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말입니다
"사부님 말이 맞았어."
여래불의 말투가 갑자기 변했다.
"진리요 법칙이요 경지요 지랄해도, 결국 힘으로 판가름 나는 거야."
여래불의 5미터에 근접하던 몸이 줄어들었다. 5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덩치던 여래불이 키가 2미터 정도의 비쩍 골은 모습으로 변했다. 둥글둥글하던 얼굴도 길쭉하게 변했는데, 오관 구조와 생김은 여래불과 무척 흡사하다.
"다시 소개하지. 나는 전 여래불과 흡정고(吸靜蠱) 사이에서 태어난 탐식불(貪食佛)이다."
관음보살이나 문수보살 비롯해 놀라지 않는 부처가 몇 없었다. 그리고 사오정과 삼장도 놀라지 않았다.
사오정. 생각 밖으로 거물인가?
중립의 부처들이 모두 탐식불 쪽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삼장 편에 섰던 부처들도 다수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삼장은 믿는 게 있는지 눈썹 한 가닥 흔들리지 않았다.
"내 어머니는 요괴야. 고 중에서도 왕족 취급을 받는 흡정고였지. 수련을 시작하지 않은 여래를 속여 혼인한 후 정을 흡수했어. 정이 바로 천궁에서 덕이라 부르는 제3의 신비한 기운이지."
"여래는 뒤늦게 진실을 알아차렸고, 연등고불에게서 수련법을 배워 수련을 시작했지. 그리고 몰래 빼앗긴 기운이 다시 뽑아갔어. 흡정고인 내 어머니가 눈치도 못 채게 말이야."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가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어. 아주 짧은 시간에 여래는 어마어마하게 강해졌어.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정의 기운을 태아였던 내게 몰아넣은 후 나를 낳아버렸어."
뭔 일이지? 왜 나쁜 놈인 탐식불 쪽으로 넘어가는 부처가 점점 많아지는 거야?
"정 혹은 덕으로 불리는 기운은 흡수하는 데 두 가지 조건이 있어. 기운을 품은 자가 순결을 지켜야 하고, 성인이 되어야 한다. 저기 저 어벙한 애송이 제천대성은 자신이 도망 잘 다녔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게 다 옥황상제가 성인 되기를 기다린 건 줄은 몰랐겠지."
별로 화가 안 난다. 그 시간을 무척 알차게 보냈으니까. 십살총도 얻었고 구엽영지초도 먹었다. 덕분에 매우 똑똑해지기도 했으니 전혀 화가 안 난다. 제기랄.
"여래는 내 기억을 봉인한 후 첫 제자로 받아들였다. 어머니의 특징을 더 많이 물려받은 나는 성장이 무척 느렸다. 고는 성장기가 끝나면 오래 살지 못하는 특이 종이야. 기다림에 지쳤는지 여래는 아미타불에게 기운을 넘기라고 했지. 아미타불은 여래의 요구를 거절하고 기운을 연등고불에게 넘긴 후 환생하여 관음보살이 되었고."
대충 5:5 정도로 세력이 나뉘었다. 그런데 삼장도 관음도 모두 무표정으로 탐식불의 말을 듣기만 했다.
"긴 세월 나는 기억을 봉인 당한 채 여래를 사부로 여기면서 성심성의껏 우러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여래가 마각을 드러냈지."
"여래는 성인이 된 내 심장을 뽑아 삼켰다. 나는 그때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심장을 버리고 육신을 보전할 것인지, 아니면 육신을 버리고 심장을 선택할 것인지. 심장을 버리면 나는 계속 살아갈 수 있고, 육신을 버리고 심장을 선택하면 여래와 싸워야 했다."
그러니까 육신을 선택하면 심장 없이 살 수 있고, 심장을 선택하면 여래를 이겨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나라면 당연히 육신을 선택한다. 사는 게 중요하니까.
"그때 하필이면 기억의 봉인이 깨졌다. 나는 내 정체를 깨달았다. 나는 탐식고(貪食蠱), 다른 자의 몸에 기생해서 평생 자신으로 살 수 없는 존재. 그게 내 운명이었다."
기생충처럼 자력으로 살 수 없다는 뜻이겠지?
"선택의 여지가 사라졌다. 육신을 선택해봤자 나는 오래 살지 못한다. 성인이 된 이상 다른 자로 살아야 하니까. 나는 계속 여래의 첫 제자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운명에 순응하여 나는 심장을 선택했다. 그리고 운명에 항거하기로 했다."
"내가 여래가 되려 했다. 원래는 여래의 몸에 기생하면서 여래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어야 했지만, 나는 그냥 내가 여래를 대체하기로 했다. 그리고 하늘이 도왔지."
이동이 대충 끝났다. 5.5 대 4.5 정도로 삼장 진영이 열세로 보인다. 물론 머릿수로 밀린다는 거지, 부처 개개인의 실력을 모르니 전투력까지 판단할 수 없다.
"발정 난 비파 전갈이 여래를 덮쳤고, 거부하는 여래를 도마독으로 찔렀다. 고는 모든 독물의 정점. 도마독은 여래를 약하게 만들고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만약 그때 내 심장을 흡수하려 하지 않았다면, 비파 전갈 따위에게 여래가 찔리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도마독 따위에 당해 약해지지도 않았을 거고. 이게 바로 인과응보 아닐까?"
연등고불은 뭐 하는 거지? 서천이 지금 둘로 나뉘어 대판 싸울 기세인데 여전히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나는 비파 전갈을 가두고 공격했다. 비파 전갈은 계속 꼬리로 나를 찔렀고. 여래는 점점 약해졌고 나는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결국. 그 대단한 여래의 몸을 내가 차지했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뇌음사의 등잔이 꺼지면서 비파 전갈이 도망쳤다. 원인을 알아보니 연등고불의 등잔 기름을 어떤 족제비가 꼬리로 훔쳤다고 하더군. 게다가 그 족제비가 도망쳤다는 거야. 참 기가 찰 노릇이지. 족제비 따위가 등잔 기름을 훔친 것부터 웃기는데, 족제비를 놓치고 혼란을 틈타 비파 전갈도 도망쳤다? 누군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하지. 그래서 나는 천궁의 세력과 손잡기로 했다. 그렇게 서유기의 이야기가 시작되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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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생각하는 거로 손오공과 대화할 수 없다. 굵은 인연의 실이 나와 손오공 사이에 생겼지만, 인연의 실이 유선전화 구리선도 아니고.
수만 명의 부처가 있는데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낮은 소리로 대화하기도 껄끄럽다. 무표정한 손오공 얼굴에서 현재 심기가 어떤지 추측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탐식고야, 이대로 싸우면 누가 이길까?"
삼장이 높낮이 변화가 없는 말투로 질문했다.
"나 지금 여래불이야. 기생체가 이룰 수 있는 궁극, 숙주와 하나가 되었어. 내가 여래불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자가 있으면 나서 봐."
"제가 부정하겠습니다."
사오정이 나선다. 외양이 멋있게 변해서 그런지, 자세부터 표정까지 여유가 느껴지지 않는 부분이 없다.
"금신나한. 어떻게 부정할 거야? 외양이야 이렇게 변했다지만, 알맹이는 여래불이 분명한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여래불 몸을 차지한 걸 금선자는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탐식불이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여래불의 일을 알아내려면 법력이 얼마나 강해야 하고 포인트를 얼마나 많이 소모해야 할지 상상조차 어렵다.
"여래불은 일을 벌이기 전에 자초지종을 금선자에게 알려줬습니다."
"둘 사이 믿음이 그렇게 두터웠던가? 자신의 치부를 알려줄 정도로?"
"당신은 흡정고의 아들입니다. 맞습니까?"
"그럼."
"당신은 여래불의 아들입니다. 맞습니까?"
탐식불이 입을 열지 않았다. 제길. 너도 아버지를 현금인출기 정도로 여기는 놈이었어?
"당신 생각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래불은 당신을 자식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고의 특성을 갖춘 당신이 성인이 되면 오래 살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신 심장을 뽑아서 그 안에 든 고의 기운을 모조리 없애려 했습니다. 그래서 금선자에게 밖에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결계를 쳐달라고 했죠. 안타까운 점은, 비파 전갈이 처음부터 결계 안에서 살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삼장 이 음흉한 새끼. 나한테는 여래가 자기 사형 심장 뽑아냈다고 거짓말했지. 설마 저놈 날 의심한 건가? 내가 여래랑 모종의 컨넥션이 있을까 봐 속인 거였어? 아니면 자신마저 속인다는 구라쟁이 최고 경지인가?
"그래서 그때 나한테 대사형이 어디 갔냐고 물었던 거였어?"
"그래. 사부님은 내게 네가 자기 친자식이라는 것과 심장의 기운을 제거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만 알려줬지, 네놈이 탐식고인 걸 비밀로 했다. 네가 내 생식기의 기운을 탐하지만 않았다면 영원히 의심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내가 소탐대실했구나. 초월열반에 들어 진정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려 했던 것뿐인데. 그나저나, 이 얘기는 왜 꺼낸 거냐?"
"네가 실력으로 그 몸을 차지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려고 그랬어. 너야 사용할 수 있는 막대한 법력에 신났겠지. 손오공을 손바닥에 가두고 속이기까지 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하지만, 지금 네가 사용하는 힘이 사부님의 절반이라도 되는 것 같아?"
탐식불이 피식 웃었다. 신선들과 달리 늘 엄숙한 부처들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표정이다.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힘을 막아낼 사람 있어? 저기 손오공은 내기에서 졌기에 당분간 내게 적대할 수 없어. 내가 꼬리를 태상노군에게 먼저 양보한 대가로 얻어낸 거지. 그때는 힘에서 밀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지금 보면 정말 다행이야."
태상노군이 꼬리를 먼저 가져갔고 여래불은 일정 기간 손오공이 적대하지 않는 조건을 걸었군. 그래서 손오공이 얌전했던 건가?
"당연히 있습니다. 제 의뢰인을 소개해 드리죠."
아미타불이 만든 서천은 모든 부처의 영지다. 뇌음사는 모든 부처의 거처고. 구체적인 이름이 아니라 소유주에 부처라고 직업을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천과 뇌음사는 천궁과 달리 굳이 문을 지키게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출입이 자유롭다.
"대부분 처음 뵙는 분들이군요. 옥황상제 환생체 중 하나인 황제라고 합니다. 중요한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사적인 일부터 해결할까 합니다."
말을 마친 황제가 내게 다가왔다. 몸을 편하게 늘어뜨리고 황제의 힘을 가늠하고 진체를 탐색했다. 몸에 가두고 있던 환생체를 다 내보내서인지, 감옥에서 볼 때보다 훨씬 강해 보인다.
"예전에 있었던 일을 사과하는 의미로, 이걸 드리겠습니다. 오늘 일에 간섭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음양경입니다."
음양경(陰陽鏡)은 디자인이 무척 멋스러운 안경이다. 게다가 안경알 색이 계속 변화했다.
"혜광등과 함께 사용하면 무척 도움이 될 겁니다."
"우린 천궁에 가자. 네 물건부터 되찾아야지."
손오공의 딴딴한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생긴 건 비쩍 마른 야생 원숭이인데, 쉽게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가 철철 넘친다. 나는 음양경을 받아들고 손오공과 함께 뇌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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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문. 처음 왔을 때 엄청나게 비웃음을 당했지. 그러나 이번엔 다르다. 입을 열기도 전에 증장천왕이 황급히 남천문을 열었다. 내가 왔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열리는 것 같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어느새 태백금성이 나타나서 길 안내를 자처했다.
"태상노군도 서천에 갔는가?"
"그것 때문에 오셨습니까?"
"나도 마냥 생각 없이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형님. 저도 좀 알아듣게 풀어서 말씀해주시죠."
"서천이 비슷한 세력으로 나뉘어서 싸움이 붙었어. 그런데 황제가 삼장 편에 섰지. 그럼 탐식불이 질 게 뻔하지? 삼장이 이기면 황제랑 같은 편 먹을 거잖아. 천궁에 반항하는 세력이 더 강해지는 거지."
서천이 천궁과 완전히 등질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용궁과 마교 심지어 지선들까지 들고 일어나면 천궁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탐식불이 태상노군이랑 동맹 비슷한 관계야. 당연히 태상노군도 탐식불 지원하러 내려갔지. 자기 세력 이끌고."
여전히 모르겠다. 차라리 남아서 계속 구경이라도 하면 훨씬 재밌을 것 같은데.
"천궁에는 옥황상제 세력만 남았다. 옥황상제가 전투 도중에 태상노군 세력을 뿌리 뽑고 천궁을 다 먹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태상노군이 황제랑 서천이랑 손잡고 천궁을 공격하지 않을까요?"
"태상노군과 황제는 손잡을 수 없다. 옥황상제로서는 황제랑 태상노군이 하계에서 싸우는 게 오히려 훨씬 편한 상황이 되지. 거기에 마교까지 끼어들고 서천마저 얽히면 더 좋고."
"그럼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네 생식기 핑계로 천궁 왔잖아. 밑에 싸움 끝날 때까지 여기 눌러앉아서 옥황상제가 허튼짓 못 하게 해야지."
"몰래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 다 들을 텐데."
"말 안 해도 다 알아. 혹시나 하는 마음도 품지 못하게 확실히 말해주는 게 나아."
힘 있으니 음모도 광명정대하게 꾸미고, 그걸 상대에게 알려줄 수도 있구나. 난 언제쯤 손오공처럼 될 수 있을까?
영소전은 세 번째다. 처음 올라왔을 때 한 번, 선업 만 포인트 받을 때 한 번, 그리고 오늘. 전에 왔을 때와 달리 신선들이 공손히 인사한다. 물론, 나 말고 손오공에게.
"옥황상제가 남색 취미가 있을 줄 몰랐어. 빨리 내 동생 생식기 돌려줘."
"옜다."
옥황상제가 붉은 나무함을 던졌다. 손으로 받았는데 손아귀가 은은하게 저리다. 그냥 던진 게 아니라 뭔가 수작을 부린 것 같다. 받아서 뚜껑을 열어보니, 반가운 물건이 안에 고이 들어있었다.
'고놈, 참 잘생겼네.'
기운은 다 빨렸지만, 갓 잘라냈을 때처럼 싱싱하고 색도 조화롭다. 물건을 잡고 바지춤에 손을 넣었다. 언제 잘렸냐시피 바로 붙었다. 나 이젠 완전해졌어.
"오랜만인데 연회나 열어. 술 좀 얻어먹자."
"태백금성, 그대가 알아서 하시게."
옥황상제가 귀찮다는 듯 태백금성에게 손오공 접대를 맡겼다. 영소전을 나가 태백금성의 거처에서 술판을 벌였다. 향기롭지 않은 술이 없고 맛없는 안주가 없다. 게다가 하나같이 쉽게 보기 힘든 음식 재료들이어서 쉼 없이 먹는 데 집중했다.
"서천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결과야 뻔하지. 그저 이긴 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궁금할 뿐이야."
"원하시면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손오공은 심드렁했지만, 난 다르다. 내 요청에 태백금성이 5D 기술로 서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현장에 직접 있는 것처럼 체험시켜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 차이가 있습니다. 이미 끝난 일들이기에 끼어들고 싶어도 이미 늦었죠."
부처만 수만 명이고, 황제가 옥황상제 환생체 500 정도 데리고 삼장을 지원했다. 태상노군 역시 40여 명 환생체를 데리고 탐식불을 지원했다.
"태상노군은 전력을 다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전력입니다. 태상노군 환생체는 대부분 유일 속성이라 여러 세상에 관여합니다. 40이나 모인 것도 무척 대단한 셈이죠."
"왜 이 세상에만 신선이 이렇게 많습니까?"
"신선과 요괴가 잘 나오는 세상이 몇 있습니다. 그중에서 이곳이 가장 크고 인구도 많습니다. 먹을 게 풍부하거든요. 그래서 천궁 존재들도 불가피하게 환생할 때 이 세상을 택합니다."
언제 시작하나 기다리는데, 정지 화면도 아니고 모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한다.
"이미 싸움은 시작했습니다. 법력 다툼입니다. 마음을 잘 합친 쪽이 이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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