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31 화

루시 – 31

여신 이디레이아의 갑작스러운 등장과 건수를 환영하기 위해 가져온 한국 음식까지 생기자, 갑자기 아파트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특히 11번이 제일 신났다. 그는 피곤한 일정을 마치고 거처에 돌아왔는데도 간단한 식사를 한다는 게 성에 안 차서 조금 실망했었는데, 코리안 BBQ를 먹게 되니 저절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스파게티 요리를 하려고 준비 중이었던 23번은 건수를 데리고 주방으로 갔다. 아무래도 잘 모르는 한국 음식이다 보니 요리하는 데에는 건수의 도움이 필요했다. 사실 건수는 예전부터 이디레이아를 좀 껄끄럽게 생각했었고 또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만, 쉬지 않고 시비를 걸어오는 11번과 한자리에 있는 것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차라리 23번과 함께 요리하는 쪽을 더 원했다. 뭐, 겨우 쌈 채소를 다듬고 프라이팬에 갈비를 굽는 정도니까 거창하게 요리라고 부를 일은 없었지만, 그로서는 자리를 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 * *

두 명의 이디레이아와 11번은 마루 소파에 마주 보며 앉게 되었다. 11번은 갑자기 찾아온 이디레이아 때문에 샤워할 타이밍을 놓치게 되었다. 아무래도 여신을 혼자 앉혀두고 샤워를 하러 가자니, 그건 좀 이상할 듯하여 그녀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다만 몸 여기저기가 가렵다 보니 연신 손으로 조심스럽게 몸을 긁어댔다. 이디레이아는 처음엔 내색하지 않았지만, 11번이 몸을 긁는 일이 많아지자, 조금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둘은 평범한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는데, 점점 중요한 일을 얘기하게 되었다. 희한한 것은, 두 이디레이아 중 웨이트리스 재닌만 그와 대화를 나눴다. 동양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디레이아는 줄곧 23번과 건수가 일 하고 있는 주방쪽만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둘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마치 그가 둘을 감시하는 듯 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11번. 내가 확인한 바로는 텔리에게 우리의 메시지가 잘 전달되었답니다. 그는 아마 내일부터 스모크 샵의 주인, 비피를 찾아 나설 것 같아요. 그리고 곧 찾을 겁니다. 그가 비피를 찾을 곳은 바로 스모크 샵이 될 거에요. 당신이 이번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니, 내일쯤 바빌로프를 만나 스모크 샵 주인을 넘겨받으세요.”

“내일 말씀이십니까? 사실 전 오늘도 문제없습니다. 여신님, 차라리 오늘 밤에 일을 거행하시지요. 아까 맨하탄에서 몸도 풀고 와서 그런지 제 컨디션은 어느 때보다 좋습니다. 만약에 여신님께서 지금 텔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신다면 제게 알려주십시오. 제가 당장에라도 가서 놈을 죽여버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11번은 간지러운 목을 벅벅 긁었다.

“물론 전 텔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11번. 지금은 텔리를 공격할 타이밍은, 그러니까 제가 봤던 텔리의 최후의 순간은 말이죠. 지금으로부터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비피의 스모크 샵에서 있을 겁니다. 혹시라도 일이 성공하지 않더라도 그 이후부터 텔리는 계속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그러니 그를 어떻게든 스모크 샵으로 유인해야 합니다. 그러면, 딱 알맞은 타이밍에 그를 죽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는 위기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되고, 가까운 미래에 그 누구도 그를 칠 기회가 거의 생기지 않을 겁니다. 장소는 스모크 샵, 시기는 며칠 후. 미끼는 스모크 샵의 주인, 비피. 그는 죽기 위해 스스로 찾아올 겁니다. 그건 분명해요. 제가 본 미래에서는요.”

“여신님, 그 비피라고 하는 흑인이 텔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인물인가요? 그가 직접 구하러 올 정도로요?”

11번은 또 손으로 어깨와 등을 몇 번이고 긁었다. 여신은 그 모습이 보기 싫었던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진 않습니다. 비피는 텔리에게 클로브 담배를 파는 상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뭐, 그가 실제로 텔리에게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한들, 과연 텔리가 그런 걸 신경 쓰기나 할까요? 11번, 당신도 아시다시피, 텔리는 그 누구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이 아니잖아요? 심지어 자신이 거느리던 50인의 암살단도 직접 없애버렸는데요.”

11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그건 제가 잘 알죠. 여신님 말씀대로 그놈은 그 누구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엔 오직 자기 자신만 있을 뿐이지요. 아무도 믿지 않고 위해주지 않습니다. 그에게 부하란 그저 쓰고 버리는 하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네, 텔리는 그래서 많은 이들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아마 늘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예로부터 신들 사이에서도 악신이라 불리지 않았을까요? 또, 그는 변변찮은 영토도 없었고 따르는 인간들도 거의 없었고요. 심지어 모든 신에게 있는 사제들도 그의 경우, 있다 없었다 하지 않았나요? 그에게는 그저 당신들 50인뿐이었겠죠.”

“흐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11번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여신님, 갑자기 든 생각입니다만, 만에 하나라도 텔리가 비피를 포기해 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클로브 담배가 뭐건 간에, 그런 물건은 다른 상인에게서도 구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뭐하러 자신의 이익만 우선하는 텔리가 굳이 귀찮게 비피를 구하러 올까 싶습니다.”

이디레이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텔리는 누군가가 자신과 관계있는 비피를 못살게 군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것이기 때문에 움직일 겁니다. 텔리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자신을 무시하는 것을 참지 못하거든요. 게다가 내가 그동안 몇 번이나 그의 자존심을 긁어놨으니, 내가 이 일의 뒤에 있다고 알고 있게 된 이상 움직이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렇군요. 여신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텔리도 대의를 위해서 움직인다기보다는, 사소한 일이라고 해도 무엇보다 늘 자기 일이 우선이었고 이익에 따라서 움직이는 소인배였습니다. 예전의 그라면, 분명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눈앞에서 흔들리는 붉은 천을 보고 흥분한 소처럼 돌진해 올 것 같습니다.”

“오호, 그건 꽤 좋은 표현이네요. 네. 그러나 그 성난 소는 마타도르가 손에 쥔 칼을 보지 못하겠지요. 바로 11번, 당신이라는 마타도르를 말입니다.”

“아, 역시 제가 마타도르군요! 그렇담 제 검은 바로 여신님께서 주셨던 무기일 테고요!”

11번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감격했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도 역시 몸 여러 곳을 긁어댔다. 그 모습을 본 여신은 비위가 상했는지 얼굴을 찡그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11번은 그녀의 표정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계속 몸을 긁고 또 긁었다.

“네······. 바로 당신이 마타도르가 되어 그 검으로 텔리의 숨통을 끊는 것입니다. 23번은 당신을 보조하는 역할이 될 테지만, 상황에 따라선 그 역시도 마타도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네? 23도 마타도르가 될 수 있다고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11번은 조금 전, 여신이 자기더러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하길래 크게 기뻐했는데, 23번이 그 역할을 맡을 수도 있다고 하니 김이 빠져버렸다. 사람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1분도 안 되어서 말을 바꾸는 걸까?

“잠시만요, 여신님. 조금 전엔 제가 마타도어가 될 거라고 하셨는데, 23번도 마타도어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건 무슨 의미인가요? 그렇다면, 혹시 여신님께서 보신 미래에서 텔리는 제 손에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요? 정말로 텔리를 해치우는 쪽은 접니까, 아니면 23번입니까? 제발 진실을 말씀해주십시오.”

이디레이아는 묘한 느낌의 미소를 흘렸다.

“호호호. 누가 텔리를 해치우는 게 뭐가 중요한가요? 엘리시움 전체를 위해서라면 누가 그를 해치우든 크게 상관없지 않나요?”

“저, 저.... 전 제가 그 일을 담당하기를 희망합니다. 왜냐면 전 정말이지 이 일에 모든 것을······ 심지어는 제 목숨까지 걸었기 때문입니다! 여신님! 제발 제가 마타도르가 될 거라고 말씀해주십시오!”

“호호호호호. 네. 11번, 아니, 게르네. 당신의 각오를 잘 알았습니다.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웨이트리스 재닌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가 그 말을 끝내자마자,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동양인 남성의 모습을 한 또 다른 이디레이아가 입을 열었다.

“11번. 당신에게 찾아 올 기회는 한 번뿐입니다. 텔리를 죽일 수 있는 그 단 한 번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아요. 영웅이 되거나 아님, 아무것도 아니게 되거나. 오직 그 한 번에 달린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11번의 두 눈이 불타올랐다. 두 명의 이디레이아는 그 모습을 보고 꽤 흡족해하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