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운
"금룡이 저리되고 양윤이 여의주 먹고 용이 되는 게 정해진 운명이었다고? 내가 안 왔으면 이루어지기 힘든 운명인데?"
기분이 더럽다. 내가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여진 건가 싶기도 하고.
"운명이란 그런 거야. 정해졌지만 고정되지 않은 것. 네가 아니어도 다른 방식으로 이 운명은 완성되었을 거야."
"지금 당장은 위험이 없는 거지? 내가 자리 비워도 상관없지?"
"아직 99년 이상 시간이 남아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양윤이 용이 되면 암컷 행방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나도 빨리 끝내고 선업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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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귀찮아하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해 주세요. 운명이란 건 뭡니까?"
저팔계와 용마는 편복산에서 박쥐랑 함께 수련하라고 남겨두고 혼자 화과산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너무 더러워서 난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운명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야. 세상에 그런 건 없어. 그저 거대한 흐름이 있을 뿐이다."
다행히 꽤 철학적인 문제임에도 손오공은 답을 알고 있었다.
"힘이 강하면 그 흐름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그 흐름을 거스를 수도 있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흐름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면서요?"
"가능성이야 존재하지. 매우 어려울 뿐이다."
"그럼 저는 지금까지 그 흐름에 놀아난 겁니까?"
"그 흐름은 개개인에 상관없이 흐른다. 세상 만물의 영향을 모두 받는 흐름이지. 네가 그 흐름을 거스르거나 벗어나는 건 혼자 힘만 강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 흐름을 바꾸려면 너만 강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수많은 존재와 사물 그리고 법칙을 변화해야 한다."
제 질문이랑 무관한 대답 같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흐름에서 벗어났다. 서유기는 나를 다시 흐름에 발이라도 담그게 하려는 목적이고. 왜냐면 아홉이 되었을 때 내가 또 싫다고 하면 혼원대라금선이 되고 싶어서 안달 난 놈들이 미쳐버릴 거거든."
시발. 진지한 분위기 싹 날아갔다. 나도 울렁거리던 가슴을 조금 진정하고 바닥에 퍼더버렸다. 갑자기 내가 우스워졌다. 뭣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났던 거지?
"엄밀히 따지면, 나에 미치지 못하지만 너도 꽤 대단한 놈이야."
오오. 기분이 좋아지려고 한다. 나 설마 조현증인가?
"내가 처음으로 세상의 운명에 간섭한 건 저승사자에게 끌려갔을 때다. 기억을 다 잊게 만드는 약을 내게 먹이려 하더라고. 그래서 홧김에 그때는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여의금고봉으로 팼어. 그런데 다른 저승의 노파들도 모조리 죽어버렸어."
한 놈을 때려 모든 세상의 존재를 죽인 업적. 하나의 존재를 말살한 일을 두고 업적이라 칭송하는 건 좀 그렇지만, 그 때문에 수많은 세상이 흔들렸다.
"그때 저승 놈들이 알아서 꿇었더라면 며칠 업무가 마비되고 끝났을 수도 있는데, 이놈들이 우르르 몰려와 내 여의금고봉을 빼앗으려 하더라고. 몇백 살밖에 안 된 하계 출신 요괴의 능력이라고 누구도 여기지 않았던 거지. 내 손에 죽은 저승십왕의 숫자는 지금도 헷갈린다. 하도 많이 죽여서."
손오공이 자기 자랑하는데 위로받는 느낌이다. 손오공의 존재는 우러러볼 우상일 뿐 아니라 큰 위안이다. 운명에 항거할 수 있다는, 내가 운명의 꼭두각시가 아니라는 살아있는 증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내하교를 지키는 노파를 죽인 바람에 새로운 법칙이 생겼다. 서로 다른 세상에 살던 존재들이 서로를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아니었으면 여기 이랑신이 다른 세상에 이랑신이 있는지 알 방법조차 없었을 거다. 내가 조각 난 세상들에 연결 고리를 만들었다. 네가 여기로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라고 생각해라. 그전에는 천궁이나 저승을 통하지 않으면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이 없었다."
"끝이에요?"
"내가 천궁에 가서 필마온 하는 바람에 말이 원숭이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덩치가 큰 말이 자신에게 위해를 끼칠 수 없는 원숭이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뭐 있어. 그 외에도 꽤 많은데, 대부분은 법칙을 파괴한 거라서 자랑거리가 못 돼."
"그런 행동들이 흐름을 바꿨나요?"
"아니. 알다시피 나는 인연도 없고 인과도 없어서 운명의 흐름을 일찍 벗어났다. 지금은 너와 이어진 덕분에 그 흐름에 다시 발가락 정도 담갔지만."
"아까 저를 살짝 언급했었는데."
"그냥 칭찬해달라고 말해라. 속마음이 빤히 읽히는데 내숭은."
헤헤.
"네가 제일 처음 해낸 일은 장안법과 투명술의 결합이었다. 솔직히 난 그때 무척 놀랐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나도 널 발견하지 못했을 거다. 그때 세상이 법칙을 수정했지."
"네? 법칙을 수정해요?"
"이랑신의 진안이 너를 발견할 수 있도록 수정했다. 왜냐면 질서의 세계에는 '절대'적인 게 없어야 하거든. 절대적인 무언가가 생기는 순간, 세상은 서서히 혼돈이 된다."
만세. 난 금단이 되기 전부터 무척 대단한 놈이었어. 그때부터 평범한 중2는 아니었다고.
"두 번째는 오함마다. 천궁이 만들어지고 엄격한 법규로 천계를 통제하기 시작한 후, 천계에는 신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천궁의 완벽한 통제를 상징하는 동시에, 천궁이란 존재가 신선들의 발전을 저해하는 장애물이라는 뜻도 되었다. 그런데 네가 오함마를 신수가 될 게 확실한 후보로 키워냈다. 그 때문에 천궁의 지배력이 하락했고, 천궁 소속 신선들이 더 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그때 오함마를 탐내는 신선이 무척 많았을 거다. 오함마를 자기 소유로 하고 신수로 만들면 엄청난 자유를 누릴 수 있으니까."
이건 상상도 못 했다. 옥황상제는 통제력이 하락해서 심통 났던 거였구나. 자기에게도 좋은 일이라면 고작 만 포인트 던져주고 입 닦진 않았겠지.
"세 번째는 새총과 후예의 활을 결합한 일이다. 후예의 활은 9라는 숫자에 강하고 새총은 새에 강하다. 그 두 법보를 결합했는데 장점을 모두 따왔다. 게다가 그 위력을 절대에 가깝게 증폭했다. 십살총의 탄생은 네가 화염산에서 오행인을 만들어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십살총 때문에 법보의 결합이 조금 쉬워졌거든."
"그건 법보들끼리 알아서 합친 건데요?"
"둘을 만나게 한 건 너였어. 그냥 만났다면 합쳐지지 않았을 거고. 아기 낳을 때 부모가 아이 얼굴 몸매 일일이 손으로 빚어주냐?"
내 형은 얼굴 빚어준 거 같아. 나 때는 까먹었고.
"네 번째는 구천뇌조가 오뢰를 합친 천멸을 버텨낸 거야. 그 때문에 벼락의 위력이 약해졌지. 위력이 약해진 대신 벼락의 양이 많아졌어. 강한 나쁜 놈은 처리하기 힘들어졌지만, 하계의 악인을 더 많이 벌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잘한 일이지. 거악은 세상의 운명에 영향을 주기에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소악은 주변에 폐를 끼치기에 확실한 악이다."
"요괴가 사람 잡아먹는 거 악이 아니라면서요?"
"그러나 사람이 사람 잡아먹는 건 악이지. 그런 놈을 나쁜 놈이라고 하는 거야."
"다섯 번째는 연단로다. 네가 삼매진화를 삼켜서 연단로를 견뎌냈지. 그 뒤로 연단로의 능력이 약해졌다. 그리고 태상노군이 홍해아에게 삼매진화를 줄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네 덕분이다. 네가 삼매진화를 삼켜서 편법이 성공할 가능성이 커졌지. 뭐, 누군가 방해해서 결국 실패했지만, 태상노군이 성공했으면 불 다루는 솜씨가 훨씬 강해졌을 거야. 원래부터 법술은 여래 제외하고 모두 밑으로 보던 늙은인데, 홍해아마저 성공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형님도 걱정할 정돈가요?"
"아니. 나보다 강한 놈도 나랑 싸우면 질 거야. 난 지는 법을 몰라."
"여래불과 내기해서 졌잖아요."
"그건 싸움이 아니었어. 경지를 비교하는 거였지. 그리고 기억도 안 나."
"여섯 번째는 촛불이다. 단순반복으로 경지를 올릴 수 있는 길을 새로 만들었지. 그전까지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경지를 높일 수 없었다. 그런데 네가 촛불을 만들면서 노력만 해도 경지를 올릴 수 있는 수련 방식이 생겨났다. 물론 낙타 앞에 바늘구멍 수준이지만, 그래도 피나게 노력했는데도 실패만 해야 하는 암울한 때와는 달라졌지."
나 생각 밖으로 어마어마한 일을 많이 했구나.
"그 외에도 자잘한 것들이 있지만, 마찬가지로 자랑할 게 못 된다."
왜? 그건 형님 생각이고. 난 자랑거리 하나라도 더 많았으면 좋겠는데요?
"세상의 모든 존재가 법칙이라는 틀에 갇혀 살면서 상호작용하여 만들어낸 커다란 흐름이 바로 지성체들이 말하는 운명이다. 정확히 운명이란 건 그 커다란 흐름에 포함된 일부일 뿐이다. 너는 법칙에 영향을 준 것만 여러 차례고, 흐름에 영향을 줄 만한 일도 여러 번 했다. 그러니 네가 운명에 놀아난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넌 그 흐름에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헤엄치며 흐름에 영향을 준 셈이다."
"그럼 운은 뭔가요? 지금까지 실력 이상의 성과를 낸 건 운이라는 말밖에 안 되거든요."
"운은."
화과산에서 수련하며 오래 고민했다. 손오공은 운이 우연이자 필연이라고 했다.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하는 필연인 일이 있는데, 우연히 내가 그 일을 하게 된 거다. 즉, 로또 1등 당첨을 누구든 해야 할 상황에서 내가 1등이 되게 만드는 그것이 운이란다.
"투전성불을 뵙습니다. 오래국 부두 근처를 관리하는 토지신입니다. 밖으로 나온 원숭이에게 부탁해서 어렵게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로?"
화과산에 토지신이 없어서 이런 점이 불편하구나. 게다가 날지 못하는 토지신은 죽음의 바다를 건너지 못한다. 생기를 대부분 빨리고 어디로 떠내려갈지 모른다.
"당신 부친이 현재 토지묘에 있습니다. 거기 토지신이 억지로 잡고 있지만, 오래 버틸 수 없습니다. 그쪽 저승의 갑갑갑갑이라는 분이 몰래 알려줘서 이렇게 소식을 전합니다. 토지신끼리는 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직접 소통할 수 없거든요."
토지신들이 이래서 섬에 가기 싫어하는구나. 그리고 내가 이런 한가한 생각 할 때가 아니지. 토지신에게 소식 전해줘서 고맙다고 선업을 넘긴 후 바로 세상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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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설마? 춘천진인이세요?"
[그렇습니다. 덕분에 저승사자로 복귀했습니다. 자격 미달이지만, 갑갑갑갑 님처럼 열심히 일해서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라고 염라께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걸 아시는 분이 왜 우리 아버지를 데려가는 겁니까? 그리고 보호막은 어떻게 뚫으셨어요?"
[본인이 법보를 직접 벗은 겁니다. 대화할 시간을 드릴 테니,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세요.]
"아버지."
[네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끝내는 알렸구나.]
"왜 죽으려 하는 거예요? 그대로 계속 사시면 신선 될 수 있다니깐요. 하늘에 못 올라가도 토지신이 되어서 땅 관리하며 즐겁게 사시면 좋잖아요. 손주들 재롱도 지켜보면서요."
[그렇다고 가족 모두 신선 만들 거야? 친구들은? 친구 자식들은? 아는 사람이 하나둘 죽고 그 사람들의 후손이 죽는 걸 일일이 지켜봐야겠어?]
내가 알던 아버지가 아니다. 조금 손해 봐도 그러려니 하고 어머니한테는 늘 져주던 어수룩한 모습, 가끔 내게 실없는 농담도 던지고 친구처럼 편하게 말 걸어주던 내 아버지가 아닌 것 같다.
"어머니 두고 혼자 가시려고요?"
[너 염라대왕이랑 친하다며? 다음 생에도 부부가 되게 해달라고 청탁 좀 해줘. 다음 생에는 내가 여자 되고 네 엄마가 남자 되기로 상의했다.]
이제 좀 우리 아버지다우셔. 그런데 왜 자꾸 코가 시리지?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세요?"
[응. 솔직히 네가 갑자기 대단한 사람이 되고 나서 우린 무서웠어. 우리가 알던 대성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몸을 빼앗은 게 아닐까 하고. 그래도 네가 자주 철없는 모습을 보여줘서 우리도 안심할 수 있었단다.]
모함, 날조. 우리 아버지가 분명하구나. 그런데 왜 눈시울이 따갑지?
"아버지. 이대로 가시면 맹파탕 마시고 우릴 다 잊으실 거예요. 망향대에서 인연이 끊어질 거고요."
[괜찮다. 네가 다시 그 인연을 이어주면 될 거 아냐? 그 정도도 못 하는 건 아니겠지? 네 엄마 친구 아들은 그런 거 다 해주더만.]
"제가 심판전까지 배웅할게요."
황천길에서 아버지가 추워하시는 것 같아 외투를 씌워드렸다. 맹파가 공손히 두 손으로 올리는 맹파탕을 마신 후 어쩔 다리를 지났다. 망향대에 오른 아버지는 모든 인연의 실이 끊어지셨다. 어머니 얼굴을 보시는지 눈물을 주르륵 흘리셨다.
악구령에서 태극인을 꺼내 애꿎은 개를 수십 마리나 죽였다. 다행히 이성이 있는 놈들이라 계속 덤벼들지는 않았다. 금계산에서는 십살총 꺼내는 거로 간단히 해결했다. 날개 밑에 대가리를 파묻은 닭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투전성불. 죄업은 봐주고 말고 여지가 없다는 걸 잘 알겠지?]
"압니다. 지옥까지 따라갈 생각은 없으니 마음 놓으십시오. 다만 어디의 누구로 환생했는지 꼭 알려주시고요."
[그 정도야 벌 조금 받을 각오로 알려드릴 수 있소. 꼬리 긴 분보다는 말이 통해 참 다행이오.]
"뭐, 사람 보내서 떠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내가 요새 많이 먹어서 나를 떠보려다가 저울이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관련자는 전부 색출해서 엄벌했소. 누가 머리를 잘못 굴렸던 거였소. 이간질하려고 했는데, 투전성불의 담백한 성격을 몰랐던 게지.]
누군가 염라를 끌어내리려고 일부러 도발했다는 말이구나. 내가 아닌 손오공이었다면 저승에 가서 염라 멱살을 잡았을 수도 있고 여의금고봉으로 뚝배기 깼을 수도 있겠지.
저승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갔다. 협회 건물에서 아버지 장례식이 한창이었다. 밖에 화환이 줄지은 광경을 보니, 내가 토지신들 불러온 게 꽤 잘한 일인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저승사자에게 끌려갔을 때를 대비해서 한 짓인데, 많은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었다니 가슴이 뿌듯하다. 화환에 고맙다는 말이 가장 많았다.
조문객들이 다 떠나기를 기다려서 장례식장에 들어갔다. 가장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보이던 형이 울다 기절했다. 어머니는 정말 잘 나온 아버지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옛날 좋았던 시간을 회상하는 거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염라한테 돈 좀 찔러줬어요."
"망할 영감탱이 지옥에서 벌 좀 받게 놔두지. 아까운 돈 왜 찔러줘. 그 돈으로 어미한테 맛있는 거라도 사주든가."
"다시 태어나도 부부가 되기로 했다면서요?"
"그렇게 속이지 않으면 안 죽겠다고 버텼겠지. 그 꼴 보기 싫어서 내가 다음 생에도 부부 해준다고 했다."
"월노 찾아가서 돈 좀 찔러줘야겠네요."
"다시 태어난 담에 얼굴 보고 결정하자. 꼭 엄마 먼저 찾아와서 의견 묻고 행동해라."
어머니의 미소가 서글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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