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7 부.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133 화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133

건수는 대전으로 떠나는 할머니와 싸이언스 가족에게 인사를 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가 집 근처 놀이터를 지나칠 때였다. 조금 전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던 인기척이 등 뒤에서 느껴졌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그가 늘 앉았던 벤치 위에 한 노인이 다리를 올리고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응? 분명 방금 전엔 아무도 벤치에 앉아 있지 않았었는데?’

그가 노인을 자세히 보니 위 아래로 입고 있는 것이 민소매 런닝과 트렁크 팬티 한 장이었다. 신발은 아예 신고 있지 않은 맨발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속옷만 입고..... 아, 그래! 할머니께서 말씀하신 그 신령님이 분명해.’

모르는 사람이 그를 본다면 제 정신이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건수는 이미 그의 정체에 대해서 할머니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가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건수가 벤치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는지, 속옷 차림의 신령은 건수에게 말을 걸었다.

“아이야, 이곳도 마찬가지다. 지축이 뒤틀렸는데 너도 느꼈느냐?”

“예? 아... 아뇨. 전 못 느꼈는데요.”

건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넌 보통 신선이 아니구나. 네게서 이상한 연기가 난다.”

아니, 이상한 연기가 난다니. 건수는 자신의 몸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거나 하진 않았다. 그가 다시 앞을 보자, 신령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 왜 그러시지?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왜 날 저렇게 이상하게 쳐다보시는 거냐구!“

건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더 이상 신이니 신령이니 초자연적인 존재를 만나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지금까지 만난 존재들이 몰고 온 혼돈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가 앞으로 몇 발자국 옮겼을 때였다. 갑자기 그의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투명한 물이 담긴 병에 검은 잉크를 끼얹듯 위에서부터 점점 검게 물드는 것이었다.

“어엇! 내눈이 이상해졌어.”

그는 손으로 두 눈을 비벼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어느새 주위가 많이 어두워져서 점점 검은 색만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 이게 무슨!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가 허둥지둥 대고 있는데 허공에서 신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신령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 이상한 연기가 난다. 또 이상한 냄새도.”

신령은 짧게 몇 마디 말했을 뿐인데, 목소리의 톤도 부자연스럽고 묘하게 이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눈앞의 풍경이 컴컴해지자 건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거 뭐야? 세상이 어두워지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느낌은 마치... 검은 방이잖아? 아니야, 마치 내 의식 속에서 만났던 이디레이아님의 흔적을 보는 것 같다.’

건수는 순간 덜컬 겁이 났다. 고개를 돌려 벤치에 앉아 있는 신령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주위가 깜깜한데 벤치 위에 쪼그려 앉은 신령만큼은 또렷이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신령님은 잘 보이잖아? 어떻게 이런 일이!”

그때였다. 누군가 손으로 그의 등을 미는 것이었다.

“으아악! 뭐, 뭐야?!”

건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양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이젠 곳곳에서 손이 여러 개 나타나더니 자꾸 그를 벤치 쪽으로 미는 것이었다.

“이, 이게 뭐야? 미, 밀지 말아요.”

건수는 몸을 비틀며 극렬하게 저항했다. 하지만 그를 벤치 쪽으로 미는 손길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여러 명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가 계속 저항하는 것을 알았는지, 그들은 이젠 그의 사지를 강하게 잡고 그를 몸을 들어올렸다.

“아아아악! 이거 왜 이래요? 날 놔줘요! 당신들 누굽니까?”

건수가 간신히 고개를 돌려 등 뒤를 힐끔 쳐다보자, 그의 등 뒤에는 과연 여러 명의 노인들이 그의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분들 전부가 다 신령님?’

암흑 속에서 자신이 몸을 속박해서 데려가고 있는 여러 명의 노인들이 모두 신령이라는 것을 깨닫자 건수는 끔찍한 공포에 빠졌다. 그들이 자신에게 호의적인지 적대적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이 신령님들이 나를 어쪄시려는 거지?’

그들이 뭘 어떻게 할 지 파악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방금 전 벤치의 신령이 말한 대로 건수를 그의 앞으로 데려갔다. 벤치의 신령은 코를 치켜들더니 ‘킁킁’ 거리며 건수의 냄새를 맡았다.

“이 아이는 신선은 신선인데, 몸에서 좋지 않은 냄새가 난다. 이상한 냄새도 섞여 있다. 이것은 다른 신령의 냄새구나. 동쪽에서 만난 그 여자 신선의 냄새.... 다른 신령의 냄새.... 음... 그리고 이 냄새는.... 윽.”

신령은 인상을 팍 구기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역겨운 것의 냄새! 수상하기 짝이 없는 아이로구나. 어린 신선, 넌 어떻게 이렇게 많은 냄새를 풍길 수 있느냐?”

“저, 저요? 자...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신령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저 죄송한데.... 붙잡고 계신 제 몸을 놓아주실 수 없나요? 절 좀 내려주세요.”

건수는 자신의 몸을 땅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지만 신령은 건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로군. 아무리 살펴봐도 이 아이는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상 사람의 냄새가 나는가? 그리고 자꾸 이상한 연기를 피우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하려는 거야? 안 되겠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모두들 단단히 이 신선의 몸을 붙잡아.”

“응, 그래”

“알겠어.”

아니, 건수가 팔 다리를 놓아달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한 마디도 하지 않던 다른 신령들은 벤치의 신령이 말하자 일시에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등 뒤에서 들리는 여러 신령들의 목소리를 듣고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저, 신령님들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여기 인간 세상엔 인권이란 게 있다고요. 제 뜻을 무시하시고 계속 이렇게 절 붙잡고 계시면 곤란하다고요.”

물론 그가 그렇게 말했어도 들어줄 신령들이 아니었다. 코 앞에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신령은 갑자기 두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의 눈가에서 실 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삐져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실은 점점 길게 뻗어 나오면서 건수의 얼굴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실이라면, 꿈틀거릴 리도 없고 공중에 떠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건수가 안력을 집중해서 보니 실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처럼 아주 얇은 몸을 가진 벌레들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기괴해서 건수는 보고 기절할 것 같았다.

“아아악! 날 놔줘요! 날 어떻게 하려고 이러는 겁니까? 신령님들이 맞아요?”

건수가 겁에 질려 발버둥을 치자, 그의 등 뒤에서 사지를 잡고 있는 신령들은 더 강한 힘으로 건수를 붙들었다. 눈에서 실, 아니 벌레들을 뽑고 있는 신령은 연신 킁킁 거리며 건수의 냄새를 맡았다.

“공포.... 겁에 질린 냄새.... 이상하다. 이보다 더 인간일 수 없는데.... 이 몸은 절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 요망한 것처럼 인간의 탈을 뒤집어 쓴 것인가? 아니다.... 냄새가 전혀 다르다. 이 냄새는 이곳 인간의 것이 분명해. 신선, 넌 어디다 네 몸을 버려두고 이런 요상한 몸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냐?”

“아아악! 몰라요! 전 아무 것도 모른다고요! 아아악! 사람 살려! 케르케로우스님! 할머니! 멧돼지 산신령님! 제발 절 살려주세요!”

건수는 있는 힘껏 소리쳤지만, 그 누구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이곳으로 그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그 사이에 신령의 눈에서 뻗어 나온 실 같은 벌레는 건수의 뺨을 간지럽힐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촉각으로 실 벌레의 꿈틀거림을 느끼게 되자 건수는 낼 수 있는 최대치의 목소리로 크게 소리 질렀다.

“아아악! 싫어요! 저리 가! 저리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