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49 화

루시 – 49

이디레이아와 그녀를 따르는 암살단원들이 거사를 치르기로 한 운명의 날이 밝았다. 소호에 있는 알렉시스의 아파트에 몰려 있는 텔리와 인간들은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 텔리는 빼곤 인간들만 식사하고 있었다고 정정해야겠다. 왜냐면, 텔리는 헐렁한 트렁크만 걸친 채, 홀로 창밖을 보며 조용히 클로브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제인 미스터 황이 그에게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요. 텔리님. 말씀하신 커피 가져왔습니다.”

“으음.”

텔리는 미스터 황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오직 저 멀리 창밖의 풍경만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어 컵을 받았다.

‘꿀꺽. 꿀꺽.’

그는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커피를 단 한 번에 마셔버리더니 빈 머그잔만 내밀었다.

“한 잔 더.”

“세상에. 또 한 번에 다 마셔버리셨어. 저, 텔리님. 이게 벌써 3잔째라고요. 그리고 이렇게 뜨거운 커피를 단 번에 드시면 식도가 남아나지 않겠어요.”

“괜찮아. 한 잔 더.”

미스터 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4번째 커피를 가지러 갔다. 그는 주방에서 커피를 따르며 혼잣말을 했다.

“왜 저러시지? 평소에도 기행을 일삼는 양반이라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분위기가 더 어둡네. 무슨 고민거리가 있나? 꼭 무슨 안 좋은 일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미스터 황의 말대로 텔리는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는 간밤에 꾼 꿈에서 그의 아버지인 죽음의 신이 나타나 그에게 해준 얘기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런지, 몹시 안절부절못해진 나머지, 인간들과 둘러앉아서 즐겁게 아침 식사를 할 기분이 안 들었다.

‘아버지께서 내 꿈에 나타나신 건 정말 오랜만이야. 마지막이 언제였더라. 아마 예전에 LA에서였지? 벤과 쥬니아의 집에서 하루 묵었을 때였던 것 같아. 그때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셨었지. 꿈을 꾼 다음에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생생하게 기억하게 되었어. 아주 옛날에 있었던 그 일을 말이야. 엘리시움의 신과 신수들이 나의 형, 바이를 이 지구로 유배 보낼 때, 나더러 형을 감시하라고 같이 보낼 때, 내게 나타나셔서 날 설득하셨던 일 말이야. 빌어먹을 놈들. 말이 감시지. 사실 나도 함께 여기로 유배 보낸 것 아닌가. 하지만 그놈들이 무서워서 여기 왔던 건 아니었어. 그건 오로지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그놈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거야. 흥! 그따위 신과 신수들. 내겐 아무 의미 없는 놈들이었다. 내가 마음만 먹고 언제든지 추수하고자 하면 할 수 있었던 놈들이었지. 가능하면 그놈들 모두 한 번에 없애버리려고 했었다. 암살단을 만들어 내 권능을 나눠주고 각지에 퍼져 있는 신과 신수들을 다 해치워버리려고 했었지. 그랬었는데······. 그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내 앞에 나타나셔서 날 막으셨지. 내가 아직 준비가 다 되지 않았다고···. 그러니, 그만 거기서 포기하라고 하셨어. 그리고 내가 그분의 명령을 거역하자 손을 뻗으셔서 내 목을···. 으으음.’

텔리는 손으로 목을 만지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날 내 목을 조르는 아버지의 번쩍이는 두 눈을 보고 난 몹시 두려웠다. 정말로 날 죽이려고 하셨어. 그분이 내 목을 조르자, 내 몸의 모든 힘이 빠져나가면서, 또 동시에 그분의 손을 통해 죽음이라는 것이 내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을 때······. 아아아······.’

텔리는 이마에서 식은땀을 흘렸다. 식탁을 손으로 치며 미스터 황을 불렀다.

“야, 여기 커피. 빨리 가져와.”

미스터 황이 4번째 커피를 가져오자, 텔리는 이번에도 그 뜨거운 커피를 한입에 다 마셔버렸다.

“한 잔 더······.”

그리고는 다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아버지는 내 생명의 정수까지 파괴하려고 하셨다. 마치 더는 쓸모없어진 물건을 폐기하듯이. 그래서 내가 망가진 다음에, 다시는 부활할 수 없도록 철저하게 나를 부수신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그래, 그리고 그날 이후 날 다시는 보려고 하시지 않는다는 걸 느꼈지. 영혼까지 스며드는 그런 공포는 처음이었다. 그래. 아마 내가 끝까지 명령을 거역했더라면, 아버지는 날 완전히 없애셨을 거야. 분명해.’

그는 예전 일을 기억하면서 몇 번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이상은 더 기억하기 싫은지 한숨을 쉬며 잠시라도 머릿속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그 뒤로 100년이 넘는 세월을 이곳, 지구에서 보냈다. 그리고, 그동안 아버지는 내 꿈에 나타나신 적이 거의 없었어. 왜 요즘 와서 나타나신 걸까? 그것도 똑같은 꿈. 마치 뭔가를 내게 잊지 말라고 계속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게 뭘까? 옛날 일이 다 생각나지 않아서 유감이군. 분명히 내 목을 조르신 다음에 무슨 중요한 말씀을 하셨었는데······ 영 기억이 가물가물해. 그렇다면 혹시 내가 그걸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또 나타나신 건 아닐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미치겠군. 제길. 신이라면서 악몽이나 꾸고 말이야.’

미스터 황이 5번째 커피를 가져다주자, 그는 또, 커피를 한입에 마시려고 머그잔을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그때, 알렉시스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텔리님. 앤디 공이 알아냈습니다. 그의 옛 정보원의 말하길, 비피는 지금까지 블라디미르 바빌로프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다고 합니다.”

“뭐? 바빌로프? 그건 보바를 말하는 건데. 내 의형제, 보바 말이야.”

텔리는 그렇게 말하고 죠셉을 바라보았다. 죠셉은 자기 아버지인 보로니를 죽였던 바빌로프의 이름을 듣자, 식사하던 것을 멈추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알렉시스를 보고 있었다. 텔리는 5번째 커피를 손에 쥔 채, 알렉시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인질이라니? 왜 비피가 인질이 됐어? 뭣 때문에?”

“미스닉을 유인하기 위한 인질이라고 합니다.”

“미스닉을 유인해? 미스닉이 뭔데? 아니, 누군데?”

그러자, 죠셉이 말했다.

“바빌로프의 숨겨진 손이라고 불리는 브라트바의 암살자입니다. 바로 제 아버지, 보로니의 패밀리를 혼자서 궤멸시킨······. 우리 쪽 세계에선 아주 유명한 인물입니다. 이전에도 물론 상당한 힘을 가졌었지만, 현재의 브라트바는 모두 미스닉의 그 작업을 기반으로 해서 세워졌다고 말해도 무방합니다.”

“잠깐. 네 아버지 보로니의 조직을 부쉈다면······. 그건 바로 나잖아.”

텔리는 눈을 동그랗게 크게 뜨고 죠셉과 다른 마피아 동료들을 번갈아 보았다. 텔리가 자신이 미스닉이라고 말하는 걸 들은 그들의 눈도 똑같이 커져 있었다.

“아니, 내가 왜 바빌로프의 숨겨진 손이야? 내가 그 자식 밑에서 일한 적이 없는데?”

잠깐만. 텔리가 바빌로프, 그러니까 보바를 위해 일한 적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가 보바의 부탁으로 보로니의 조직을 부숴버렸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다만, 그 일로 인해, 보로니는 텔리를 만나 자신이 죽기 전에 텔리의 사제가 되었고, 또 그 인연이 그의 아들인 죠셉에게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현재 보바가 전 뉴욕의 크라임 로드가 되고 그의 조직이 다른 조직들을 누를 수 있었던 이유도 전부 미스닉, 즉, 텔리 덕분인 것도 맞다. 그가 자신의 강력한 라이벌 조직을 단신으로 박살 낸 텔리를 마치 자신의 하수인인 것처럼 포장하고 소문을 냈기 때문에 다른 조직들이 벌벌 떨게 된 것이었다. 알고 보면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는 교묘하게 텔리를 이용해서 조직의 세를 불리고 현재의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