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아치들
"도와주시오."
합체불이 애원한다. 아까 손오공 죽이자고 했던 게 누구더라?
"이쪽은 내가 잡아둘 테니, 당신들은 합체불부터 처리하시오."
영보천존이 계산을 끝냈는지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무극대제랑 태상노군이랑 반고가 합체불을 상대하고, 도철로 우릴 묶어두시겠다? 바로 다시 싸우기엔 내 상태가 메롱인데?
반고와 태상노군이 분신 합체술로 만든 진무대제 그리고 무극대제가 삼면에서 합체불을 포위했다. 그리고 영보천존 일행이 다가왔다.
"도철은 내가 막을게."
알지가 원신을 드러냈다. 뿔 열한 개, 발가락 열한 개. 빛도 흡수할 것 같은 검은 용이다. 다리는 네 개고 꼬리 끝은 갈래가 다섯.
원신도 이쁘구나.
감상은 짧았다. 도철과 알지가 싸움을 시작하기 무섭게 영보천존과 여섯 신선이 우리에게 접근했다.
"쉬기는 글렀구나."
"날 상관하지 마라. 내게 접근하는 놈은 알아서 패 죽일 테니까."
법력이 배제된 탓에 손오공은 몸에 침투한 혼돈을 쫓아내지 못했다. 아주 조금씩 밖으로 내보내긴 하는데, 싸움 끝날 때까지 회복할 것 같지 못하다.
"저팔계. 힘을 합쳐야 해. 서로 엄호하면서 싸워야 한다고."
"협공 경험은 내가 너보다 훨씬 많으니까, 너만 잘하면 돼."
손오공이 안 지켜도 된다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손오공이 죽으면 신이 나타나고, 신이 나타나면 혼원대라금선 후보를 전부 죽인다. 그러니 저들도 손오공을 죽이진 못할 거다. 다만, 회복하기 더 힘들게 만들 수는 있겠지.
손오공이 끝까지 회복하지 못하면 내가 마무리해야 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안다고 안 막막한 것도 아니지만.
양쪽에선 산보다 큰 거인들이 싸우고 있는데 여긴 개미가 소꿉장난하는 것 같다. 다행히 여동빈 빼고 딱히 물리계 전사가 없어서 나랑 저팔계가 잘 상대하고 있다.
"야, 다시 거인 못 변해? 저 정도는 아니더라도 열 배 정도만 커져도 되잖아."
"조금만 있으면 돼."
거짓말이다. 처음 써보는 재주라서 쿨타임이 얼만지 모른다. 거짓말했다고 벌 받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영보천존 일행도 딱히 우릴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여동빈과 이철괴만 우리와 싸웠다. 하선고의 환수 소환도 타고난 재주이기에 사용할 수 있다. 다만 남채하가 꽃잎으로 환수에게 실체를 부여할 수 없기에 소환해봤자 눈요기나 될 뿐이다.
"이런 걸 두고 자승자박이라고 하지. 우리는 전부 문무를 겸전한 인재들뿐인데."
손오공과 나, 알지와 저팔계. 모두 법력이 사라진다고 크게 손해 볼 사람이 아니다. 특히 저팔계는 법력 사용을 제한하면 오히려 더 날뛸 수 있다. 다른 건 못 사용해도 저돌희용은 타고난 재주고 법력도 소모하지 않는다. 물론 타고난 재주라고 아무 때나 막 갖다 쓰는 건 아니다. 짧은 기간에 여러 번 사용했기에 당분간 쉬어야 한다.
알지와 도철의 싸움은 팽팽했다. 사대마수 중에서 가장 강한 도철. 알지도 만만치 않은 것 같긴 한데, 싸움 기술이 도철과 비교하기 미안하다. 흉명이 자자한 도철은 싸움을 밥 먹듯 했고, 자신을 죽이러 찾아온 수많은 수련자와 마수를 상대했다.
반면 알지는 제대로 된 싸움을 얼마 겪지 못했다. 약한 자는 아무리 많이 상대해도 도움이 안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찰나의 시간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 건 경험이다.
반대편 싸움은 아주 재밌게 진행되었다. 합체불은 반고와 진무대제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내며 무극대제만 패고 있다. 재수 없이 합체불에게 잡힌 무극대제는 맷집으로 버티며 남은 둘이 구해주기만 기다렸다.
"반고 도끼는 여의가 아닌가 봐?"
[크게 변하려면 혼돈의 힘이 필요합니다.]
"혼돈은 법력이 아니잖아."
[반고는 법력을 혼돈으로 바꿔 사용합니다. 법력이 배제되었기에 혼돈의 힘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공 초식을 펼칠 때 체력을 소모하는 것처럼, 반고도 혼돈을 소모하는구나.
체력은 내공과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거의 비슷하게 여겨진다. 굳이 구분하자면, 신선이 사용하는 체력은 선천공에 속하고, 일반 무인이 사용하는 내공은 후천공에 속한다.
갑자기 무극대제가 부들부들 떨더니 다섯으로 흩어졌다.
"기운의 흐름이 엉켜서 합체 상태를 유지하지 못한 건가?"
[정확합니다. 합체한 다섯의 수준 차이가 너무 커서 강한 타격에 취약합니다.]
오행인일 때 공명멸절인이 가진 힘도 제대로 못 쓰던 거랑 비슷하다. 오행진인이 다섯 기운을 비슷하게 다스려줬고, 환혼천공 안에서 촛불 도움으로 서로 잘 융합했다.
"포기, 나도 포기한다. 죽이진 마."
지금 옥황상제의 자아는 현궁인가 황제인가? 아니면 둘이 합치면서 새로운 자아가 생겼을까? 그러고 보니 셋이 수작을 부려 법칙을 바꾼 후부터 하나하나 양아치 나부랭이가 되어가는 것 같다.
옥황상제는 떨거지들을 거느리고 영소전 밖으로 나는 듯이 달렸다. 실제로 날았기에 비유법이 아닌 객관적 사실의 객관적 서술이다.
"영보천존. 반고와 태상노군 해치우고 손오공까지 해치우면 우리 셋이 남는다."
합체불, 사람 실망케 안 하는구나.
"형님, 형님도 저렇게 비굴하게 살고 싶으세요?"
"지금 자결하는 방법 고민하고 있다. 저렇게 될 거면 아예 죽고 말지."
손오공은 아직 멀쩡한 것 같다. 반고도 상태가 그렇게 심각하진 않고. 손오공이 만약 저런 양아치가 된다면, 난 공명멸절인을 들고 손오공과 싸우겠다.
나를 굳건하게 지탱해주는 여러 기둥 중 가장 튼튼한 손오공이다. 그 기둥이 썩을 조짐이 보이면 직접 무너뜨리고 새로 세우는 게 낫다.
"그렇게 하자. 여기 바로 처리하고 합류할게."
어차피 동맹을 얻기 힘든 영보천존은 합체불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상호불가침 정도만 되어도 영보천존에겐 이득이다.
난 이 싸움을 오래 끌어야 한다. 최대한 손오공이 회복하길 기다려야 하니까. 솔직히 합체불과 반고 그리고 태상노군 셋은 상대하기 아득하다. 사타왕은 미친놈처럼 진체까지 뽑아서 싸웠기에 그나마 쉽게 이겼다. 그놈도 내가 그렇게 미친놈인 줄 몰랐겠지. 뭐, 당사자인 나도 전혀 몰랐으니까 초면인 그놈이 어찌 알겠냐만.
"하선고, 남채화, 한상자, 조국구. 기회를 노려 손오공을 공격해라."
여동빈과 이철괴를 앞세우고 구경만 하던 영보천존이 끝내 소매를 걷고 나섰다. 멍청한 놈들, 목숨 걸고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나 보다. 이 기회에 이철괴 아웃.
기본기로만 상대하다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이철괴에게 연환권 하나 먹였다. 이들은 나와 저팔계를 빨리 처리하고 손오공을 회복 불가 상태로 만든 후 알지를 제거하고 저쪽 전장에 합류할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특히 무공이 특기가 아닌 이철괴는 갑자기 템포를 올린 내 공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만큼 반응이 느렸다.
"하선고, 남채하. 이철괴 데리고 밖으로 나가라. 빨리 안 구하면 목숨이 위험하다."
법력이 있다면 격산타우 수법으로 몸 안에 집어넣은 내 연환권을 버텨냈을 거다. 게다가 호흡 몇 번 할 시간이면 태반은 회복했겠지. 그러나 법력을 배제했기에 인간의 한계를 벗지 못한 이철괴의 몸이 견디지 못한다.
"저팔계."
다행히 저팔계가 내 의도를 알고 뒤로 훌쩍 물러나서 원신을 꺼냈다. 검붉은 기운이 저팔계 몸 주변에 너울거린다.
"돌진을 조심해라."
이철괴 자리를 메꾼 영보천존이 소리친다. 그러게 법력은 왜 배제했어? 태상노군은 무공화한 분신 합체술을 믿고 그랬고, 영보천존은 도철 믿었겠지. 통천교주는 마교 정예를 믿고 그랬을 거고. 과거불과 현세불과 미래불이 합체할 건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거다.
웃기게도 저돌희용도 사용하지 않은 저팔계의 평범한 돌진에 이들이 쩔쩔맨다. 단순한 돌진으로는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지 못하지만, 어느 순간 저돌희용으로 파괴력을 수백 배 증폭할지 모른다. 평범한 돌진이라고 방심하기엔 목숨 걸린 일이다.
"동빈 씨, 한눈팔면 내가 섭섭하지."
다리로 용유구천 초식을 사용해 여동빈 하체를 공격했다. 저팔계 때문에 집중력이 분산되어 반응이 아주 조금 느렸다.
"다리로도 권법 쓸 수 있다고. 솔직히 이건 이미 권법의 경지를 넘었어. 체술이라고 해야 한다고."
이철괴에게 사용했던 격산타우로 연환권을 밀어 넣는 수법은 이미 대비했을 거다. 한 번 보면 아는 경지니까. 그러나 나타가 내게 세 번 연속으로 손해 봤던 걸 생각해보라고. 난 주먹이나 가위밖에 없는 머저리가 아니다. 상대에게 치명타를 안길 수법이 최소 세 개는 있는 간지남이라고.
혼천릉을 상대할 때 사용했던 찬권을 조합한 '물어뜯기' 권법을 펼쳤다. 맹수가 물어뜯는 것처럼 예리한 공격들이 서로 엇갈리는 초식이다. 이철괴보다 무공이 훨씬 강한 여동빈은 목숨에 지장 받을 정도는 아니지만, 전투력이 대폭 감소했다.
"사부님. 힘든 상댑니다."
"저팔계, 손오공 지켜."
저팔계라면 여동빈과 영보천존에게서 손오공을 지켜낼 거다. 어차피 오래 자릴 비우려는 건 아니고, 잠깐 알지 도와주러 갔다 오는 거니까.
도철 이 나쁜 새끼. 내 여자친구 부둥켜안고 무슨 짓이냐? 도철이 암컷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용납할 수 없다.
등산하는 기분이다. 알지는 용이어서 몸을 변화하는 데 법력이 들지 않는다. 물론 작게 하는 건 한계가 없지만, 크게 변하는 덴 한계가 있다. 아마 지금 한계에 가까운 크기일 거다. 도철은 원래부터 크기로 유명한 마수다. 엉켜있는 둘의 몸을 타고 쭉 올라갔다.
알지가 사냥감 감은 뱀처럼 도철을 감았고, 도철은 감긴 상태에서 네 다리를 놀려 알지 몸을 끊임없이 타격했다. 정말 간지라고는 1도 없는 무식한 맷집 대결이다.
알지로서는 이보다 나은 상황이 없는 게, 떨어져서 타격전을 하면 알지가 기술적으로 너무 밀린다. 양처럼 생긴 도철은 신공표의 검법이나 탁탑천왕의 창법이 무기의 한계를 벗어난 것처럼,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버렸다. 양이라면 응당 취해야 할 싸움 자세에 구애받지 않고 온갖 짐승의 전투법을 마구 가져다 활용했다.
쉬지 않고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하니 약간 버거운 느낌이 들었다. 법력을 통해 체력을 보충받지 못하니 그런 거다. '내 체력 무한'을 외칠 수 있는 건, 체력만 많아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소모한 체력이 법력을 통해 보충되기에 격렬한 싸움만 아니면 소모하는 대로 회복할 수 있을 뿐이다.
'사타령에서 보여준 내려치기. 죽엽청이 보여준 내려치기. 오늘 본 내려치기.'
코로 호흡하며 숨을 골랐다. 암시 효과인지 힘겨운 느낌이 사라졌다.
아까 사타왕을 상대로 내려치기 두 번 했는데,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두 번의 공격으로 사타왕을 황천길로 배웅했는데, 내 현재 수준을 훨씬 벗어난 공격이었는지 뇌리에서 말끔하게 잊혔다.
하지만, 내 몸이 기억했을 거라는 믿음으로 과감하게 시도한다.
"촉화요천."
북천문 부술 때 급하게 지은 이름. 솔직히 멋없어서 바꾸려 했는데, 그 이후로 반전에 반전이 거듭하며 초식 명을 진지하게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급하게 생각하려니 더 좋은 이름도 떠오르지 않고. 이번 일 끝나고 이름을 다시 고민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며, 공명멸절인으로 도철의 뿔을 때렸다.
도철이 앙탈 부리는 바람에 수만 미터 높이에서 떨어졌다. 바닥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데, 귀찮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은 느낌. 뭐,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고 죽지는 않겠지. 이곳 중력 가속도가 딱히 센 것 같지도 않으니까.
잉어 지느러미를 닮은, 다섯 갈래로 나뉜 꼬리가 내 몸을 받았다. 어느새 도철을 푼 알지다.
"알지, 고마워."
"대단해. 도철이 죽었어."
알지 몸이 빠르게 작아지더니 다시 여성체로 변했다. 원신도 이쁘지만 지금 모습이 훨씬 이쁘구나. 알지는 신부 안기 자세로 나를 안고 손오공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영보천존이 앞장서서 영소전 대문으로 달렸고, 여동빈을 업은 한상자가 그 뒤를 따르고 조국구가 마지막에 서서 엄호했다.
싸움은 또 소강상태가 되었다. 반고와 태상노군은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 누구라도 합체불을 잡아두고 다른 사람이 타격했으면 합체불을 해치울 수도 있었는데, 서로 경계하다 보니 결정적인 기회를 잡지 못했다.
"지금까지 은원은 다 잊고, 판을 새로 짜자. 손오공, 정식으로 동맹을 요청한다. 저들은 혼돈을 부르려는 자들이고, 우리는 혼돈을 막으려는 동지다."
합체불 얼굴 두께를 측정하면 기네스북 등재는 따놓은 당상이겠지? 그래도 하나는 인정. 상황이 바뀔 때마다 자기에게 최선이 되는 길을 바로바로 찾고 시도하는 저 판단력과 행동력.
"손오공. 왜 혼돈을 거부하는 거야? 신의 장기 부재로 세상이 변이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세상과 지성체는 전에 없는 혼란을 겪게 된다고. 어쩌면 세상의 법칙이 모두 바뀔지도 몰라."
반고는 손오공을 설득하려 했다. 손오공을 설득하기만 하면 반고와 태상노군 그리고 손오공 셋이서 합체불을 해치울 수 있다. 픽이 3개인 상황에서, 혼자 2개 소모하는 합체불은 왕따다.
지금 반고가 혼돈 덕분에 다른 자들보다 반 수 정도 더 높고, 합체불이나 손오공이나 태상노군은 비슷한 실력이다. 물론, 난 싸우면 손오공이 무조건 이긴다는 데 전 재산 걸겠다. 아무리 강한 자와 싸워도 이기는 건 손오공이다.
"생각을 안 바꾸더라도, 그냥 가만히 나와 반고가 합체불을 해치우는 걸 지켜보면 돼."
"몇 년 걸릴 것 같은데?"
손오공의 말에 태상노군이 미소를 지었다. 딱밤 부르는 미소.
"내가 합체불을 잡을게. 반고가 처리해. 방금 도철 해치우는 장면 보고 감명받았어."
암만 봐도 개소리 같은데? 합체불이나 반고와 달리 태상노군은 분신이 합체한 진무대제가 싸운다. 분신이 받은 타격이 본체에 전달되지 않게 하는 기술은 나도 할 줄 안다. 그러니까 태상노군은 진무대제를 희생해 합체불을 해치울 작정인 것 같다.
합체불만 사라지면 후보가 셋만 남으니까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 어쩌면 다음 단계는 무력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튼, 태상노군이 손해 보는 일은 절대 안 하리라는 건 장담할 수 있다.
갑자기 합체불이 사라졌다. 뭔가 싶었는데, 여래불과 연등고불 그리고 미륵불 셋으로 다시 분리했다.
"자, 반전의 시간이다. 법칙을 변경한다."
뭐지 싶었는데, 영소전이 수많은 실뿌리로 덮인 걸 확인했다. 말라 죽은 생명수가 어느새 뿌리를 내리고 손바닥과 낭낭건곤에 침투했다.
"안타깝게도 하나만 바꿀 수 있군. 그럼 법술만 허용한다로 바꾼다."
반고가 줄어들었고, 진무대제도 사라졌다. 서천 진영엔 관음보살을 비롯한 수천 명 부처가 있다.
판이 또 한 번 뒤집혔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