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43 화

루시 – 43

검은 방의 문이 완전히 열리자, 밖에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에 건수는 눈을 찡그렸다. 그가 옆을 보니, 이미 수호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검은 안개가 사방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디에선가 수호자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이 들렸다.

“어서 나가거라. 내 아들아. 텔리는 널 알아볼 것이다.”

건수는 사방을 둘러보며 수호자를 불렀다.

“저, 저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수호자님? 수호자님, 어디 계세요? 수호자님! 텔리님이 절 알아볼 거라뇨? 무슨 말씀이신지 알려주세요! 수호자니이이이~임!”

그가 아무리 불러도 수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검은 방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 * *

건수가 나온 곳은 키가 높게 자란 나무가 빽빽한 숲속이었다. 한눈에 봐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을 법한 곳이었다. 빛이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검은 방에서 몇 시간이나 있던 터라, 그는 바깥세상의 밝은 빛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눈을 뜰 수 없었다. 그래서 눈을 찡그린 채로 두 팔을 앞으로 뻗어 허우적거리며 혹시라도 몸이 어디에 부딪힐까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걸어갔다. 곧 그의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컨시우스! 다시 내게로 돌아왔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호호호호!”

그 음성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디레이아였다. 그녀의 음성을 듣게 되자 건수는 겁도 났지만, 짜증도 밀려왔다.

‘아, 이런. 정말 여신님이 검은 문 앞에 계셨던 거구나.’

“그럼요. 컨시우스가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는데, 내가 안 찾을 수 있나요?”

그녀는 건수의 생각을 읽고 그렇게 대답했다. 건수는 아차 싶었다.

‘아차, 역시 여신님은 남의 생각을 읽으실 수 있는 거야.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니까 이제 알겠어. 그럼, 최대한 머릿속에서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해. 생각을 비우자. 생각을 비우자. 생각을······.’

“호호호! 뭐,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네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면 읽을 것도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진 않을 텐데요. 아무튼, 잘 시도해봐요. 호호호호.”

이런. 또 그녀에게 생각을 읽혔구나. 그녀가 자기를 비웃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리자, 건수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지만, 최대한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이런. 불쌍한 컨시우스. 깜깜한 검은 방 속에서 오래 있었더니,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는 것 좀 봐. 왜요? 햇빛 때문에 앞을 잘 볼 수 없나요? 하지만, 자꾸 눈을 좀 떠보려고 노력해 봐요.”

그녀의 말대로 건수는 계속 눈을 껌벅거리며 햇빛에 익숙해지려고 했다. 조금씩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그의 눈에 검은 그림자 같은 사람의 실루엣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가 완전히 눈을 뜨자, 그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웬 낯선 흑인 여성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흑인 여성의 모습을 한 이디레이아였다.

“어머. 이제야 눈을 뜰 수 있게 되었네. 돌아온 걸 환영해요. 검은 방에 끌려가서 고생이 많았죠?”

그런데, 그녀 뒤에도 많은 사람이 있었다. 아, 이번에도 정확히 말해야겠군. 그 사람들은 모두 인간의 육체를 강탈한 이디레이아였다. 그들의 수는 적게 잡아도 10명은 넘는 것 같았는데, 건수는 한꺼번에 그렇게 많은 수의 이디레이아들을 보자, 속으로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건수의 생각을 읽은 흑인 여성 이디레이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왜요? 내가 많이 있는 게 왜 끔찍해요?”

‘아차! 또 내 생각을 들켜버렸어. 생각을 비워야 해. 생각을······. 음.’

“호호호.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요. 생각을 비워야 한다는 생각도 생각이잖아요. 사람이 돌덩이도 아니고 어떻게 생각을 아예 안 하겠어요. 호호호호호.”

그런데 그때, 건수는 무슨 이유에선지 눈을 감고 깊은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무슨 거창한 호흡법을 배운 것도 아니었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다.

‘후우···. 후우······. 진정해. 이제 더는 여신님께 생각을 들켜선 안 돼. 아차, 또 생각을 해버렸다! 생각을 지우자······. 생각을 지우자는 생각을 들키지 말자······. 이런. 나도 모르게 또 생각을 해버렸네. 으으음.’

“호호호. 컨시우스, 설마 이거 코미디인가요? 더는 내게 생각을 안 들키려고 생각을 한다는 게······. 응? 이거 뭐지?”

그가 그렇게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그의 귓가에 여신의 자신을 놀리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분명 앞에 서 있는 여신의 인기척은 느낄 수 있는데, 여신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있었다. 건수는 살그머니 눈을 떴다. 그의 눈에 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흑인 여성 이디레이아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갑자기 컨시우스의 생각을 읽을 수 없게 되었잖아? 말해봐요. 컨시우스. 진짜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운 거예요? 돌덩이처럼?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건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놀랐다. 그의 놀란 표정을 보고 그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흑인 여성 이디레이아는 더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는 것 같았다.

“흥! 컨시우스, 아무래도 이번에 검은 방에 불려가더니 뭔가 새로운 트릭을 하나 배워온 모양이군요. 케르케로우스, 그 늑대가 컨시우스에게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해. 음흉한 늑대 녀석 같으니라구. 역시 검은 방이란 공간은 정말 기분이 나쁜 곳이야.”

흑인 여성 이디레이아는 기분이 나빠졌는지, 건수의 어깨를 세게 부딪히며 자리를 떴다. 그녀의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나빠질 법도 했지만, 건수의 표정은 싱글벙글했다. 이제부터 그녀에게 마음이 읽힐 일이 없어졌으니 걱정 하나는 덜게 되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다.

* * *

한편, 검은 방의 입구가 열리자, 그 안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라 조금씩 입구의 주변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예전에 강원도에서 검은 문에서 암흑이 터져 나왔을 때, 그 일대를 덮는 수준의 광범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그저 검은 방의 입구를 덮는 수준이었다. 이윽고, 검은 연기는 마치 벽처럼 모양이 변했다. 검은 연기의 벽이 검은 문 앞에 세워지는 것을 보자, 흑인 여성 이디레이아를 포함한 모든 이디레이아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전에 강원도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이디레이아들은 검은 연기의 벽 안으로 발을 들이려고 했다. 그러자, 검은 연기의 벽 뒤에서 수호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치지직······ 쓸데없는 짓······ 그만··· 해라. 지지직··· 이디레이아······ 쓴맛을 보고··· 싶지 않다면······”

분명 수호자의 목소리는 맞았는데, 마치 망가진 라디오에서나 흘러나올 법한 끊기는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 음성은 몹시 날카롭게 들렸다. 흡사 못으로 양철 냄비를 긁는 것 같은 금속성 소음이 섞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