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12 화

루시 – 12

23번이 건물 내부를 청소하는 동안 혼자 밖에 있던 건수는 스스로 몸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예전에야 거대한 몸집과 보통 사람보다 몇 배나 되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새로운 육체를 가지고 있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몸집도 훨씬 작아지고 아무리 힘을 내봐도 일반적인 인간 이상의 힘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제일 먼저 숨을 곳부터 찾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놓일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어. 예전엔 자동차만큼이나 커다란 검은 늑대들과도 맞설 수 있을 정도였는데······. 지금 이런 몸으로는 도저히 괴물들을 당해내지 못할 거야. 도대체 이 몸은 왜 이렇게 쓸모없는 거지? 털도 빨리 자라서 조금만 면도하지 않으면 금세 털북숭이나 되어버리지 않나.’

그는 이미 털이 덥수룩하게 자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속상해했다. 위기에 놓였음에도 자기 한 몸 지킬 수 없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특히 조금 전 11번이 한 마리의 하익티스를 멋지게 해치우는 것을 보니 더욱 그랬다. 무기력해진 그는 더욱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숨을 곳을 찾았다. 그가 그러고 있는 사이, 또 한 마리의 하익티스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키익. 크르르릉······. 키이익!’

그 녀석은 건수를 발견하자마자 아까 11번에게 당해 쓰러진 놈을 발로 밟고 달려왔다. 건수는 괴물을 보자마자 얼굴이 사색이 되어 소리질렀다.

“사, 사람 살려! 아아악! 누, 누가 좀!”

그냥 도망이라도 갔다면 나았을 텐데, 그만 바보같이 온몸이 얼음처럼 얼어버려서 그러지도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떨리는 마음으로 최후를 맞이하려는 찰나, 하익티스의 뒤에서부터 한 그림자가 빠르게 따라잡더니, 그대로 괴물을 앞으로 쓰러뜨렸다. 그 그림자는 다름 아닌 11번이었다. 그는 괴물의 몸 위에 올라가 한쪽 무릎으로 놈의 상체를 누르고는 한 손으로 괴물의 목덜미를 잡았다. 괴물은 팔을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11번의 힘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꼼짝할 수 없었다.

“크르르.... 끼기기....!”

“이 자식, 웃기고 있네. 아무리 꿈틀거려도 넌 이미 죽은 목숨이다. 야, 늑대 사제! 너 아직 살아있냐? 설마 혼자서 몇 분 동안도 이런 것들을 상대하지 못해서 벌벌 떨고 있던 건 아니겠지?”

그 비아냥거리는 말을 듣고 건수는 기가 막혔다.

“뭐... 뭐라고요? 제가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그런 괴물을 혼자 상대합니까!”

11번, 저 자식이 목숨을 구해준 건 고마웠는데, 힘이 좀 있다고 위기에 빠진 자신을 놀려대는 게 영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었다. 11번은 피식하고 웃더니 더욱 그를 놀려댔다.

“하여간 너희 사제라는 족속들이 다 그렇지. 평소에는 신의 뜻을 전한다느니, 그 뜻을 받들라느니 뭐니 온갖 고고한 척은 다 하며 이것저것 다 참견하면서도, 꼭 이런 위기의 순간이 다가오면 남의 도움이 없으면 자기들 목숨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말이야.”

“뭐라고요? 이봐요. 아저씨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끄응.”

건수는 오늘 처음 만나서 자기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 데도 함부로 지껄이는 11번의 막말을 듣고 발끈했지만, 뭐라고 대들 수도 없었다. 순간 자신의 원래의 몸이었다면 좀 덜 두려워했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래도 저런 괴물을 저리 쉽게 제압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11번은 아무 말도 못 하는 건수를 보고 또 한 번 콧방귀를 뀌더니 자유로운 다른 한 손으로 하익티스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러자, 그 단 한방으로 머리가 깨지면서 하익티스는 그대로 죽어버렸다. 그 끔찍한 광경에 건수는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익티스를 죽이는 건 이렇게 쉬운 건데 말이야. 크크크. 이걸 왜 못해. 어쭈. 눈도 못 뜨네. 왜? 이게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할 광경이냐?”

“.......”

건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다른 데로 돌리고 있는데, 뭔가 쉭 하고 날아와 그의 뒤통수를 치고 바닥에 떨어졌다.

“아얏.”

그가 눈을 뜨고 바닥을 보니, 그건 피 묻은 운동화였다.

“이건 뭡니까?”

“이 하익티스가 신고 있던 신발이지, 뭐긴 뭐야. 네가 신발도 신지 않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딱 들짐승 같으니까 그거라도 신어. 널 보기가 영 역겹단 말이다.”

“아..... 그래도 이건 좀........”

건수는 피 묻은 운동화를 손가락으로 집으며 인상을 구겼다. 죽은 사람의, 아니, 괴물의 신발을 신으라니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시끄러워. 그거라도 냉큼 신어. 네 그 더러운 발바닥을 보니 아주 비위가 상해서 말이야. 그런데 내가 좋은 신발도 줬는데, 넌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해? 앙!”

“예? 하아아.... 예. 예. 감사합니다. 쩝.”

건수는 정말이지 죽은 괴물의 피 묻은 신발을 신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맨발로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어쩔 수 없이 신게 되었다.

‘윽... 이게 뭐야. 심지어 방금 전까지 살아있던 괴물이 신고 있었던 거라 그런지 몰라도 신발 안에 아직 온기가 남아있어. 아우, 토쏠려. 우우욱! 아웁!’

그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건수는 바닥에 손을 대고 엎드려 토하고 말았다.

“우우웁! 웨에에엑! 우웩!”

“하! 저놈 뭐야. 토하잖아. 킥킥킥킥. 꼴이 아주 가관이네. 왜? 그 신발에서 이 하익티스의 발 냄새라도 맡은 거냐? 응? 발 냄새가 심한 놈이었어? 킥킥킥킥.”

11번이 토하는 건수를 보고 소리 내며 웃고 있는데, 23번이 문을 살며시 열고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건수를 보며 말했다.

“이봐, 늑대의 사제. 자네, 잘 살아남았군. 수고했어. 뭐, 토하고 있는 걸 보니 쉽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말이야.”

그러자, 11번이 계속 비아냥거리는 투로 건수 대신 대답했다.

“그 녀석이 수고하긴 뭘 수고해? 내 덕에 겨우 살아남았지. 하익티스 한 마리도 상대하지 못해 죽을 뻔한 걸 내가 구해줬다니까. 하긴, 뭐. 신의 사제라는 것들이 다 그렇지. 안 그래?”

“아, 다 11번, 자네가 잘 지켜준 덕분이구먼. 아무튼, 당신들이 하익티스들을 상대해준 덕분에 나도 건물 안의 청소를 잘 마무리했어.”

“수고했네. 나도 주변에서 하익티스들을 보이는 대로 다 죽여 없앴긴 했는데. 쩝. 뭐, 자네가 저 안에서 청소하는데, 내 도움은 굳이 필요 없었지?”

23번은 생각해보니, 조금 전 청소를 할 때, 살육의 신, 즉, 텔리를 언급해야 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그러자, 텔리를 끔찍하게 증오하는 11번이 왜 그렇게 이 일을 피하려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나 혼자 하는 게 오히려 더 편했어. 그런데 여신님께서 주신 주소는 두 곳이거든. 그러니 아직 한 군데 더 가 봐야 해. 그때도 내가 혼자 일하고 자네와 늑대의 사제는 밖에서 망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자, 그럼 어서 이 일대를 벗어나자고.”

셋은 그렇게 이곳에서 일을 마무리 짓고 서둘러 골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