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50 화

루시 – 50

“그러니까 보바는 미스닉이란 놈을 유인하려고 비피를 잡아뒀었고, 그 미스닉이 바로 나다?”

텔리는 방금 들은 정보로 거기까지 추리를 이어갔다. 뉴욕 암흑가의 공포의 존재로 떠오른 그 미스닉이 바로 텔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피아들은 서로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핌과 동시에 그가 또 무슨 말을 할지 조용히 기다렸다.

“하! 어이가 없군. 인간 녀석이 감히 날 부하로 부려먹어?”

텔리가 그렇게 말하자, 알렉시스가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왜냐면 인간인 그녀도 오랫동안 텔리를 그림자 부관으로 삼았었기 때문이다. 텔리는 클로브 담배를 낀 두 손가락을 휘저으며 말했다.

“됐어. 알렉시스. 네 경우는 달라. 네겐 일부러 내 정체를 숨겼었던 거니까.”

텔리는 손에 들고 있던 5번째 커피를 단번에 마셔버렸다.

“어젯밤 꿈자리부터 영 뒤숭숭하더니 끝내 오늘 아침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겼네. 덕분에 오늘은 아침부터 바빠지겠구만. 지금 당장 보바를 만나서 왜 날 유인하고 싶었는지 들어보고 그다음에 그 녀석과 뭘 할지 결정해 보지. 다들 뭐해? 어서 일하러 가야지. 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죠셉이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그건··· 지금 당장은 불가능할 겁니다.”

“불가능해? 왜?”

“바빌로프는 매일 거처를 옮긴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는 아주 측근이 아닌 이상, 아무도 모른다고 하네요.”

“보바가 매일 거처를 옮긴다고? 왜 그런 짓을 해?”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거겠죠. 그는 적이 많아졌습니다. 일단 저도 그중 하나죠.”

“흥. 보호는 무슨. 그건 쥐새끼처럼 숨어다니는 거잖아. 보바 녀석. 생각보다 겁쟁이로군.”

텔리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번엔 알렉시스가 입을 열었다.

“신이시여. 실은 앤디 공이 얘기한 것이 더 있습니다. 그의 옛 정보원이 그랬답니다. 오늘 저녁 7시에 스모크샵에 비피를 데려다 놓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날 위한 함정이란 거지? 후후후. 재미있네.”

“하지만, 그냥 함정이 아닐 겁니다. 신께서 말씀하셨던 대로 이디레이아님이 보바와 함께 하실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일이 좀 까다로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꼭 그 자리에 바빌로프가 있으리란 법도 없습니다.”

텔리는 클로브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이면서 대꾸했다.

“후후후. 그래. 그래서 재밌다는 거야. 과연 그녀가 날 위해 뭘 준비했을까? 그녀는 운명의 여신이니 뭔가 운명적인 게 아닐까? 후후후. 아마, 내게 죽는 운명이겠지. 다른 뭐가 있겠어. 그나저나 날 기다리고 있겠다는 게 저녁 7시라고 했지?”

“네.”

“알겠어. 초대를 받았으니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려야겠군. 그때까진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으니까 난 다시 잠 좀 자야겠어. 간밤에 이상한 꿈을 꿔서 잠을 설쳐서 그런가. 너무 피곤하네. 하아아암. 아, 그리고 보바가 만약 오늘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후에라도 그놈을 꼭 만나야 하니까 그놈이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

“예.”

텔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방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의 그런 태연한 모습을 본 알렉시스는 속으로 무척 놀랐다.

‘세상에. 신과 신의 싸움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할 지도 모르게 되었잖아? 난 그 생각만으로도 너무 흥분이 되어서 온몸이 떨릴 지경인데, 어떻게 텔리님은 이 상황에도 여유롭게 잠을 청하실 수 있지? 하긴. 저분은 엘리시움의 최강, 최악의 괴수라는 베토케로우스를 한번도 아니라 두번이나 쓰러뜨리신 분이다. 그러고 보니, 난 정말 대단한 신을 모시게 되었구나. 저분의 전사로써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겠다.’

* * *

같은 시각, 브루클린의 한 그로서리 스토어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이곳은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식료품 가게였지만, 아침엔 가게 주인의 아들이 맛있는 서브 샌드위치를 만들어 파는 곳으로 유명해진 숨겨진 맛집이었다. 초기에는 서브 샌드위치를 테이크 아웃으로만 판매했지만, 언제부턴가 꾸준히 찾는 고객들의 요청으로 가게 한쪽 구석에 조그만 테이블이 하나, 둘씩 생기더니, 이젠 거의 제법 조그만 샌드위치 가게만큼이나 테이블을 많이 들여놓게 되었······. 아, 참. 내 정신 좀 봐. 지금 서브 샌드위치 따위 얘기를 늘어놓을 게 아니지. 아무튼, 이제는 식료품 가게인지 샌드위치인지 모르게 된 이 가게의 한 테이블에 두 남자가 앉아서 서브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둘 중 하나는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서브 샌드위치는 건드리지도 않고 있었다. 다만,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서브 샌드위치를 먹는 쪽은 앤디 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고리였다. 그렇다. 바로 브라트바의 블라디미르 바빌로프가 신뢰하는 침착한 그리고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이 왜 아침부터 만나서 함께 서브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 걸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리고리의 험상궂은 얼굴이 더욱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니,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별로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얼굴 좀 펴. 그리고리.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아침에 당신을 이곳 브루클린에서 만나고 있는 거요.”

“FXXK. 참 말을 X같이 하네. 야, 이 새꺄. 이렇게 맛있는 서브를 먹고 있다가도 내 X같은 면상을 보니 체할 것 같다.”

앤디 공이 험한 말을 내뱉자, 그리고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앤디 공이 서브 샌드위치를 씹으면서 말했다.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서로 얼굴 보는 건데, 왜 발끈하고 지랄이야. 인마, 내가 이번에 네 셀 폰 번호를 알아내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친 줄 알아? 겨우겨우 힘들게 알아내서 다시 연락이 닿은 건데 말이야. 왜 얼굴을 구기고 앉아 있어?”

그리고리는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이봐요. 디텍티브 콩. 내가 당신을 직접 보면 반가워할 줄 알았어요? 특히나 여기 브루클린에서 당신을 만나는 게?”

“응. 우린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잖아. 그리고 난 오랜만에 이곳 서브를 정말 먹고 싶었다니까.”

“왜 날 하필 여기서 보자고 한 거요? 리틀 오뎃사와 가까운 이곳에서 내가 당신을 만나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해봐요. 내 입장은 생각 안 해?”

“크크크크. 왜? 스니치처럼 보일까봐 걱정되냐?”

앤디 공이 웃으면서 놀리자, 그리고리는 갑자기 혈압이 오르는지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잡았다.

“하아······. 아, 됐고. 빨리 얘기할 거나 하고 그만 돌아가쇼. 난 앤디, 당신의 얼굴을 1초도 더 보고 싶지 않다구. 내 평판에 금이 가게 할 수는 없으니까.”

“어쭈. 그리고리. 너 요즘에 좀 잘 나간다고 하던데, 이젠 내 앞에서도 건방을 떠는 거냐?”

그리고리는 답변 대신 주머니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서 입에 물었다. 그러자, 앤디 공이 씨익 웃으면서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여주고는 다시 한번 그리고리를 비꼬았다.

“그래. 난 은퇴한 형사고 넌 잘 나가는 갱스터다 이거지? 어이구. 잘 알아모시겠습니다.”

“정말 할 말이 그거밖에 없으면 빨랑 이 동네에서 나가슈. 당신 말대로 잘 나가는 내가 한심한 당신의 엉덩이를 차버리기 전에. 그나마 옛정이 있으니까 내가 지금 봐주고 있다는 걸 알아야지. 쯧!”

“그래. 내가 현역 때,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네 놈 엉덩이만큼은 많이 구해줬었지. 고만고만한 놈들 중에서도 네놈은 좀 괜찮은 녀석처럼 보였거든. 의리도 있었고 나름대로 의협심도 있었지. 아무리 봐도 지금 네가 있는 시궁창 같은 곳에서 오래 있을 녀석 같지는 않았어. 그런데,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였네. 네 녀석이 그쪽 세계에서 이만큼 대성할 줄 누가 알았겠냐? 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던 거지. 아무튼, 옛날 일을 잊지 않아 줘서 고맙다.”

어느새, 서브 샌드위치를 다 먹어버린 앤디 공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그리고리의 포장을 뜯지 않은 서브 샌드위치를 자기 앞으로 가져왔다.

“설마 그것까지 먹고 가려고? 할 말 없으면 그만 좀 가라니까!”

그러자 앤디 공은 씨익 웃으며 가져온 서브 샌드위치를 자신의 겉옷 주머니에 넣었다.

“알았어. 인마. 오랜만에 만나서 얼굴 좀 보려고 했더니 되게 보내려고 애쓰네.”

“제발 좀 그냥 가슈. 그리고 뉴욕이 좀 넓어? 굳이 내 얼굴을 보자고 하면 여기 아니라도 딴 데도 많잖아? 여긴 알게 모르게 보는 눈이 많다니까······”

그리고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앤디 공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리고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야, 그리고리. 이번에 날 도와줘서 고마워. 그런데 하나만 더 부탁하자.”

“그게 무슨 헛소리요? 뭘 또 부탁한다는······”

“듣자 하니, 보바, 그놈이 요즘 생쥐처럼 여기저기 거처를 옮겨 다닌다며? 내가 알고 싶을 때, 그놈이 어디 있는지 알려줘. 이것도 내 클라이언트에게서 요청받은 거야.”

“헉!”

그리고리는 깜짝 놀라 상체를 아래로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미쳤어? 목숨이 뭐 열 개쯤 되나 보지? 그리고 난? 내가 그런 걸 당신에게 어떻게 알려줘? 이번 것도 정말 목숨을 걸고 알려준 건데!”

앤디 공은 일부러 딴청을 피우는 척을 하더니 발걸음을 돌렸다.

“몰라. 새꺄. 아무튼, 나중에 내가 다시 연락할게. 그럼 난 이만.”

앤디 공은 그 말을 마치고 가게 밖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리는 피우던 담배를 테이블 위에 짓눌러 불을 끄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