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마온
호랑이 기운이 솟는다. 형천의 힘이 불끈댄다.
- 여의금고봉을 취했기에 곧 태백금성이 찾아올 거다.
"꼭 천계에 가서 마구간지기 해야 하나요?"
원래 나는 4천 포인트의 선업 점수를 쌓았다. 천계에서 높은 관직을 얻으려면 이 포인트를 바쳐야 한다. 4천 정도면 필마온 대신 조금 더 나은 관직도 받을 수 있었는데, 손오공이 밀입국하다 들키는 바람에 다 날렸다.
-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그런데 복숭아랑 금단이랑 옥황상제의 술은 어떻게 훔쳐먹어요? 방비가 장난 아닐 텐데."
- 분신의 경지를 이뤄야지. 네 몸은 말똥을 치우고 원영을 보내 훔쳐야 해.
금단을 다 먹어치운 원영은 아직도 태를 드러내지 않고 있다. 현재 원영은 성장을 멈추고 휴식기에 들어갔다. 태를 이룬 원영만 휴식기 들어가는데,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 너는 원래 손오공이 돼야 했었다. 그런데 현재 인간이고, 몸에 봉인한 흑염룡이 살고, 형천의 힘을 흡수했다. 네 존재감이 넷 중에서 가장 떨어지기에 원영이 태를 얻지 못한 거다.
"그런데, 혹시 복숭아를 먹으면 흑염룡이 깨어나지 않을까요?"
- 서왕모의 복숭아는 신선을 위한 과일이다. 신선에게 생명력은 필요 없으니 복숭아에도 당연히 생명력이 없다.
"그럼 천궁에 가면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나요?"
- 생명력이 필요 없다고 굳이 생명력이 없는 물건만 찾아 먹지는 않는다. 그러니 금식은 계속해야 한다.
"대빵. 밖에 수염이 희고 긴 늙은이 왔다."
이놈의 원숭이들은 존대를 모른다. 그리고 내가 가르친 적도 없는 이상한 단어들을 마음대로 끌어다 쓴다.
"허락한다."
태백금성이 틀림없다. 법력이 높은 대라금선이어서 내 허락이 없어도 수렴동에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무력은 형편없는 신선이라 겨우 원영의 경지인 내 거처도 일일이 허락받는 예의 바른 모습을 보였다.
"천계 33천 태백궁에 거주하는 태백금성이 화과산의 영주이자 수렴동의 주인에게 인사드립니다."
"천계에서도 손꼽히는 덕망 높은 대선을 뵙게 되니 삼생의 영광입니다. 곡차 한잔하시겠습니까."
곡차는 술을 고상하게 이르는 말이다. 태백금성은 입이 고급이어서 화과산의 술 따위는 눈에 안 차겠지.
"공무가 있는 몸이라 곡차를 멀리해야 합니다."
"공무 중에 잠깐 들린 것이군요. 피로가 풀릴 때까지 마음껏 쉬시다 가십시오."
"수렴동에 와서 여의금고봉의 주인을 천계로 올리는 게 제 공무입니다. 손 선생은 아직 천계에 등극할 경지는 아니지만, 옥황상제께서 특별히 윤허하셨습니다. 저는 여의금고봉의 주인이 궁금하여 칙사를 자원했습니다."
나 천궁에 특채된 건가? 수만의 산신과 수십만의 토지신이 오매불망 꿈꾸는 천계 등극. 더군다나 난 옥황상제 낙하산이다. 아니지, 여의금고봉 낙하산인가?
"상제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응해야죠. 그러나 보시다시피 제가 청빈(淸貧)하게 살다 보니 변변한 옷가지조차 없습니다."
"하계에만 계셨으니 당연히 그러시겠지요. 제가 미리 옷을 준비했습니다."
신선들은 체면을 중시한다. 용왕도 체면 때문에 자기 애병인 영롱을 내게 주려고 했다. 나를 천계로 데려가는 사람이 태백금성이니, 내가 추레하게 입으면 당연히 태백금성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능라비단입니다. 은하수의 물로 빚은 천으로, 직녀가 일 년에 하루만 쉬면서 짜낸 천이죠."
옷이 날개라더니. 능라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으니 저절로 몸이 날아다닌다. 태백금성이 내게 준 옷은 날개옷이었다. 내 경지가 낮아 높이 날지 못하는 걸 알고 디자인뿐 아니라 성능도 우수한 옷을 준비한 거다.
이 할아버지 호감 인정.
"손 선생.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늘 문제 하나 내라고 합니다. 못 맞추면 이후 정보를 거래할 때 반값으로 해드립니다. 대신 내가 맞추면 정보 거래는 나하고만 해야 합니다."
태백금성은 정보통이다. 정보를 원하는 사람에게 선업 점수를 받고 정보를 건넨다. 지금 태백금성은 나랑 조건부 계약을 시도하는 거다. 만약 태백금성이 못 맞추면 내게 반값에 정보를 건네겠다는 뜻이다.
만약 이런 계약이 없이 그냥 나에게 정보를 반값에 주면, 나랑 태백금성 둘 다 벌 받는다. 귀신이랑 계약을 어겨 정학 처분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공정 계약을 맺고 이행하면 계약 쌍방이 모두 처벌된다.
"태백금성께서 원하시면 제 생각은 쉽게 읽으실 텐데요."
일부러 수렴동을 떠나 천계에 발을 들인 후에야 말을 꺼낸 건, 수렴동에서 내가 지능 버프를 받을까 봐 걱정돼서일 거다. 그러나 나도 녹록하게 당해줄 생각은 없다.
"그게 걱정되시면 이 금오관(金烏冠)을 빌려드리죠. 이걸 쓰시면 생각을 읽을 수 없습니다."
여의금고봉 수준의 법보다. 물론 격이 비슷하다는 거지 전투력을 따지면 여의금고봉 발치에도 못 미친다. 금오관을 쓰니 머리가 시원하고 맑아진다.
"옛날에 대우가 물을 수십 년 다스렸습니다. 그 수십 년 동안에 자기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쳤는데 한 번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
"대공무사(大公無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이 튀어나온다. 태백금성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고객을 한 명 확보했다고 여기는 거겠지?
"틀렸습니다. 마누라가 못생겼기 때문입니다."
태백금성의 입이 딱 벌어졌다. 계약이 내 손을 들어주었다. 출제자인 내가 진심으로 내 답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대공무사라는 사자성어도 몰랐다.
"이렇게 할까요. 제가 문제 하나 더 내겠습니다. 만약 태백금성께서 맞추시면 방금 내기는 내가 진 거로 하죠. 만약 이번에도 못 맞추시면 이 금오관을 저에게 주십시오."
일부러 '이번에도' 네 글자에 악센트를 강하게 줬다. 태백금성이 발끈하며 새로운 계약에 응했다. 속이 음흉하고 뒤로 호박씨 까는 신선은 몇 없다. 그런 성격으로는 신선 되기 힘들다. 태백금성은 명문 출신에 승승장구하여 대라신선이 되었기에 감정 표현이 솔직하다.
"하나에 하나를 더했는데 셋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겨우 원영의 경지인 나는 천계에 가면 뇌를 열어놓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였는데 태백금성이 금오관을 턱 하니 내놓는다. 나는 앞뒤 재지 않고 금오관을 얻어낼 생각만 했고, 태백금성의 호승심을 건드려서 내기를 성사시켰다.
물론, 내가 잘했다기보다는 태백금성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태백금성은 합죽이가 되었다. 답이 하나라면 괜찮은데, 내가 낸 문제는 답이 너무 많다. 그중에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답을 정확히 끄집어내야 한다. 벙어리 속은 낳은 어미도 모르고, 금오관 쓴 이 손대성 속은 태백금성도 알지 못한다.
보통 천계에 등극할 정도의 존재라면 자신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리를 문제로 낸다. 나처럼 이런 수준 낮은 문제를 내는 자는 지금까지 없었을 거다.
"졌습니다. 답을 알려주시죠."
33천의 남천문이 가까워져 오자 태백금성은 끝내 항복했다. 확신이 없는 답을 답이라고 억지로 뱉어내면 격에 흠이 간다. 신선은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다. 그저 웬만한 행동은 모두 책임질 능력이 있을 뿐이다.
"틀리게 계산해서 그렇습니다."
지자천려 필유일실. 똑똑한 자가 천 가지를 생각하면 하나 정도는 놓치기 마련이다. 이를 줄여서 천려일실이라고도 하는데, 반대말로 우자천려 필유일득이라는 말이 있다. 우둔한 자가 천 가지 생각을 하면 하나 얻어걸리는 게 있다는 뜻이다.
태백금성은 일실했고 나는 일득했다. 천에 천을 곱해서 하나 나오는 확률,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내가 태백금성을 이겨버린 셈이다.
"축하합니다. 계약이 당신 편을 들어주는군요."
당연하지. 계약은 상대적 약자인 내게 조금 후했다. 내가 손오공이었다면 태백금성이 이긴 거로 판결해줬을지도 모른다.
후후. 운 지랄 맞게 좋은 놈.
남천문은 넓이가 천 미터가 넘고 높이는 팔백 미터 정도다.
남천문을 지키는 증장천왕이 40명의 장수와 5천 명의 천군을 데리고 마중 나왔다. 나를 가늠하던 증장천왕과 그 수하들이 대놓고 비웃는다. 천계 사람들이 솔직한 건 알지만, 필요 이상으로 솔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영 다음에 출규, 분신, 합체. 그다음 경지가 동허와 대승이 있다. 대승에 이른 수련자가 도겁을 세 번 겪은 후에야 지선이 된다. 토지신처럼 명확한 직책이 있으면 지선이라 부르고, 직책이 없으면 산선(散仙)이라 부른다.
이들이 천계의 부름을 받아 천궁에 등극하면 천선(天仙)이 된다.
수하 장수들이나 천군은 천계에서 태어난 자들이다. 타고나기를 천선으로 태어났기에 힘은 보잘것없을 수 있다. 그러나 천궁의 사천문 중 하나인 남천문을 지키는 정예라는 자부심에, 원영 따위 경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거다.
나는 겸손한 미소를 지은 채 증장천왕을 열심히 욕했다. 금오관을 믿고 속으로만. 눈치 보고 아부해야 하는 인간과 달리, 신선들은 서로 체면을 챙겨주지만 할 말은 다 한다. 저 멍청한 증장천왕은 내가 속으로 자신의 가족까지 싸잡아 욕하고 있는 줄 꿈에도 모를 거다.
40명의 진천장군이 낑낑거리며 문을 열었다. 높이 8백 미터에 넓이 5백 미터의 커다란 문을 여느라 모두 이를 악물고 있다. 그냥 쪽문 하나 달아서 쉽게 출입하게 할 것이지. 개폼 잡느라 몸이 고생하는구나.
양쪽 문이 다 열리고 나서야 태백금성이 앞장섰다. 남천문을 통과하자 천궁이라는 새로운 공간에 도착했다.
너무 대단하다.
기둥마다 용이나 봉황 그리고 기린이나 현무가 새겨졌다.
용은 비늘이 전부 백금으로 되어 있고 수염은 잡티 하나 없는 붉은 마노로 빚었다. 검은 진주를 박아 만든 눈알이 뒤룩거려서 마치 살아있는 용이 기둥을 감고 있는 듯하다.
봉황은 내가 봐서 아는데, 수탉보다 몸매가 균형적이고 깃털이 더 화려한 걸 빼면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런데 기둥에 새겨진 봉황은 내가 본 봉황보다 훨씬 왕 다웠다. 깃털은 푸른빛이 짙은 옥으로 되어 있고, 검붉은 수은으로 봉린화를 표현했다.
현무는 뱀의 몸에 거북 등딱지를 달아놓은 형상인데, 꼬리에도 머리가 달렸다. 등딱지는 검은 바위로 빚었고 몸은 물결무늬가 아름다운 비취로 만들었다.
기린은 용이 네발짐승으로 변한 것 같은 모습인데, 꼬리가 짐승의 꼬리다. 소꼬리 비슷한데 확신은 어렵다. 투명한 홍옥으로 빚은 기린인데, 빨간 진주를 뱃속에 품었다. 아마 봉린화가 아닐까 짐작한다.
태양과 달은 보이지 않는데 구석구석 빛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천궁은 33궁과 72전으로 구성되었다.
"전과 궁은 무슨 차이입니까?"
"전은 사무를 보는 곳이고, 궁은 휴식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궁은 아파트 같은 곳, 전은 사무용 건물 같은 곳. 그런데 신선도 휴식할 필요 있나? 나도 화과산에서는 휴식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데.
"쉽게 생각하면, 천궁이라는 영지에 거처가 105개 있는 겁니다."
화과산에는 수렴동밖에 없고, 봉황령에는 봉황산밖에 없어서 미처 생각 못 했다.
"옥황상제는 어떤 분입니까?"
"옥황상제께서는 1750겁을 견뎌냈습니다."
신선의 1겁은 12만9천6백 년이다. 태상노군은 겨우 88번 환생했는데, 옥황상제는 1750번이나 환생했다. 실패한 적이 없다고 하니 천계에 옥황상제를 제외하고도 1750명의 옥황상제 환생체가 있는 거다.
이러니 옥황상제 자리가 든든할 수밖에.
"그럼 옥황상제는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1겁씩 견뎌낸 게 아니라, 수백 겁을 동시에 견딘 겁니다. 동시에 수백 인간으로 환생했죠."
손오공은 옥황상제가 자신보다 배분이 낮다고 했었다. 태백금성의 말이랑 모순되어 어리둥절했는데, 알고 보니 동시에 여럿으로 환생한 거였다. 하나만 실패해도 천계에서 쫓겨날 수 있었는데 다 버텨낸 걸 보면, 옥황상제도 대단한 존재인 것 같다.
천궁을 천천히 걸으며 태양궁이랑 태백궁이랑 스쳐 지나갔다. 양식이 비슷한 궁전들이고 기둥들도 똑같아서 지루해질 줄 알았는데, 기둥 하나만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다. 같은 기둥도 각도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드디어 옥황상제가 문무백관을 데리고 일을 본다는 영소전(靈宵殿)에 도착했다. 커다란 궁전에 들어서자 옥황상제의 넓적한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잘 다듬은 수염이 밑으로 힘있게 뻗어서 온화한 인상에 강단도 보인다.
옥황상제와 가깝게 선 자 중에서 탁탑천왕과 나타가 내 눈을 끌었다. 탁탑천왕의 손에 든 탑이 하나 있는데, 저 탑도 여의라고 한다. 여의금고봉이랑 동급의 법보로 원시천존이 탁탑천왕에게 준 거라고 들었다.
"선 선생, 어서 옥황상제께 인사 올리시죠."
"화과산의 왕 수렴동의 주인 손대성입니다."
문무백관이 술렁인다. 나는 손오공의 분부대로 고개조차 숙이지 않았다. 한번 실수로 고개를 숙이면 천계의 권위에 눌려 힘을 다 사용하기 힘들다고 당부받았다.
그 외에도 주의해야 할 점들이 꽤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거다.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말 것. 내가 누군가에게 조아리면 속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손오공의 체면도 바닥에 떨어진다.
"폐하. 저런 예도 모르는 자를 천계에 들이면 망신살이 끼칠까 걱정입니다."
천계의 특징이다. 할 말은 대놓고 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지. 나도 대놓고 너를 욕하마. 속으로 대놓고.
"하계에서 야인으로 살았으니 그럴 수도 있지. 문곡성에게 일러 비어있는 관직을 정리해서 올리라 하라."
옥황상제의 소매에서 새 한 마리가 나와서 날아갔다. 잠시 후 작은 두루마리를 물고 쪼르르 돌아왔다. 새의 부리를 떠난 두루마리가 갑자기 커졌다.
"하계 요선(妖仙) 손대성의 선업 점수는 얼마인가?"
"300점입니다."
신선들이 대놓고 비웃는다. 나는 비웃는 자들보다 무표정인 자들을 주시했다. 무표정을 유지하는 자는 탁탑천왕을 비롯해 다섯밖에 없었다.
옥황상제는 두루마리 가장 밑을 확인했다.
"점수가 필요 없는 관직 중 비어있는 자리가 필마온밖에 없구나. 손대성을 필마온으로 임명한다."
"감사합니다."
미운털 단단히 박혔다. 나를 대놓고 째려보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태백금성이 황급히 나를 데리고 영소전을 떠났다. 태백금성의 뒤를 따라서 북천문으로 나가 한참이나 걸으니 내 직장이 나타났다.
하늘말은 날개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땅에서 본 말들보다 덩치 좀 더 크고 잘생겼다뿐이지 특별히 다를 게 없었다.
내 수하들이 두 줄로 늘어서서 나를 환영했다. 그러나 이들도 마뜩잖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비록 최하위라고 하지만, 필마온은 품계가 있는 관직이다. 누군가는 싫은 일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자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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