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57 화

루시 – 57

건수의 발 주변엔 그가 뱉어낸 노란 색의 덩어리가 여러 개 있었다. 이디레이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잘 살펴보니, 날개 달린 벌레 같은 것이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디레이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벌레입니다. 이곳의 벌과 가장 비슷하게 생겼죠.”

“벌이라고요?”

“네. 윙윙 날아다니는 벌. 하지만 꿀을 만들거나 수분을 돕거나 하진 않죠. 저 녀석들은 육식성입니다. 무리를 지어 목표물을 공격해서 쓰러뜨리고 조금씩 살을 파먹죠.”

“······!”

건수는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신이 그런 끔찍한 벌레를 자기 몸속에 넣었다니, 과연 제정신인가 싶었다. 그는 자기 몸 속에서 부화한 벌레를 보기만 해도 역겨워서 계속 헛구역질을 했다.

“다만, 내가 당신 몸에 넣은 건 좀 특별한 종입니다. 하루살이처럼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버리거든요. 다만 이런 벌레를 포로의 입이나 코, 혹은 다른 구멍에서 기어 나오게 하면 극도의 공포감을 끌어낼 수 있지요. 이 기술은 옛날 다른 신으로부터 배운 것인데, 오늘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호호호.”

“아니 그게 말이라고···. 우우욱! 웨엑! 웩! 웩! 죽을 거 같아. 끄어어······.”

“호호호. 죽을 거 같다고요?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 정도면 죽지는 않을 거로 생각해서 이 벌레를 넣었으니까요.”

혹시라도 아직도 몸 안에 벌레가 남아 있을까 싶어 건수는 계속 속을 게워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실실 웃으며 듣기 싫은 말만 하는 이디레이아를 보니 몹시 화가 났다. 그는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다른 세계의 여신이라지만,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 그래, 여신이라면서! 설마 엘리시움의 신들은 모두 이 모양일까? 이렇게까지 인간을 소모품처럼, 장난감처럼 대하는 걸까? 아니야. 케르케님은 절대 이러시지 않아. 하다못해 텔리님도 이 정도는 아냐. 그분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재앙 그 자체라서 재빨리 피하기만 하면 피해를 입지 않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어. 이 여신은 진정 최악이다!’

이디레이아는 예전처럼 건수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눈빛을 보니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 그에게선 아까보다 더 맹렬한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의 화를 더 돋우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됐어! 슬슬 진심으로 화를 내게 되었군. 지금 이 녀석이 내뿜는 기운은 웬만한 짐승들도 겁을 먹고 달아날 수 있을 정도겠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덩치가 산만 했던 거인마저도 등을 돌려 도망가게 할 정도로 살벌한 수준이야.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면······. 역시 또 한 번 김 일용이란 녀석을 연기해야 하는 걸까? 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힘들게 이 녀석의 정신세계로 들어온 이상, 적당히 할 수는 없겠지. 어쨌거나 난 여길 살아서 나갈 수는 없을 테니까.’

“흠! 흠흠!”

이디레이아는 몇 번 헛기침하면서 목청을 골랐다. 그리고 김 일용의 목소리를 완벽하게 흉내 내며 말했다.

“팔다리가 묶여 꼼짝 못 하니까 기분이 어때? 이 손수건 자식아.”

“기··· 김 일용? 아님 여신님?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그래. 또다시 김 일용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건수가 기억하는 김 일용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어릴 적 친구들이 그를 놀릴 때 손수건이란 말로 불렀던 것까지 알아냈다. 아무리 연기라지만, 이젠 김 일용과 겉모습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똑같아지니, 건수는 무엇이 진짜고 가짜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지금 자기가 있는 곳이 자기 몸 안인지 세상 밖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게 꿈인지, 실제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여신은 무슨 여신! 개뼉다구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이 새꺄. 넌 이제부터 좀 쥐어터질 거니까, 맞다가 기절하지나 마라!”

김 일용 모습의 이디레이아는 주먹을 말아쥐고는 괴생명체들에게 린치당한 건수의 명치를 세게 쳤다.

“억!”

그녀의 그 한방은 간신히 진정되었던 건수의 속이 다시 뒤집힐 정도로 충격을 줬다. 건수는 윗니와 아랫니를 갈았다.

“너, 김 일용. 이 자식이 진짜···!”

“어쭈, 꼴에 참고 버텼다 이거냐? 그럼, 스스로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패주지, 뭐.”

이디레이아는 연속해서 건수의 배와 옆구리, 그리고 얼굴을 가격했다. 그가 맞다가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면 잠시 멈췄다가 다시 때렸다. 그렇다. 이건 마치 적군 포로를 잡아다 묶어놓고 고문하는 꼴이었다. 다만 그 경우, 포로로부터 원하는 정보를 얻을 때까지 계속하겠지만, 지금, 이 경우엔 언제 이디레이아가 멈출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이 여신이 미쳤나? 잡겠다는 텔리는 안 잡으러 가고 왜 건수를 잡아다가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고문을 하는 거지?

* * *

“이거 참 당혹스럽네.”

23번은 이디레이아와 그녀의 허벅지를 베고 있는 건수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둘은 마치 곤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지금 이 둘을 어떻게 깨워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다. 건수야 그냥 흔들어 깨우면 그만이지만, 여신에겐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

“우린 곧 나가봐야 하는데 여신님께서 갑자기 잠을 청하시다니, 이걸 어쩌지?”

뒤에서 11번이 23번의 등을 옆으로 밀면서 말했다.

“저리 비켜 봐.”

그의 손엔 긴 밧줄이 들려 있었다.

“자네, 그 로프로 뭘 하려고 그러나?”

“시간 없어. 23번, 자네는 방에 가서 이불이나 혹은 카페트 같은 걸 가져와.”

“이불이나 카페트는 왜?”

11번은 건수를 이디레이아에게서 떼어내서 거실 바닥에 눕히며 대답했다.

“나갈 준비 해야지. 어서 가져와.”

11번은 가져온 밧줄로 건수의 손과 팔, 그리고 몸을 묶으면서 23번에게 어서 이불 같은 걸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23번은 11번이 왜 이상한 일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가 방에서 이불을 가져와서 보니, 11번은 이미 건수의 상반신을 밧줄로 꽁꽁 묶어놓고 있었다. 11번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휴우우. 안 하던 일을 하려니 힘드네. 23번. 미안한데, 난 좀 힘들어서 말이야. 몇 분만 쉴 테니, 자네가 이 로프로 컨시우스의 다리를 묶어주게. 되도록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꽉 묶으라고.”

“컨시우스의 다리를 묶으라고? 자네, 뭐 하는 건가? 컨시우스는 우리와 함께 가는 거 아니었어?”

“당연히 컨시우스는 우리와 함께 갈 거야. 그렇지 않으면 여신님의 계시가 이뤄지지 않잖아.”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자네가 컨시우스를 묶어놓지 않나, 여신님께서는 갑자기 주무시고 계시질 않나?”

11번은 소파에서 정신을 잃고 앉아 있는 이디레이아의 옆에 털썩 앉으면서 대답했다.

“모두 여신님께서 내게 명령하신 걸세. 아까 저쪽에서 자네와 컨시우스가 한국에 전화하고 있을 때, 여신님께서 내게 말씀하셨어. 여신께서 갑자기 사용하고 계시는 육체에서 떠나셔서 정신을 잃으시게 되면, 잠자는 컨시우스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꽁꽁 묶으라고 하셨네. 또, 여신님께서는 사용하시던 이 여자의 육체를 처리하라고 하셨지.”

23번은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물었다.

“자네가 하는 얘기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네. 그러니까 여신님은 지금···.”

“그래, 저 여자의 육체를 떠나신 거지. 지금은 컨시우스의 육체 안에 그와 함께 계셔.”

“세상에······.”

23번은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