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32 화

루시 – 32

23번과 건수가 요리한 한국 음식을 담은 그릇들이 하나씩 작은 식탁 위에 올라왔다. 식욕을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에 집안에 가득해지자 두 명의 이디레이아와 11번은 소파에서 일어나 걸어왔다. 11번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음식 냄새를 콧구멍에 불어넣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평소와 달리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음음~ 야아아~ 뭐야. 너어무~ 좋은 냄샌데? 이거 정말 23번과 건수가 만든 음식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건수에게로 다가와 두 팔을 꽉 잡아주었다. 마치, ‘이렇게 요리를 만드느라 고생했구나. 칭찬해~’라는 식으로 말이다. 참 가식적으로 들리는 목소리와 행동이었다. 11번의 두 눈이 건수를 보고 웃고 있는데, 눈꼬리가 갈매기처럼 되어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징그러운 모습을 보자, 건수는 갑자기 소름이 쫙 돋았다.

‘하루 종일 시비만 걸더니 왜 갑자기 친절하게 구는 거지? 어울리지도 않게.’

웬일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별스럽게 유난을 떠는 11번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던 23번이 말했다.

“자네, 갑자기 왜 그러는 건가?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니까 컨시우스가 어색해 하잖나. 음식을 기다리면서 무슨 좋은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거야?”

“암~ 좋은 일이 있었지. 생각해보게. 우린 오늘 컨시우스라는 좋은 친구를 만났지. 또 함께 맨하탄에 가서 했던 일도 잘 끝내고 돌아왔어.”

건수는 여기까지 그의 말을 듣고 흠칫 놀랐다. 아니, 건수더러 좋은 친구라면서 넌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의 목을 조르고 그랬니? 아까 더럽다고 하고 냄새난다고 말했던 것은? 건수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던 건 너무 많아서 횟수를 세기도 귀찮구나. 아무튼, 건수의 머릿속에서도 그런 것들이 스쳐 지나가는가 보다.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지도 못하는 것을 보니 말이다.

“좋은 친구요? 제, 제가요?”

11번은 건수를 보고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했다.

“으흥. 봐봐. 네가 내 옷을 입고 있으니, 꼭 친한 친구, 아니, 형제 같지 않냐? 우리 둘 다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하하하!”

“아······.”

건수는 잠깐 아래를 보며 그가 입고 있는 옷을 보았다. 초록색 플래널 셔츠. 11번은 빨간색 플래널 셔츠. 물론 둘 다 11번의 옷이었다. 어쩌면 그는 이런 나무꾼들이 자주 입을 듯한 옷만 가지고 있는 듯했다.

“내 한국 형제!”

11번은 그렇게 말하면서 팔꿈치로 건수의 팔을 툭 쳤다.

“네...... 하. 하. 하.”

그나저나 11번은 왜 이렇게 분위기가 밝게 변했을까? 전등 스위치가 올라가고 내려가듯, 태도가 어두웠다가 밝았다가 하니,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아니, 꼭 하는 행동이 정신병자 같달까? 그런데, 그가 친한 척을 하면 할수록, 그와 건수 사이에서는 더욱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무슨 일로 11번의 기분이 이렇게 붕붕 떠 있는지 모르는 23번과 건수가 의아해하자,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대충 상황을 알려주려고 했다.

“11번이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기쁘군요. 왜 기쁘지 않겠습니까? 11번은 장차 엘리시움을 구할 영웅으로 우리 세계의 신들과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게 될지 모르니까 말이죠. 새로운 영웅, 게르네! 사람들은 그렇게 11번을 기억할지도 몰라요. 사납게 날뛰는 소, 텔리를 무찌르고 세상을 구한 마타도르.”

조금 전 거실에서 이디레이아와 11번이 나눴던 대화의 내용은 23번과 건수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얘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11번은 혼자서 무척 감동했다.

“네, 여신님! 텔리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여신님이 주신 무기로 꼭 그를 무찌르겠습니다.”

자신만만해 하는 그를 보고 한쪽에서 가만히 서 있던 동양인 남자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나서서 잠시 그를 진정시켰다.

“11번. 너무 성공을 장담하지 말아요. 당신을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분위기가 너무 붕붕 떠 있어요. 우리가 준 그 탄환들은 텔리의 메이크바가 만드는 방어막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탄환을 만든 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성능을 보장한 만큼, 탄환은 분명 방어막을 꿰뚫을 테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유도장치가 달린 건 아녜요. 그를 명중시켜야 죽일 수 있는 거란 말입니다. 큰소리는 쳐놓고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럽니까?”

그러자,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11번의 등을 두드리며 대꾸했다.

“그래요. 방어막이고 뭐고 일단 총알이 목표에 맞아야 하겠죠. 그래야, 텔리가 다치든지 죽든지 할 테니까요. 그런데, 또 다른 나. 지금 굳이 그렇게 불안한 얘기를 해야만 하겠어요? 설마 11번이 일을 그르치기야 하겠습니까? 이 자는 50인 중에서도 꽤 실력이 빼어난 편이었다고요.”

그녀가 그렇게 자기 편을 들어주자, 11번은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실력이 솔직히 암살단 1번에서 10번까지의 최고 실력자 형제들에 비할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예전에 텔리에게서 받은 힘을 각성시킨 후부터는 암기를 던지는 기술에 대해서만은 줄곧 자신이 있었습니다. 100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부터 작은 조약돌을 던져도 작은 사냥감의 양미간을 맞출 수 있을 정도였죠. 제가 이 지구에서 오랜 세월 동안 어떤 일을 하며 먹고 살았는지 여신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전 이곳에서도 고향에서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해왔습니다. 바로, 요인암살입니다. 공개적으로 밝은 곳에서 하는 일이든, 숨어서 하는 어두운 일이든 가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다 잘 해냈습니다. 칼이든, 총이든 무엇을 사용해도 상관없었습니다. 또, 제 졍우,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몇십 배나 되는 세월을 살았기 때문에, 일반인에겐 역사라고 할 정도의 오랜 경험이 있습니다. 분명히 신을 제외하고 인간 중에는 저 같은 실력을 갖춘 자는 세상에 또 있을 수 없습니다. 네. 오직 저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믿어주십시오. 여신님께서 주신 귀한 무기로 텔리라는 미친 소를 잡을 수 있는 인물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라는 마타도르뿐입니다.”

“그럼요! 11번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대단해요. 정말 믿음직스럽다고요.”

웨이트리스 재닌을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방긋 웃으며 11번의 편을 들자, 또 다른 이디레이아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며 대꾸했다.

“거기, 또 다른 나. 내가 11번의 실력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난 11번의 기를 꺾을 생각이 전혀 없답니다. 나 역시도 11번을 누구보다도 응원하고 있는 입장이에요. 다만, 그저 더 조심하고 최선을 다하자는 겁니다. 우리 모두 함께 똑같은 미래를 봐서 잘 알다시피, 이번 일은 성공할 확률이 압도적이지만, 실패할 확률이 아예 없는 것이 아니니까요. 소수점 아래의 확률이라고 해도 그런 경우도 엄연히 존재하는 겁니다.”

그 말에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손바닥을 ‘짝!’ 하고 부딪히며 말했다.

“그래서 컨시우스와 23번이 있는 겁니다. 이 둘은 반데릴레로와 페네오입니다. 마타도르를 돕는 토레아도르 팀이지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실패의 확률에 대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왜 컨시우스를 이곳에 오도록 유도했겠습니까? 아주 오랫동안 사라졌던 11번이 텔리 앞에 서 있다면 아무리 그라도 순간적으로 동요할 수밖에 없겠죠. 그리고 뒤를 이어, 한동안 보지 못했던 컨시우스가 텔리 앞에 등장한다면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컨시우스에게 고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입니다. 뱅! 순간적으로 딴 곳에 한눈을 판 텔리는 우리의 마타도르, 11번이 쏜 총알에 쓰러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본 미래의 장면이 아니었던가요? 그리고 그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계산을 했습니까? 아 참, 조금 전 실패할 확률이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23번이 저격을 준비할 거잖아요. 우리가 봤던 미래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정확히 그 장소, 그 순간에, 이들의 손에 의해서 일어나야만 계획이 성공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열심히 모든 요건을 만들었습니다. 정확하게 이 미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죠. 또 다른 나, 어때요? 내가 성공을 확실하게 장담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착착 잘 들어맞을 겁니다. 당신이 걱정하는 실패할 확률······. 그게 확률이라고 해도 소수점 저 멀리 아래에 있는 확률은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잖습니까? 호호호.”

아하, 그런 계획이었구나. 즉, 이디레이아, 혹은 다수의 이디레이아들은 예전에 텔리가 죽는 미래를 보고 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판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제 각자의 역할을 전부 알게 된 세 명은 그녀가 자기들에게 무슨 일을 시킬 것인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계획을 말하는 것을 듣자, 오히려 동양인 남자 모습을 한 또 다른 이디레이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봐요. 또 다른 나. 당신이 분위기에 휩쓸려 무심코 실수를 저질렀네요. 당신이 방금 한 그 말, 원래대로라면 몇 분 후, 우리 모두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해야 했어요. 이렇게 서 있을 때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당신 때문에 아주 미세하지만, 미래가 또 조금 바뀌어버렸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