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7 부.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59 화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59

건수와 친구들이 체육관 안으로 들어서자 한 노인이 좐슨을 보고 손을 들어 인사했다.

“할아버지!”

좐슨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노인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 아, 순이 할아버지시구나.’

건수는 한 눈에 노인이 그녀의 할아버지임을 알아차렸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와 이목구비가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까이 달려오는 좐슨을 반갑게 맞아주면서 그녀의 친구들에게도 인사했다.

“너희들이 순이 친구구나. 원광이는 전에 한 번 만났고 둘은 못 보던 얼굴이네. 만나서 반갑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는 친구들과 좐슨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순이 넌 친구가 죄다 사내애들이구나. 허허허.”

좐슨은 고개를 돌려 친구들을 보면서 부끄러워했다.

“그게... 얘들은 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에요. 대학 때 만났던 친구들은 토요일엔 다 바쁘다고 해서요. 다음에는 여자애들한테도 오라고 말할게요.”

사실 그녀는 다른 친구들에겐 오늘 일을 알리지도 않았지만 적당히 얼버무렸다. 할아버지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그. 그래도 아는 친구들이란 친구들은 전부 다 데려왔어야지. 오늘 같은 날은 흥행이 얼마나 중요한데.”

싸이언스도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오늘 같은 날 대학 때 친구들도 좀 불러서 여기 있는 외로운 친구들한테 소개도 시켜주고 그러면 얼마나 좋았겠냐. 시합도 보고 데이트도 하고. 일거양득인데.”

도원광은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팔꿈치로 싸이언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인마, 할아버지도 계신데, 넌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하지만 할아버지는 다른 곳을 보느라 싸이언스의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 저기 기자들이 왔군. 순아. 할애비는 저쪽으로 좀 가봐야겠구나. 그럼......”

돌연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든 손을 뻗어 좐슨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피한 후, 잽싸게 그의 뒤로 몸을 옮기는 것이었다. 방어와 동시에 공격의 기회를 잡는 그녀를 보고 할아버지는 싱긋 미소 짓더니 말했다.

“좋아. 오늘 기합이 제대로 들어가 있군. 오늘 시합도 잘 하고, 무엇보다 절대 다치지 말거라.”

“예. 할아버지.”

그 모습을 본 건수와 싸이언스는 속으로 적잖이 놀랐는데, 좐슨이 그 동안 얼마나 훈련을 열심히 했는지 그대로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좐슨과 친구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할아버지에게 함께 인사를 한 후,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싸이언스가 좐슨에게 물었다.

“야, 좐슨. 방금 그거 뭐야? 너 언제부터 그렇게 운동신경이 뛰어났었냐? 그리고 할아버지가 왜 갑자기 널 공격하신 거야?”

“아... 호호호. 그건.....”

그녀가 대답을 하려는데, 도원광이 손가락으로 체육관 내부에 걸린 한 대형 현수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봐봐.”

그 현수막엔 한 근육질의 청년이 팔짱을 낀 채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이 있었다. 좀 옛날 사진 같았지만 그 청년은 그냥 척 보기에도 상당히 강해보이는 인상이었다.

“저 사진 속 인물이 누군지 알겠어?”

도원광의 질문에 싸이언스와 건수는 잠깐 사진을 보다가 동시에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도원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바로 좐슨의 할아버지셔. 과거 전설의 레슬러, 전진.”

싸이언스의 두 눈이 커졌다.

“아! 링 위의 난폭자, 전진!”

그러자 좐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부끄러워했다.

“아이구..... 도원광. 넌 뭐 하러 벌써 애들한테 얘기했어? 그리고 싸이언스, 할아버지는 그 별명을 별로 안 좋아하셔.”

건수는 자기 빼고 나머지 세 친구들이 하는 얘기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좐슨의 할아버지는 왕년에 프로 레슬러였다는 것이라는 부분까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본 싸이언스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좐슨, 아니 여기 전 순이의 할아버지는 예전에 되게 유명한 프로 레슬러셨던 거야.”

“그.. 그래. 나도 거기까지는 알겠어.”

“링 위의 난폭자라는 별명을 가지실 정도로 공격적이면서도 파격적인 플레이를 하셨거든. 나도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 그러니까 아주 유명하신 분이었건 거지.”

좐슨은 친구들이 자기 할아버지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여전히 부끄러운지 울상을 지으면서도 웃고 있었다. 참 묘한 표정이 아닐 수 없었다. 도원광은 고개를 끄덕이며 싸이언스의 말에 동의했다.

“싸이언스의 말이 맞아. 좐슨의 할아버지께서는 체구는 크지 않으셨지만 힘이 워낙 세셔서 당신 키나 몸집의 두 배나 되는 상대편 선수들을 제압하셨지. 한창 전성기 때는 링의 황태자라는 제우스, 최우수 선수와 호각이셨다고 해.”

건수는 좐슨의 할아버지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란 것을 알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알고 보면 그는 좐슨과 할아버지와 한 동네에서, 그것도 같은 길 위의 집에서 사는 이웃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웃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는 단 한 번도 할아버지를 본 적도 없는 사이였다.

“와.... 난 정말 몰랐었어. 좐슨.”

“어휴. 아니야. 그건 워낙 옛날 일이라구.”

싸이언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했다.

“아, 그러니까 오늘은 그 전설의 레슬러 전진의 손녀가 데뷔하는 무대였던 거잖아. 알고 보니 좐슨, 네가 오늘의 주인공이었던 거구나.”

“아니라니까! 난 오늘 그저 첫 시합을 치루는 루키인데!”

“아하, 이제 이해간다. 그래서 네 할아버지께서 아까 널 기습 공격하신 거였구나. 그게 다 훈련의 일부였어.”

“으그그그....”

부끄러워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좐슨을 대신해서 도원광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맞아. 내가 듣기로는, 할아버지께서는 중학생 때부터 좐슨을 그렇게 훈련시키셨다나 봐.”

“와, 그건 정말 몰랐어. 어떻게 좐슨은 지금까지 그런 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거지?”

네 친구들은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중앙의 링까지 걸어갔다.

* * *

건수는 처음 보는 레슬링 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멀리서는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았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또 그게 아니었다. 손을 들어 괜히 링 포스트 등을 두드려보았다. 링 주변에는 여러 사람들이 열심히 물건을 옮기며 준비에 한창이었다. 좐슨은 다른 한쪽으로 가서 어떤 이에게 아는 척을 하더니 잠시 대화를 한 후 다시 친구들에게 돌아와서 얘기했다.

“얘들아. 아까 준비하는데 좀 도울 수 있다고 했었지? 마침 짐을 좀 옮길 일이 생겼는데 사람이 부족하데. 별로 대단한 건 아닌데 잠깐 손 좀 빌릴 수 있을까?”

세 친구들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옮겨야 하는 짐이라는 건 별게 아니었는데 이동식 탁자 몇 개와 의자 몇 개, 그리고 거대한 비닐봉지와 상자에 들어있는 티셔츠 등의 물건들이었다. 먼저 도원광과 싸이언스가 함께 탁자의 맞은편을 잡고는 들어올렸다. 건수는 혼자 남았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혼자 탁자를 들려고 했다. 그는 탁자의 한 쪽 끝을 두 손으로 집어 올리며 들어 올렸다.

“영차!”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탁자가 어찌나 무거운지 다른 한 쪽은 아예 바닥에서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끙.... 차!”

그는 다시 한 번 기합을 넣으며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길쭉한 탁자의 다른 한쪽까지 들리게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인 듯 했다. 건수는 자신의 힘이 예전과 비교해서 상당히 약해진 것을 깨닫고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게... 이럴 리가 없는.... 데. 어디 다시 한 번! 이영...차!”

그는 온힘을 다해 긴 탁자를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손이 잡고 있는 부분만 들 수 있었다. 반대편 끝은 조금도 땅에서 올라가지 않는 것이었다. 어느새 건수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그는 거친 숨을 쉬며 탄식했다.

“헉헉헉....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겨우 이 정도를 못 들 리가 없는데.”

그가 탁자를 잡고 있던 손을 놓자 ‘쾅!’ 소리와 함께 탁자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를 듣고 놀라 싸이언스가 달려왔다.

“건수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건수는 목까지 시뻘개져진 얼굴로 그의 친구를 보며 말했다.

“싸이언스. 나... 내가 좀 이상해졌어. 이젠 이런 탁자 하나도 혼자 못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