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부. 루시 - 26 화
루시 – 26
그리고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가 방금 들은 것들, 이게 다 뭐지? 이 얘기는 혹시 나더러 파칸을 배신하라는 것인가? 설마 이 여신은 날 스카우트하려는 것인가?’
여신은 마치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깔깔 웃으며 받지도 않은 질문에 대답했다.
“호호호호!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 충성할 대상도 바꿔야지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니까요. 그렇게 한다면 내가 약속한 것을 실현해주겠습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 일한다고? 내가 왜 당신을 위해 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리고리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지자, 여신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야 우리가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네요. 왜 당신이 날 위해 일할 거로 생각하냐면 말입니다. 당신은 역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 사실을 조금씩 깨닫고 있지 않습니까?”
“역사? 내가 역사를 만든다니, 그게 또 무슨 황당한 얘기지?”
“역사란 과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당신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도 흔치 않으니, 당신도 그 역사의 일부분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아, 하긴. 그런 면에선 바빌로프도 역사를 썼지요. 열심히 나쁜 일을 일삼으면서 뉴욕 갱스터의 역사를 바꿨으니 말입니다. 그 역시도 역사적인 인물이긴 합니다.”
“그래. 보스는 지금 누리는 권세를 손에 쥐려고 오랫동안 치열하게 노력했다. 난 과연 그의 발꿈치에나 따라갈 수 있을까? 그가 이룬 것은 정당하든 아니든 모두 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하지만 바빌로프 역시도 역사의 흐름에 몸을 맡긴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도요. 하지만, 당신은 그 흐름을 바꿀 수 있습니다. 왜냐면 기회가 찾아왔거든요.”
“기회?!”
“네. 나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니 내 손을 잡으세요. 그것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기회입니다.”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어느 정도 그리고리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느꼈는지, 여신은 조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나 운명의 여신, 이디레이아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자꾸 나더러 당신을 위해 일하라는데, 내가 당신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지?”
“차차 여러 가지가 생기겠지만, 제일 우선으로는 내 계획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 계획의 일부라니? 혹시 미스닉을 제거하는 계획을 말하는 건가?”
“호오...... 역시.”
이디레이아는 대견하다는 듯이 그리고리를 쳐다봤다.
“그리고리, 당신은 똑똑하기까지 해요. 과연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봤어요. 조금 전 내가 말한 대로 당신은 좋은 그릇입니다. 당신이란 그릇에는 뭘 담아도 모양이 잘 나올 수 있겠단 말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는 이제 됐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듣고 나서 판단하지. 이상한 말만 떠드는 널 죽일지 살릴지 말이야.”
“호호호. 아직도 날 두고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정말 배짱이 두둑하군요. 뭐, 어쨌든 좋은 기백입니다. 맞아요. 당신들이 미스닉이라고 함부로 부르고 있는 텔리를 제거하는 계획입니다. 난 당신이 그 계획의 일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계획의 안전장치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신, 당신은 이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잖아. 조금 전에도 당신이 직접 말하고 보여주지 않았어?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상대방을 제압할 수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굳이 나 같은 사람의 능력이 필요한가? 당신이 직접 미스닉을 처리하면 되잖아.”
“아, 그건······.”
그리고리의 반박이 생각보다 예리했는지, 여신은 곧바로 대답하기를 주저했다. 그리고 잠시 미소를 짓고 있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좋은 질문이지만, 아쉽게도 내 입장에선 시원하게 대답할 수는 없군요. 간단히 대답한다면, 일단 그렇게 하는 것은 내가 일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당신의 방식이 아니라고? 그 무서운 미스닉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렇게 안 하겠다는 말인가?”
“그래요. 호호호······. 난 그렇게 일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텔리는 당신이 말하듯,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상대가 절대 아닙니다. 그를 제압하다뇨. 아무도 그의 힘의 한계를 본 자가 없습니다. 잠시 그를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맘껏 힘을 쓴다면 누가 그를 막을 수 있을까요?”
모호한 대답을 들은 그리고리는 뭐가 개운하지 않은지 계속 캐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만. 그 얘기는 당신도 그를 완전히 제압하기 어렵다는 것 같은데, 보바 혹은 내가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지? 우린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그런 작업은 오히려 초능력을 가진 당신과 당신 밑에 있는 두 괴인에게 어울리는 일 아니야? 난 말이야, 당신의 말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내게 왜 무턱대고 힘을 준다면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려 하는지, 그것도 이유를 잘 모르겠고.”
“유혹이라고 생각하든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하든 그건 당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텔리를 완전히 제압하기 힘들다는 것인지 굳이 설명해야 한다면,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힘만으로는 텔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물마다 모두 다른 사냥법이 있듯, 그를 무찌르는 데도 어울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를 무찌르는 방법이 따로 있다?”
“네. 텔리로 인해 큰 위기에 빠졌던 바빌로프가 어떻게 그 위기를 벗어났는지 기억해보세요. 그리고 그 후, 그가 어떻게 텔리를 이용했는지도요. 그렇듯, 텔리를 상대하려면 힘으로만 밀어붙여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략을 써야 합니다. 덫을 놔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꾸미는 데 당신의 역할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금 당신을 내가 탐나는 이유는 텔리 일이 마무리 된 후, 내게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러는 것입니다만.”
“내 역할이 필요하다고······? 미스닉을 해치운 후, 더 큰 도움이 된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본 미래에서 당신은 내게 바빌로프보다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잠깐만요. 난 아직 당신의 답을 듣지 못했으니, 더 자세히 알려주고 싶지 않군요. 먼저 당신의 답을 듣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 손을 잡고 싶습니까? 아니면 그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가는 모래처럼 그냥 이 기회를 놓치고 싶습니까?”
처음엔 미끼를 물고 술술 잘 넘어오나 했더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그리고리를 보자, 이디레이아는 좀 더 세게 유혹의 낚싯줄을 당겼다. 그리고리는 몇 초 동안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다.
“여신, 당신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겠어. 당신, 내게 한 얘기를 그대로 보바에게도 했나?”
“똑같은 얘기를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럼, 그에게는 뭘 약속했지? 그가 당신의 계획을 도우면, 당신은 그에게 뭘 준다고 약속했냔 말이야?”
이디레이아의 입가에 다시 한 번 미소가 번졌다.
“아무것도 약속한 것이 없었어요. 바빌로프는 생각보다 욕심이 없는 사람이더군요. 그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난 그에게 텔리가 보로니와 누구보다도 특별한 관계였고 그래서 보로니의 아들인 죠셉과 손을 잡을 것을 예언해주었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그는 언제고 자신을 다시 찾아올 텔리의 존재가 두려웠는지, 장차 큰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그를 제거하고 싶어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아무런 대가 없이 나와 뜻을 같이할 수 있었죠. 자, 질문에 답했으니, 당신도 이젠 답해주시죠.”
“.......”
그리고리는 입밖으로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생각을 읽은 이디레이아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렇군요. 당신의 생각, 잘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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