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7 부.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122 화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 122

“텔리님이요? 그분이 엘리시움의 질서를 어지럽히신다니요? 그것도 이곳, 지구에서요?”

“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렇습니다.”

텔리가 이 지구에서 무슨 수로 엘리시움의 질서를 어지럽힌단 말인가. 건수가 생각하기에도 이디레이아의 말은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의 말은 어딘가 항상 다른 뜻이 숨겨져 있는 듯 했다. 몇 번이나 그녀에게 속았던 그는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임무는 일단 엘리시움에 도착해서 시작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텔리님의 엄청난 능력은 제가 가까이에서 몇 번이나 이 두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감히 그 분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도 없어요.”

“내가 계산한 바로는, 아니, 내가 본 미래에서는 당신이 그를 상대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혹시 당신의 힘이 부족하다면 내가 돕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아요.”

“아니요. 제가 그러고 싶지 않다니까요. 전 텔리님께 아무런 원한도 관심도 없습니다.”

“그래요?”

계속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는 건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디레이아의 목소리는 점점 노기를 띠게 되었다.

“그럼 하는 수 없군요. 요전에도 그랬지만, 당신은 그냥 말로만 해서는 도저히 듣지를 않는 군요. 또 무슨 심한 일을 당해야 내 말을 따르겠습니까? 저번엔 가까운 친구가 봉변을 당했죠. 그럼 이번엔 당신의 부모에게 일이 생겨도 그렇게 고집을 부릴 건가요?”

“네? 제 부모님이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고요?”

건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디레이아가 자신을 협박하고

있지 않은가. 점잖은 말투로 말하고 있지만 분명히 협박이었다.

“아니요. 아직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건수, 당신에게 달려있어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잘 알고 있는 당신이라면 현명한 판단을 할 테지요.”

“잠깐만요. 여신님. 이건 너무 제게 일방적으로만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건.... 이건 절 협박하시는 거잖아요?!”

이디레이아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건수를 기쁜 얼굴로 맞이하던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싸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난 운명의 여신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제 내 영향 아래서 움직이는 인간일 뿐이지요. 내가 당신에게 정해준 운명을 따르던지, 아니면 파멸을 택하던지 선택하세요.”

“그.... 그런....”

“내일 저녁, 당신이 그토록 그리던 케르케로우스를 만나 볼 수 있을 겁니다. 그 동안 궁금했던 일은 그에게 물어볼 수 있을 거예요. 그를 만나면 오늘부터 3 일 후, 뉴욕으로 가는 검은 통로를 열어달라고 요청하세요.”

“네? 뉴욕으로 가는 검은 통로요? 제가 뉴욕에 간다고요?”

이디레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 이디레이아로부터 그런 명령을 받았다고 하면, 그는 먼저 당신의 상태를 찬찬히 살펴 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틀 후 당신에게 검은 문을 열어주게 될 것입니다. 그가 통로를 열어주면 그곳을 통해 뉴욕으로 가면 됩니다.”

“뉴욕이라니요?! 여신님, 전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릅니다.”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차차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이디레이아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전히 싸늘하게 식어있는 눈빛으로 잠시 건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호호호.... 건수, 당신은 텔리와 많이 닮았군요.”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텔리님과 닮았다니....”

“아무 욕심도 없고, 어떤 생각도 없어요. 꿈도 욕망도 크게 자리 잡고 있지 않고요. 그런데 둘 다 대단한 잠재력이 있지요. 그래서 내가 보는 당신들의 미래는 늘 희미합니다.”

건수는 그녀가 하는 말을 반의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각도 없다고, 꿈도 없다고 하는 걸 보니, 대놓고 욕을 하는 것 같기도 한데, 또 대단한 잠재력이 있다는 것은 칭찬 같으니, 정확한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알만 굴릴 뿐이었다.

“어쩌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 하나만 알려줄게요. 너무 뚜렷한 주관을 갖지 말아요. 깊게 생각하지도 말고요. 그렇게 되면 내가 당신의 미래를 완벽히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내가 원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면, 당신은 내 친구가 아니라 적이 될 거에요. 그럼 또 봐요.”

“.......”

그녀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계속 쳐다보았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왜냐고 따지고 싶고, 욕도 하고 싶고, 꽥 소리도 질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유를 빼앗긴 느낌, 허탈한 느낌, 그리고 분노의 감정이 뒤섞여 그를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지만, 등을 돌리고 있는 여신에게 다가가 주먹을 뻗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래를 보고 운명을 제어한다는 능력을 가진 그녀에게 완전히 압도당한 것이었다. 불현 듯, 강원도 아저씨 집에서 텔리가 그에게 이디레이아에 대해 얘기해줬던 것이 생각났다.

“맞아. 강원도에서 텔리님이 내게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다. 이디레이아님을 조심하라고 하셨어. 여신님이 다른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홀려 놓는다고..... 그래, 스타워즈 말씀도 하셨지. 제다이 마인드 트릭(Jedi mind trick). 처음엔 환심을 사고 나중엔 여신님이 계획한 대로 모든 걸 이끌어 가신다고 하셨다. 그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인가?”

그렇다. 텔리는 건수에게 이디레이아를 조심하라고 분명히 충고했었다. 일단 그녀가 나타났다는 것은 운명의 절반은 이미 개판이 된 거라고, 무척 심한 표현을 사용하면서 충고했었다. 그땐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건수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쳐놓은 거미줄에 걸려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보니 비로소 그의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 * *

이디레이아는 노인의 모습을 한 채로 벌써 30분이나 새벽길을 걷고 있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육체가 워낙 고령이라 지칠 만도 한데, 그녀는 걷기를 그만 둘 수 없었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소요파 철학자처럼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는 쉬지 않고 자신이 목표로 삼은 몇몇의 인물들의 미래를 실시간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이미 목적지를 정해놨더라면, 분명 그곳을 그냥 지나쳤을 지도 모른다. 깊이 사색하며 산책하다가 자기 집을 그냥 지나쳤다고 하는 아인슈타인처럼 말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왜 텔리의 미래에 대해 계산해 놓았던 것이 갑자기 틀어진 거지? 그는 분명히 며칠 후에 죽을 운명이었는데 갑작스러운 변화가 생겨버렸다. 마침 건수가 내 영향 아래로 들어왔기에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계획 전체가 수포로 돌아갈 뻔 했어. 하지만, 건수 역시도 불투명한 미래를 가진 녀석이야. 조심해야 돼. 아니면 이외의 결과가 나올 지도 몰라.”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이 요망한 것!”

“응? 누구?”

그녀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몇 m 앞에 누군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미 이마가 반쯤 벗겨진 백발의 노인이었다.

“혹시 당신이 내게 말을 걸었나요? 요망한 거라고 부르....”

“요망한 것!”

쪼그려 앉아 있던 낯선 이는 이디레이아의 말을 끊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그녀는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얇은 속옷뿐인 것을 발견했다.

‘정신 나간 사람인가? 이 추운 날씨에 얇은 속옷만 입고 있다니!’

이디레이아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수상한 노인은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계속 소리 질렀다.

“요망한 것! 당장 이 땅을 떠나! 어서 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

“뭐라고요?”

그 말을 들은 이디레이아는 고개를 돌려 수상한 노인을 째려보았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썩 돌아가! 이 땅에서 당장 나가! 요망한 것!”

그가 계속해서 그녀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지를 때였다. 주변에서 하나 둘씩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 위 아래 얇은 속옷만을 걸친 어린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밝은 곳으로 한 발짝씩 발을 내딛을 때마다, 점점 성장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빛으로 나아와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들은 모두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그녀를 꾸짖듯이 소리 질렀다.

“이 요망한 것! 이 땅에서 나가! 당장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