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9 화

루시 – 9

건수는 자신이 어렸을 때, 양떼 목장에서 어떻게 처음 케르케로우스를 만났고 그에게 다리를 물렸던 이야기를 시작으로 중간에 큰 사고를 당해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병석에 누워있었던 얘기, 또 8년 동안이나 검은 방에서 케르케로우스의 보호 속에서 홀로 지냈던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깨어나고 보름달이 뜨는 밤에 검은 방에 처음 들어가서 다시 케르케로우스를 만났고 그 후로도 여러 번 검은 방에 들어갔었다고 얘기해주었다. 11번과 23번은 단 한 번의 대꾸도 없이 조용히 건수의 얘기를 듣고만 있었다. 건수가 극도의 긴장 속에서 거기까지 얘기를 마치자, 11번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불쉿! 아 돈 바이 잇. 말도 안 돼. 23번, 난 솔직히 이 얘기를 못 믿겠어. 일단 이 놈은 너무 수상해. 그리고 이 자식이 하는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의심이 쌓이는 느낌이야. 자네도 들었지? 이 녀석 말대로라면 자기는 검은 방에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다는 거잖아.”

“아, 아무 때나는 아니에요! 보름달이 뜨는 밤에만 들어갈 수 있어요.”

“이놈아! 그런 게 가능하면 우리가 몇 백 년이나 이곳에 남아 있었겠냐? 엘리시움으로 돌아갔어도 12번은 더 갔었겠다.”

11번이 그렇게 말하자, 23번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냐. 정말 컨슈 말대로 얘가 정말 검은 방을 지키는 늑대 신수의 사제라면 그런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늑대 신수가 자신의 사제를 검은 방 안에 들이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

“음, 듣고 보니 분명 그렇군. 뭐, 좋아. 일단 그 부분은 나도 인정하겠어. 그래, 컨슈. 네가 늑대 신수의 사제라 치자. 그런데 말이야......”

“컨슈요? 이런. 또....”

건수는 순간 힘이 풀린 눈동자로 앞좌석 시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볼에 공기를 가득 채웠다.

‘운전하는 덩치 큰 아저씨는 말이야. 아까는 내 이름을 컨쑤라고 이상하게 부르더니 이젠 또 컨슈라고 부르네. 아... 그게 묘하게 신경 쓰여. 컨쑤, 컨슈, 컨슈우우우....’

그렇게 건수가 잠시 한눈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자, 11번이 큰 소리로 물었다.

“야, 인마! 너 내가 질문을 했는데, 대답 안 할 거야? 앙?”

“네? 지, 질문요?”

“이 자식이... 감히 내가 말하는데 한 눈을 팔아? 이걸 확 죽여, 살려?”

그런데 그 순간, 건수는 11번의 말투에서 뭔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이 작고 통통한 아저씨.... 자꾸 욱하는 버릇에다 말투까지 텔리님을 정말 많이 닮았어. 옛날에 그 분 밑에서 일했다더니 그래서 성격과 말투를 그대로 닮은 걸까? 그런데, 아까부터 텔리님 얘기만 하면서 심한 욕도 하고 말이지. 척 봐도 그 분을 보통 싫어하는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싫다고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나쁜 걸 배웠나보다. 그래서 옛날에 우리 어머니도 내게, 남의 욕을 하면 그걸 그대로 배운다고 하셨지. 맞아. 그게 진짜인가 봐....’

그렇게 혼자 생각하면서 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의 귓가에 11번의 분노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야! 이 새끼야! 너 왜 내 질문에 대답을 안 해?!”

연거푸 딴 생각에 빠져있었던 건수는 화들짝 놀랐다. 그의 시야에 잔뜩 화가 나 있는 11번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 자식이 날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앙! 내가 몇 번을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 너 설마 이 와중에 딴청 피우는 거냐?”

“지, 질문요? 아, 죄송해요. 잘 못 들었어요.”

“몇 번이나 물었는데 못 들었다고? 으아아아아! 이 자식을 그냥 확!”

23번은 손을 뻗어 화가 나서 시트에서 엉덩이를 들썩이는 11번을 잡아 말렸다.

“컨슈, 방금 이 친구가 네게 물었잖아. 혹시 네가 검은 방으로 들어가서 늑대 신수를 만나 우리 얘기를 좀 해줄 수 있겠냐고. 넌 사제니까, 그분께 잘 말씀드려서 우리에게 검은 방의 문을 열어줄 수 있겠냔 말이다. 너도 아까 다 들었겠지만 우린 이 땅에 와서 있게 된지 무척 오래 되었거든. 가능하다면 정말이지 고향에 꼭 한 번 다시 가보고 싶구나.”

건수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아, 그런 말씀을 하셨었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딴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좀....”

혈압이 있는 대로 올라 얼굴이 벌겋게 변한 11번이 고개를 뒤로 홱 돌리며 물었다.

“왜? 못하겠냐? 아님, 하기 싫어?”

“아, 아뇨. 그런 게 아니고요. 케르케님께 여쭤보기 싫다는 게 아니라 그게... 조금 문제가 있어서요.”

“문제? 무슨 문젠데?”

“그게, 그러니까.....”

건수가 우물쭈물하면서 쉽게 말하지 못하자, 또 다시 11번의 얼굴이 굳어가는 것이었다. 건수는 또 다시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입을 열었다.

“실은 케르케님께서 검은 방에서 막 부활하셨을 때, 제 실수로 그 분을 돌아가시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지금 당장은 그 분을 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둘에게 막 다시 부활한 케르케로우스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줘서 죽게 만든 일을 고백하였다. 그의 말을 들은 11번과 23번은 크게 놀라 잠시 동안 서로의 얼굴을 볼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게.... 무슨 미친.....”

“맙소사. 어떻게 그런 일이.... 인간이 신수를 죽였다고? 말도 안 돼!”

건수는 둘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뭔가 큰 잘못을 한 것을 새삼 깨닫고 부끄러워져서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그 부탁을 당장 들어드릴 수 없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건수가 그렇게 비는 것은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했던 행동이 엘리시움인들의 기준에서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에 이 자리에도 없는 케르케로우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전방을 주시하며 운전하던 23번이 처음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컨슈스, 너가 한 짓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거냐? 아니, 아무리 모르고 했다고 해도 그렇지. 너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고 있는 거냐고?”

“몰랐어요... 그리고 절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전 정말 케르케로우스님께서 그렇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요.”

건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11번이 크게 웃는 것이었다.

“와하하하하! 이놈 완전히 웃기는 놈이잖아?”

23번은 몹시 불쾌한 눈빛으로 동료를 쳐다보았다.

“이봐, 이건 조금도 웃기는 일이 아니라구. 방금 못 들었어? 이 사제라는 놈이 자기가 모시는 신수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잖아?”

“하하하! 들었지. 들었고말고.”

11번은 다시 한 번 크게 웃으며 대꾸했다.

“23번. 난 이 자식이 완전 내 맘에 들었어.”

“뭐? 맘에 들어? 방금 전까진 수상하다고 죽여 버리겠다고 하지 않았어? 11번. 자네 진짜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한 거 아냐?”

“맞아. 처음엔 너무 수상하고 또 이상한 녀석이라 맘 편하게 죽여 버리고 싶었지. 그런데 이 녀석이 범상치 않은 재주를 가지고 있잖아. 이봐, 친구. 우리가 하려는 게 뭐야. 바로 우리를 이렇게 만든 텔리, 그 개자식을 죽이려는 거 아닌가. 그 자식도 신이야. 잊고 있었나?”

“그... 그건....”

23번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전방을 주시했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쉬었다. 11번은 실실 웃으면서 동료와 아직도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는 건수를 번갈아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난 왜 여신님께서 이 녀석을 선택하셨는지 이제야 알겠어. 우리가 거사를 치루는 데 있어 딱 어울리는 멤버를 주신 거야. 하하하하.”

11번은 그렇게 말하면서 카 오디오의 버튼을 몇 번 눌렀다. 다시 한 번 Kansas의 곡, ‘Carry On My Wayward Son’를 재생시켰다. 그런 다음, 한껏 목청을 돋우어 기분 좋은 목소리로 곡의 인트로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Carry on, my wayward son.

There'll be peace when you are done.

Lay your weary head to rest.

Don't you cry no more.

예압! 우후! 어때, 컨시우스. 이 곡 좋지?”

건수는 고개를 들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11번에게 말했다.

“아.... 컨시우스는 또 뭡니까? 제 이름은 건수라고요. 건.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