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 강화
[제가 주제넘은 조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나도 주제가 높은 놈이 아니니까, 마음껏 넘어도 돼."
[제가 보기엔 여럿이 서로 견제하느라 재주들이 봉인 당한 것 같습니다.]
"알아. 안정화가 끝나야 가진 재주가 모두 모습을 드러낼 거야."
[자세히 살피면 편이 셋으로 갈립니다. 금과 목이 이상하게 편을 먹었고 토와 수도 신기하게 같은 편이 되었습니다. 오로지 화만 혼자입니다.]
금과 목은 태상노군 거고, 토와 수는 황제 것이다. 오해의 소지 없이 명확히 하자면 옥황상제 법보다.
태상노군과 옥황상제 둘 다 뒤로 호박씨를 깠다. 동족 혐오의 법칙에 따라 둘은 서로 싫어하고, 둘의 법보가 서먹서먹한 건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금과 목은 토와 수보다 한 단계 높은 법보다. 오함마는 화염산 덕분에 이들과 비슷한 힘을 보유했지만, 그냥 가진 힘과 자유자재로 다루는 힘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게다가 격의 차이는 더 크고.
"방법이 있다는 말이야?"
[선업 좀.]
"얼마?"
[계약이 알아서 책정하지 않겠습니까.]
"그간 쌓인 정도 있는데, 최저치로 해줄 거지? 그나저나, 꽤 오랜 시간 법보를 흡수하지 않았더니 갈증이 심하구나. 법보를 흡수할 때 얻는 쾌락이 간절하게 그리워."
[당연히 최저치로 해드리려 했습니다.]
역시, 오행판은 나랑 마음이 잘 맞아.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듣고 어느 방법이 더 쉬운지 판단하십시오.]
헐, 두 가지씩이나. 포인트 소모만 무시할 수 있다면, 오행판은 최고의 법보다.
[하나는 무극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강한 기운을 깎고 약한 기운을 살린 후 완벽한 균형을 이루게 합니다. 균형을 이룬 후 조화까지 이루면 태극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대로 시간만 흘러도 결국 무극이 될 겁니다.]
나는 음양과 오행을 벗어나서 무극에 이르렀다. 오행판의 제안은, 음양과 오행을 통해 무극에 이르라는 뜻이다. 나는 근본 없는 무극이고, 오행인은 근본 있는 무극이 된다. 이것도 나름 괜찮은 것 같다.
[두 번째는, 한 기운을 밀어서 오행을 기반으로 한 단일 속성으로 가는 겁니다.]
뭐라고? 오행에 기반하는데 어떻게 단일 속성이 돼?
[태극진인이 다섯 기운을 조정한 이후, 위력이 안정적으로 변했죠?]
"그래. 예전엔 조금 들쑥날쑥한 경향이 있었는데, 지금은 안정적으로 강해."
[다섯 기운을 안정시켜 최대 공격력을 줄이고 최소 공격력을 늘렸을 뿐입니다. 많이 때릴수록 지금 오행인의 공격력 합산이 더 많겠지만, 하나씩 따졌을 때 최고치는 예전 오행인 몫일 겁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일격을 포기한 대신, 안정적으로 강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뜻이구나.
[불의 기운을 키워서 단일 속성으로 하면 일원(一元)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끄럽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질문했다.
"무극이랑 태극의 구분은 알겠는데, 일원은 또 뭐야?"
[태극은 음양태극과 삼태극이 있습니다. 삼태극의 세 기운이 하나로 합치면 무극이 되죠. 삼태극은 세 기운을 보유한 거고 무극은 세 기운을 다스린 겁니다. 그리고 음양태극이 균형과 조화를 함께 이룬 상태를 일원이라고 합니다. 경지는 무극보다 조금 더 높고 위력은 비교할 수 없게 강합니다. 다만 무극은 태초의 혼돈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일원은 거기에서 끝입니다.]
"혼돈은 위력이 어마어마하게 강한가?"
[혼돈이 되면 통제할 수 없습니다. 법보 입장에서는 일원이 최고의 선택이죠.]
"그런데 어느 기운을 키워야 할까?"
[아까 불의 기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장 약한 기운이고, 통제력도 형편없어. 그걸 어떻게 키우냐고."
[촛불이 있잖습니까. 게다가 녹이는 특성이 강해 다섯 기운을 하나로 합칠 수 있습니다. 음양을 뛰어넘어 바로 일원에 도달할 가능성이 무척 큽니다.]
"그럼 촛불은 오행인과 하나가 되는 거야? 아니면 오행인 따로 촛불 따로야?"
[하나가 됩니다.]
"촛불이랑 오행인에게 물어봐야겠다. 어느 길을 원하는지."
출불과 오행인이 서로 대화하게 했다. 이상하게 오행인은 나랑 느낌만 오가는데 촛불과는 상세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당신은 참 여러모로 신기한 존재입니다. 완전히 귀속한 법보에 의견을 묻는다는 건 저로서도 금시초문입니다.]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자라서? 판단과 결단이 부족해서? 마음이 약해서?
나도 모르겠다. 그냥 '당사자'의 의견을 묻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뭐, 그냥 이런 사람이라 생각해. 골치 아프게 분석하지 말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덕분에 상위 법보로 진화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습니다.]
후후. 역시 가르치는 재주는 손오공을 압살하는구나.
내가 자꾸 손오공을 의식하는 건, 가장 닮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롤모델로 삼기엔 너무 거대하지만, 지금까지 봐온 강자 중에서 내 성격이랑 싱크로가 가장 높은 존재가 손오공이다.
"뭔데? 난 별말 안 한 것 같은데."
[저는 지식을 분석해서 지혜를 짜내는 일을 합니다. 주판일 때는 단순 계산만 했었고, 꼼꼼한 주인 덕분에 한 번도 계산에 틀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법보 자격을 얻었고, 우연히 법력을 주입 받아 법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뭐든 정확하게 하려는 습관 같은 게 배어있었습니다.]
오행판보다 주인이 신선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주판은 그저 도구일 뿐인데. 설마, 만 명의 피를 묻히면 마검이 된다는 그 흔한 양판소 설정이 사실이었어? 괜히 설정만 보고 양판소라고 까는 짓은 삼가야겠다.
[저는 불확실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진실에 가까운 결론만 내리는 데 집착했습니다. 방금 얘기를 듣고, 불확실성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추산술(推算術)로 미래를 예측하면, 선업의 소모가 많아도 변화까지 감지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재주를 갖춘 주제에 자기 눈썹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가벼운 말에 담긴 진리가 제게 거울이 되어주었습니다.]
얘 학원 꾸리고 웅변 가르치면 대박 나겠다. 말 왜 이렇게 잘해?
"수련 다 끝났어?"
[그렇습니다. 당분간 수련을 소화해야 합니다.]
"그럼 출발할까?"
[결론을 내리고 출발해야 합니다. 무극으로 향하는 길은 이곳이 시작점입니다. 이곳을 파괴하면 법보는 새로운 오행의 방을 만들려 할 겁니다. 그리고 오행인은 저와 달리 오행의 기운을 강하게 품었습니다. 환혼천공 법보가 오행인의 오행이 균형을 넘어 조화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줄 겁니다.]
"너 환혼천공 진명도 알아낼 수 있어?"
[선업이 조 단위로 뜁니다.]
못 들은 거로 해줘.
"일원은?"
[사상의 방에서 불의 기운을 제외한 네 기운으로 균형을 이룹니다. 다음 양의의 방에서 불과 네 기운을 똑같이 다스립니다. 다음 태극의 방에 가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일원이 되면 됩니다.]
"오행의 기운을 둘로 나눠 음양으로 구분한 후 균형을 이루고 조화해야 한다는 말이지?"
[맞습니다. 사상의 방에서 분리, 양의의 방에서 균형, 태극의 방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어차피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며? 여기서 천천히 기다릴까? 그러다 경지가 안정되면 다시 수련하면 되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에 경지의 수습도 느립니다. 저는 지금 경지가 오른 게 아닙니다. 정상적인 시간이 흐르는 곳에 가서 일정 기간 지나야 비로소 경지가 오릅니다.]
시간과 공간. 이거 고등 물리학에서 다루는 거 아냐? 아직 중2를 벗어나지 못한 내겐 너무 가혹한 처사다. 이래서 내가 그토록 손오공처럼 되고 싶은 거야. 손오공에게 물리학이란 여의금고봉으로 상대의 형태를 변형시키는 것밖에 없으니까.
오행인과 촛불의 대화에 집중했다. 오행인으로부터 여러 목소리가 들렸다. 우마왕이 준 무기 설계도가 아니었으면 오행인이 태어나지도 못했을 거다. 서로 사이가 안 좋고 인연도 없는 법보들을 하나로 엮다니.
태백금성은 성공하는 미래를 알고 나를 충동질한 건가? 오함마가 무기가 될 운명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실패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다만 오행인처럼 어마어마한 물건이 나올 건 태백금성도 몰랐겠지. 미리 알았다고 하면 난 오늘부터 밤잠을 못 잘 것 같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정해진 운명에 놀아난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주인께서는 무극과 일원 중에 어느 쪽이 더 끌립니까?]
"그건 왜? 아직 나도 잘 모르겠는데?"
[주인인 당신의 마음이 불확실하니 저 둘의 대화도 길어지는 겁니다. 저들은 자아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귀속한 주인을 위하는 마음이 큽니다. 자기들끼리는 사이가 나쁠지 몰라도, 주인을 위한 일에는 마음을 합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정해지지 않아서 저들도 결론을 못 내린다는 뜻이지?"
[어느 길을 선택하든 이후에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위력도 강해지고 법보의 재주도 많아지고 하나의 자아로 합쳐져서 갈팡질팡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구령은 머리 아홉이어서 고생인데, 오행인도 자아가 다섯이어서 고생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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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은 이차원의 기초입니다. 동서남북, 상하좌우, 사계절, 태음과 소음 그리고 태양과 소양. 둘로 나누면 확실히 구분하기 모호하지만, 넷으로 나누면 구분이 쉽습니다. 동서만 있다면 북쪽을 설명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남북까지 있으니 동북, 서남 이런 방위도 나오는 거죠.]
그럼 삼차원은 여덟으로 나뉘고 사차원은 열여섯으로 나뉘는 건가? 아니지, 사차원은 다른 방식일 수도 있겠다. 삼차원까지는 상상이 되는데, 사차원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그럼 촛불을 꺼내십시오. 오행인의 불 기운을 배제하고 새로운 오행을 이룬 후, 촛불을 다시 빼면 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
일원을 선택했다. 고작 법보가 혼돈이 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없는 게 없는 무언가가 혼돈이다. 긴고아처럼 세상을 담은 법보가 있지만, 혼돈에 이르려면 세상에 없는 것마저 담아야 한다.
그러니 경지도 무극보다 더 쳐주고 위력도 훨씬 강한 일원을 선택했다.
일반적으로 오행에서 토가 중심이다. 그러나 내 오행은 불이 중심에 섰다. 촛불이 있어야 할 남쪽 자리는 토가 내려갔다.
평범한 오행의 기운이라면 균형조차 이루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촛불을 포함한 다섯 기운 모두 특별하다. 어렵게 균형을 이룬 후 촛불이 다시 내 심장으로 돌아왔다.
사상의 방이 네 기운의 균형을 도왔다. 네 기운은 상생과 상극을 버리고 힘의 크기만으로 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이뤄냈다. 넷의 자아가 하나로 연결되어 어느 기운이라도 출렁이면 남은 세 기운도 바로 상응한 변화를 보였다.
[삼재의 방에도 들러야 합니다.]
"왜?"
지금 이 상태가 무너지면 오행인은 태극진인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다. 갈 길이 바쁜데 삼재의 방에는 왜 굳이 들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천지인. 뭔가 떠오르는 게 없습니까?]
"가자."
공간을 찢고 안에 들어갔다. 천과 지는 양과 음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세 번째 기운을 사람 인(人)으로 지었을까?
[혼돈에서 질서가 생기며 만물이 생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만큼은 그 과정에서 생긴 게 아닙니다. 질서의 공간을 다스리는 최고 관리자인 신을 닮으려는 노력의 산물이죠. 물론 인간 외에도 신을 닮은 존재가 많습니다. 주인의 기준으로 생물도 있고 무생물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 수많은 세상에 번성했습니다.]
"이유가 있는 거야?"
[결핍. 신이 사라진 세상이 신을 원했기 때문이죠.]
용이 셋으로 갈라진 후 알지는 신룡 부부와 다른 세상에 떨어졌다. 두 세상이 알지를 대체할 수 있는 후보와 신룡이 될 수 있는 후보를 만들어낸 거랑 같은 의미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있는 거야?"
[신은 신입니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신이 인간이 될 수 있지만요.]
제길. 이런 철학적인 얘기는 참 싫다. 그런데 이해 못 하고 듣기만 했는데도 내가 강해지는 게 체감으로 느껴지니, 아무리 싫어도 귓구멍을 막을 수 없다.
"강한 인간이 있으면 신이 강신하거나 몸을 빼앗을 수도 있겠네?"
[신이 강신할 정도로 강한 자라면, 신의 강신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권리와 의무는 늘 공평한 법이죠. 물론, 인간이 만든 사회는 권리와 의무가 대칭될 수 없습니다. 많은 요소가 부족하여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거든요.]
"그럼 신은 세 번째 기운인 건가? 그 덕인지 정인지 하는 기운이 뭉친 건가?"
[아닙니다. 신이 죽으면서 다양한 기운이 세상으로 흩어졌고, 세상이 조각나면서 수많은 세상으로 나뉘었습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세상으로 나뉘면서, 세상마다 부족한 기운이 생겼습니다. 그 부족한 기운은 세상마다 따로 만들어냈습니다.]
"그 기운은 불필요한 기운이라는 뜻이겠구나?"
[그렇습니다. 그런 기운들이 신이 돌아오는 걸 방해합니다.]
"칠공과 구규가 닫힌다는 게, 신이 돌아오는 걸 방해하는 가장 큰 기운들을 일컫는 말인가?"
[아무 의견도 드릴 수 없습니다.]
알지와 신룡 부부가 두 세상에 나뉘니, 세상이 알아서 알지를 대체할 존재와 신룡이 될 가능성을 품은 존재를 만들어냈다. 신이 죽으니 최고 관리자를 그리워한 세상이 인간을 비롯해 신의 가능성을 품은 존재를 무수히 만들어냈다.
그러나 세상이 만들어낸 존재가 성장해서 신을 대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자기 세상에서 신 소리를 들을 작자는 있겠으나, 질서의 최고 관리자인 신의 자리는 누가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화를 멈추고 세 기운을 느꼈다. 뭔가 깨달았는데 모르겠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내 언어능력이 부족한지, 깨달음이 희미해서인지 구분할 수 없다.
[혹시 뭘 얻으셨습니까?]
"뭘 얻어야 해?"
[다음 양의의 방에서 주인이 중간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아까 사상의 방에서 촛불이 했던 역할을 해내야 합니다.]
불의 기운을 제외한 네 기운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 그리고 내가 세 번째 기운이 되어 둘을 안정시키고 조절한 후 쏙 빠진다. 내가 빠진 후에 음양이 된 두 기운이 균형을 이루면 다음 태극의 방으로 향하는 거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서 내가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건가? 뭔가 얻은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어."
[말로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얻은 깨달음이 선명한지 아닌지 입니다.]
"어느 정도면 선명한 거야?"
[이게 뭔지 모르지만, 이거구나. 이런 느낌이 들면 선명한 겁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금선들이 대라금선이 되기 위해 육신을 버린다. 불필요한 걸 버리는 거다. 그러나 신도 그렇고 혼돈도 그렇고, 수많은 기운을 갖고 있다.
혼원대라금선이란, 금선이 틀린 방식으로 대라금선이 된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이 아닐까? 버린 걸 다시 주워 담는 게 아닐까?
- 작가의말
서유기 줄거리가 예상보다 더 잘 뽑혔습니다. 거기에 비교되어 뒷부분이 마음에 안 듭니다. 메인 스토리만 살리고 잡다한 것들은 다 버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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