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55 화

루시 – 55

건수는 주문이 들려오는 허공을 향해 외쳤다.

“이디레이아님! 이디레이아님, 거기 계신 거죠? 이데리이아님~!”

그의 외침이 들렸던 걸까? 잠시 주문 소리가 멈췄다.

“이디레이아님?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거예요? 이디레이아님, 말씀 좀 해주세요~!”

잠시 후, 다시 이디레이아의 주문 소리가 들리더니, 한동안 계속되었다. 건수도 계속 그녀를 불러봤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자 포기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상하네. 분명히 여신님은 나더러 곧 11번, 23번 아저씨와 함께 곧 나가야 한다고 하셨는데, 내가 왜 이런 곳에 있게 된 걸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게 그렇게 나쁘게 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적어도 여기 있으면, 자신이 텔리에게 위해를 가할 일은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검은 방에 처박혀 있으나, 여기 안에 있으나 무슨 상관이 있겠나.

“그래, 차라리 잘 됐어. 텔리님께서 안전하실 때까지 여기에서 계속 있는 거야.”

그는 그렇게 눈만 멀뚱거리면서 가만히 앉아서 여신으로부터 대답을 기다렸다. 그 와중에도 공중에서 들리는 주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슬슬 지루해지자, 건수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서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사람의 발소리를 듣자, 건수는 벌떡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눈에서 나오는 빛을 비추었다.

“누구···. 거기 누구 있습니까? 아, 아니지. 여기에 나 말고 다른 누가 있을 수는 없는데.”

그랬더니 그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한 걸음씩 빛을 향해 나아오고 있었다. 건수는 의아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분명 자신의 머릿속일 텐데 어떻게 다른 누가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분명 다른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야. 이곳에 오랜만에 왔네. 이게 누구야? 건수 아니야? 여기서 만나네?”

“거기 누구세요? 누구··· 헉!”

완전히 빛이 닿는 곳까지 나온 수상한 방문객을 보자 건수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는 김 일용이었다. 그래. 예전에 건수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녀석. 건수를 괴롭히고 끝내 큰 사고에까지 휘말리게 했던 바로 그 양아치 녀석 말이다. 어찌 보면 지금 건수의 인생이 이렇게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한 원인이 저 녀석이라고 할 수 있다.

“넌 기, 김 일용.”

“하하하. 손 건수, 이 새끼. 여기서 다 만나게 되었네. 넌 날 만났는데 인사도 안 하냐?”

“이··· 이럴 수가 없는데. 너가 여기 있을 수 없는데. 여긴 내 머릿속인데! 아냐.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김 일용, 넌 여기 있을 수 없어!”

“왜 내가 여기 있을 수 없어? 그럼 어디 있어야 하는데?”

“몰라. 너가 어디에 있든 신경 안 써. 하지만 여긴 안 돼. 이 가짜 녀석, 어서 나가!”

“왜 내가 일용이가 아닌데? 아, 이런 모습이어야 너가 더 날 잘 알아보려나?”

순간 건수의 눈앞에 서 있는 김 일용의 모습이 변했다. 그는 이제 병원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바지에 오줌을 쌌는지 병원복 바지 중간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이런 모습이면 날 알아보려나. 어때?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이렇게 오줌도 쌌는데. 예전에 너한테 당해서 칠칠찮게 오줌쌌던 때와 비슷해 보이지 않아? 이제 날 좀 알아보겠어?”

“그런 모습까지··· 마, 말도 안돼. 어떻게 너가 여기 있을 수 있어? 여긴 내 머릿속이라구!”

“야! 이 새끼야! 나, 김 일용이야! 너가 X나 괴롭혀서 병원 신세까지 지게 했던 일용이라고! 이 개XX야! 날 그렇게 만들어놓고 쌩까고 앉아있어? X나 재수 없게!”

“너가 김 일용일 리가 없어. 그리고 남들을 괴롭혔던 건 너였잖아. 나와 다른 아이들. 특히 좐슨을 얼마나 왕따시키고 괴롭혔어! 나쁜 건 너였잖아!”

“좐슨? 왕따? 아, 그 왕따 기집애? 전 순이? 하? 그 XX년. 이름도 순이가 뭐냐, 순이가. 크크크크. X나 촌스럽네. X발.”

눈앞의 김 일용이 친한 친구의 이름을 들먹이며 비웃자, 건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 친구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이 가짜 놈아!”

“뭐? 가짜?”

김 일용은 피식 웃으며 병원복에 붙은 먼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튕기며 떼어냈다.

“아직도 날 못 믿는 거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너 학교 다닐 때 나한테 처맞던 새끼잖아. 이 새끼, 아무래도 덜 맞았구만.”

“헉!”

김 일용이 큰 걸음으로 자기에게 다가오자, 건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어렸을 때, 김 일용 같은 녀석들에게 폭행당하고 짓밟히던 것이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맞서기는커녕 겁부터 덜컥 났던 것이다. 건수가 겁먹은 것을 본 김 일용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이 쫄보 새끼. 그래야 손 건수지. 크크크.”

“다가 오지 마! 그리고 넌 가··· 가짜야! 여긴 내 머릿속인데 너가 왜 여기 있는 거야! 나가! 당장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고!”

“크크크크······ 캬캬캬캬!”

김 일용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크게 웃어댔다. 건수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그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과연.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네요. 그럼요. 어떻게 김 일용이 당신 머릿속에 있을 수 있겠어요. 게다가 당신이 있는 곳은 한국도 아니고 뉴욕이잖아요. 미국 뉴욕. 호호호호호.”

모습은 김 일용인데 입으로는 이디레이아의 말투로 얘기하는 것을 본 건수는 이제야 감을 잡았다. 가짜 김 일용의 정체는 바로 이디레이아였던 것이다.

“이디레이아님? 여신님이 맞으시죠?”

“네. 납니다. 바로 밖에서 당신에게 두피 마사지를 해주던 그 이디레이아죠.”

“그런데, 여신님. 왜 지금 제가 아는 어떤 녀석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건가요? 그리고 말투도, 목소리도 예전의 그 녀석과 똑같군요.”

건수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녀가 옛날 자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던 김 일용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몹시 불쾌했던 거였다. 김 일용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대답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내가 누구의 모습을 하고 있든지 그건 내 마음 아닙니까?”

마치 이런 행동이 무슨 문제가 있냐는 식으로 대꾸하는 이디레이아가 얄밉게 보였다. 뻔히 건수의 기분을 건드리려는 속셈이 보이는 데도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니, 건수는 더 그녀와 대화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신님. 여기서 나가 주십시오. 여긴 제 머릿속이잖습니까?”

“호호호호. 싫은데요. 그리고, 나갈 거라면 당신이나 나나 여기에 들어온 목적이 있으니 그건 해결하고 나가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