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부. 루시 - 29 화
루시 – 29
23번은 11번과 건수를 데리고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갔다. 현관에서부터 밖에서 신던 신발을 그대로 신고 들어가는 두 암살단원과는 달리 건수는 신발을 벗었다. 그걸 보고 11번은 손으로 건수의 신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뭐 하는 거야? 왜 갑자기 신발을 벗어? 누가 네 놈의 발냄새를 맡고 싶겠냐?”
“엥? 그래도 밖에서 신던 신발을 어떻게 집 안에서도 신어요?”
“등신아. 들어 올 때 매트가 있잖아. 거기에다 문지르면 되는 거야.”
“그래도 집 안에서 신발 신는 거는 이상하죠! 신발은 더럽잖아요. 비위생적일 것 같은데요.”
“네 놈 발냄새가 훨씬 더 비위생적이야!”
11번과 건수가 별것도 아닌 일로 옥신각신하자, 23번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잠깐만. 11. 바로 이게 문화 차이인 거야. 컨시우스가 있던 곳에서는 신발을 벗는 게 예의라는 거지. 컨시우스. 이곳에서는 집에서 신발을 신어도 괜찮다. 하지만 네가 벗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여기 슬리퍼가 있으니까, 이걸 신어.”
그렇구나. 이런 게 문화충격이란 거구나. 처음 해외로 나와 본 건수는 그런 사정을 몰랐기 때문에 집 안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두 암살단원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만약에 그가 한국에서 밖에서 신던 신발을 그대로 신고 집 안에서 걸어 다닌다면 어머니가 얼마나 혼내실까 싶었지만, 여기서는 그래도 된다니까 희한했다. 건수는 자신을 보고 무턱대고 윽박지르는 11번과는 달리, 23번은 자신의 사정을 조금은 더 이해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왠지 23번과는 조금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컨시우스. 난 한 번도 네가 왔다는 한국에 가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내가 문화적으로 뭘 잘 몰라도 네가 좀 이해해주기 바래.”
23번이 그렇게 말하자, 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오늘 처음 미국에 온 겁니다. 한국 밖으로는 처음 나온 거예요. 외국에 간다고 하면 비행기를 탈 줄 알았는데, 좀 이상하게 오게 되었네요. 사실 이렇게 여기 오게 될 줄도 몰랐어요. 심지어 부모님께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아휴.”
건수는 매번 자신이 이런 식으로 실종되는 바람에 그의 부모가 크게 걱정하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갑자기 외국에 떨어지게 되어 정신이 없는 상황임에도 마음속으로는 부모에 대한 죄송함이 앞섰다.
23번의 집은 밖에서 봤을 땐 몰랐는데, 막상 안에 들어가니 꽤 넓고 쾌적했다. 물건은 별로 없었지만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집주인의 성격을 대충 알 수 있었다. 23번은 마루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마루의 한쪽 벽 앞에는 조금 오래된 TV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커다란 금속공예 작품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까마귀 모양이었다. 아마 그가 이 때 사용하고 있는 육체가 미국 원주민이고 이름도 크로우필드라서 그런 물건이 집에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둘 다 잠깐 소파에 앉아 있어. 내가 금방 손을 씻고 음식을 만들어줄게.”
오늘 별별 일을 다 겪었음에도 손수 요리까지 해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말을 들은 11번과 건수는 놀랐다.
“에이, 23. 그냥 어디 차이니즈 음식이라도 시켜먹지.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와서 무슨 요리야?”
23번은 수트 상의를 벗고 셔츠의 소매를 말아 올리면서 대답했다.
“아냐. 11번, 우리가 며칠 동안 얼마나 식비로 지출하게 되었는지 모르지? 갑자기 찾아온 자네 덕분에 난 실직까지 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이젠 비상금으로 생활해야 하는데, 그렇게 계속 딜리버리 음식을 먹었다간 곧 빈털터리가 될 거야. 내가 하다못해 스파게티라도 만들 테니, 잠시만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
11번은 얼굴을 벅벅 긁으며 말했다.
“에이, 생각해보니 먼저 몸부터 씻어야겠다. 으음...... 킁킁킁. 킁킁.”
샤워를 하겠다고 일어나던 11번이 갑자기 건수에게 코를 들이대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는 거였다. 그리고는 손으로 코를 잡고 큰 소리로 말했다.
“피휴! 이 자식. 몸에서 완전히 썩은 냄새가 나네. 젠장! 무슨 시궁창에 빠졌었나! 안 되겠다. 야! 너가 먼저 샤워해! 빨리! 얼른!”
건수가 오늘 검은 방에서 빠져나온 이후, 공원에서 한 차례 비를 맞기도 했고 여기저기 기어 들어가 숨는 바람에 땀을 꽤 많이 흘렸던 건 사실이었다. 자신도 몸에서 냄새가 나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코를 손으로 잡는다든지 하는 액션으로 자신을 망신 주는 11번이 미웠다.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져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23번이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주자, 그는 도망치듯 빨리 걸어갔다. 화장실에 들어간 건수는 팔을 들어 자신의 체취를 맡아 보았다.
“아후! 진짜 냄새가 심하잖아!”
그는 재빨리 옷을 벗어 던지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자신을 망신 준 11번이 정말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생각하면, 제일 처음으로 샤워를 하는 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처음 방문한 집에서 샤워부터 하는 게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어, 빛의 속도로 샤워를 마쳤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벗어 놓은 옷을 입으려는데 욕조 옆 모든 공간 위를 덮고 있는 카페트가 축축했다. 샤워할 때, 사방에 물이 튀어서 그의 옷도 축축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낭패가! 왜 여기 화장실에도 카페트가 깔려 있는 거야?”
조금 전 들어왔을 땐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화장실 바닥이 타일이 아니라 카페트였던 것이었다. 짐을 싸서 미국으로 여행 온 것이 아니어서 다른 여분의 옷이 없던 그는 하는 수 없이 입던 옷을 다시 입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똑. 똑.’
“건수, 여기 갈아입을 옷이 있어요.”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린 후, 그에게 말을 걸었는데,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한국어였다. 건수는 깜짝 놀랐다.
“네?”
문밖에 서 있는 누군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옷이라고요. 이걸 입어요. 11번의 옷이긴 한데, 키도 비슷한 것 같아서 아마 입을 수 있을 걸요?”
건수가 문을 살짝 열자, 정말 누군가가 옷을 전해주는데, 손을 보니 여자가 맞았다. 건수는 냉큼 고맙다고 정체불명의 그녀가 전해 준 11번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는 옷을 입자마자 재빨리 화장실에서 나왔다.
“아, 당신은!”
문 앞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는데, 그녀는 다름 아닌 아까 식당에서 만났던 재닌이라는 웨이트리스였다. 아니, 정확히는 재닌의 몸을 빌린 여신 이디레이아였다.
“네. 전 이디레이아입니다. 그런데 호호호...... 건수, 그 옷이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 헤어 스타일에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플래널 셔츠까지. 완전 11번과 모습이 비슷해졌네요. 호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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