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기 늑대소년

8 부. 루시 - 52 화

루시 – 52

여신 이디레이아가 떠난 후, 그리고리는 한동안 차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는 여신의 목표와 계획을 알게 되자, 크게 마음이 심란해졌다. 그건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고 치부해버리고 말 내용이었지만, 그는 이미 그 여신이란 여자의 초능력을 몇 번이고 직접 보고 경험한 터였다. 그 정도의 능력을 갖춘 여신이라면 꼭 그렇게 실행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녀가 하려는 게 다른 것도 아니라 지구 멸망이라니. 게다가 자기가 그런 일에 동조하게 되었다니. 도무지 지금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멍하니 밖을 쳐다보다가 한 번씩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곤 했다.

“제, 제기랄! 그런 계획이었다니! 빌어먹을 여신! 날 그런 계획에 이용하려고 끌어들였어!”

그는 몹시 화가 나서 운전대를 주먹으로 마구 두드렸다. 그의 그런 초조해 보이는 모습은 침착한 그리고리라는 그의 별명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

“제길! 제길! 제길! 거지 같은 여신 같으니라구! 뭐? 다른 세계에서 신들을 데려와서 지구를 정화해? 빌어먹을! 이건 내가 바빌로프 따위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수준이 아니잖아! 이건 외계인의 침공이라구! 빌어먹을 우주 전쟁이란 말이야!”

어느새 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Fxxk! 왜 내가 이런 일에··· 휘말려버린 거지? 그 여신이 날 속인 거야. 아냐. 내가··· 내가 너무 신중하지 못했어. 보바에게 휘둘렸던 일이···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까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그녀가 내게서 뭘 원하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함께 일을 하겠다고 말해버린 거야. 하지만 그녀가 그런 생각으로 내게 접근한 줄 알았다면 난 절대 응하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이용당할 바에야 차라리······.”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외투의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턱 아래로 갖다 댔다.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두 눈에 맺혀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턱 아래로 또르르 떨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방아쇠를 당길지, 말지 망설였다.

“아······.”

그는 나지막이 신음하면서 다시 총의 안전장치를 걸고는 권총을 외투의 주머니에 넣었다.

“아아··· 이반···”

그는 자기도 모르게 오래전 러시아에 두고 온 큰아들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나머지 자식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괴로워했다. 그런데 아이들을 생각하게 되니, 조금 전 가졌던 몹쓸 생각에 대해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흥분을 점차 가라앉히며 이디레이아가 떠나기 전 그에게 했던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일 그녀를 배신하거나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면, 나뿐만 아니라 내 자식들까지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했어. 그 미친년도 내 가족의 생명까지 위협하며 협박하는 걸 보면 보바와 하는 짓이 똑같아. 내가 약해지면 안 돼. 쉽게 흥분해서 일을 그르쳐도 안 돼. 피도 눈물도 없는 보바가, 그리고 저 정신 나간 여신이 이끄는 대로 애완견처럼 끌려다니는 건 자멸의 길로 들어서는 거나 다름없어. 어떻게든 이 위기를 헤쳐나가야 해. 난 끝까지 나 자신을 지키고 살아남아서 마지막에 적의 가슴에 칼을 꽂는 승자가 될 거야. 그래. 기필코.”

그가 말하는 적이 누구인지 이 상황에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결정을 냈든 간에, 그는 더 이상 얼굴에 당황하거나 초조해하는 기색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흔들리지 않는 눈의 초점과 꽉 다문 입술을 보니 무언가 큰 결심을 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 * *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저녁 7시를 막 넘긴 시점이었다. 알렉시스는 자기 방 안에서 혼자 있었다. 창문에 기대어 서서 벽시계의 초침이 7시를 가리키는 것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꽤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딱히 손톱을 깨물고 있지는 않지만, 입술에서 엄지손가락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니 더욱 그랬다. 또 조금 긴장한 것인지, 아님, 흥분한 것인지, 눈처럼 하얀 뺨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약 1시간 전에 홀로 아파트를 떠난 텔리를 걱정하고 있는 거였다.

‘텔리님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 당연히 전투는 시작되었겠지? 설마 벌써 끝나지 않았을까? 왜냐면 텔리님은 너무 강한 신이시니까 이디레이아 여신이 어떤 함정을 파놓으셨다고 해도 가볍게 뛰어넘으셨을 것이 분명해. 아, 그래도 내가 한국에서 경험했던 이디레이아님을 생각해보면, 그분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신 분이 절대 아니야. 일이 쉽게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도 꽤 있어.’

그녀는 예전에 강원도에서 만났던 이디레이아를 기억했다. 그 때, 여신은 텔리와 부하들을 자신의 어두운 공간으로 끌어들인 후, 자신을 공격해오던 텔리를 가볍게 제압했던 적이 있었다. 그것만 생각해도, 텔리 혼자서 여신을 당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 그렇다면, 내가 텔리님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을까? 그래, 아무래도 내가 꼭 따라갔어야 했는데! 하지만······.”

하지만, 텔리가 혼자 해결하겠다고 아파트에서 대기하고 말했기 때문에 감히 따라가 볼 수 없었다. 신을 모신다면서 동시에 그의 말을 무시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 아니겠는가. 그녀는 그렇게 약 한 시간 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고민 중에 자세를 고치려고 했는데,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창문의 비친 자기 얼굴이 웬 노인의 얼굴로 변해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창문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꺄악! 이게 무슨 일이야!”

아무리 과거 여러 전장에서 불새의 전사로서 많은 전투를 치르고 여러 일을 경험했던 그녀지만, 창문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비쳤으니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에 힘을 집중해서 하얀빛이 슬슬 올라오고 있었다.

“잠깐만, 여기는 1층이 아니잖아? 그런데 어떻게 바깥에 누가 서 있는 거지······?”

그녀를 노리는 적이 창문 너머에 있는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의 아파트는 지상에서 몇 층이나 올라온 곳이었다. 혹시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어 고개를 몇 번 흔들고 다시 창문을 보았다. 하지만, 분명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목 아래는 그녀의 모습이 분명했는데 머리만 그녀가 아닌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창문에 비친 이상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하지만, 신기한 일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분명 알렉시스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창문에 비친 노인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 놀라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노인의 입술이 움직였다.

“······.”

노인의 입술은 움직이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알렉시스는 그의 입술 모양을 보고 따라 말했다.

“······가.”

“테······ 리······. 가··· 라?”

창문의 비친 노인의 입술을 읽던 알렉시스는 몇 번을 반복하자, 그가 뭐라고 말하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텔리. 가라. 맙소사! 텔리! 가라! 어서 텔리님께 가봐야 해!”

그녀는 서둘러 겉옷을 걸치고는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