자기가 아무리 과거에 모두가 벌벌 떨었던 죽음의 신이었다고 한들, 모든 생명의 시작인 그분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호호호호!”

건수는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수호자와 이디레이아 사이의 오가는 대화를 모두 엿들었다. 그는 엘리시움의 신에 대한 역사 등 배경 지식이 전혀 없어서 대부분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디레이아가 수호자를 상대로 꾸짖듯이 얘기했던 것과 그에 반해 수호자는 제대로 대꾸도 하지 못했던 분위기를 미루어 보건대, 이디레이아가 수호자보다 능력은 부족했지만 지위에 있어서는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이디레이아님은 엘리시움의 신들 사이에서도 세력이 막강한 것 같아. 또, 검은 방의 케르케님과 수호자님과도 사이가 안 좋은 듯하다. 가뜩이나 난 이번에 여신님이 싫어하는 검은 방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 앞으로 이놈의 인질 생활은 더 견디기 힘들어질 것 같구나. 에휴.’

* * *

검은 방의 최상층부.

검은 방의 주인인 케르케로우스와 지금 막 돌아온 수호자가 짧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호자, 제 사제를 무사히 이디레이아에게 보냈나요? 또 여신과는 잘 얘기가 된 거죠?”

“그렇소.”

“음···. 그것뿐입니까? 더 얘기할 건 없고요?”

“없소.”

“여신은 어떻게 지내고 있던가요? 아까 들어보니 텔리를 해칠 음모를 꾸미려고 하고 있다던데?”

“······.”

대답이 짧다. 역시 과묵한 성격의 수호자답네.

평소에도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의 케르케로우스는 무엇을 물어봐도 짧게 대답하는 수호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암흑을 제외하고는 검은 방 안에선 둘뿐인데, 수호자는 오랜만에 한 번씩 나타나면서도 늘 그를 따분하게 했다. 특히 오늘은 건수가 와서 서로 장난도 치고 대화도 많이 해서 좋았는데, 그가 금방 떠나버리게 되어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조금 전에도 수호자가 인사만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고 하길래, 일부러 말을 걸어본 것인데, 그는 묻는 말에 짧게 대답하거나 침묵을 지키는 거였다. 케르케로우스는 언제나 경직되고 엄숙한 분위기의 수호자가 부담스러웠는데, 오늘도 그와의 거리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수호자, 내가 실례했네요. 오늘 오랜만에 바쁘게 활동했을 텐데, 그만 내려가 쉬어야죠.”

“예.”

수호자는 아래로 내려가려고 바닥을 액체로 바꾸려다가 머릿속에 뭔가 생각났는지 그만두었다.

“아, 이디레이아가 검은 방의 주인인 당신에게 요구한 것이 있소. 그리고 나도 한 가지.”

“네? 이디레이아가요? 그게 뭔데요?”

“두 가지라오. 먼저 첫 번째는 자신이 앞으로 텔리를 죽일 것이니까 그의 시신을 검은 방에서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그녀와 또 다른 동행자의 통행을 요구했소.”

“흐음. 요구라니······. 그건 좀 경우가 아닌데. 여신의 태도가 당당해도 너무 당당하네.”

케르케로우스는 그때까지 좌우로 살랑거리던 꼬리를 늘어뜨리고 바닥에 털썩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