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행진인
"너 권법이라면서 끝까지 주먹 안 쓸 거야?"
"넌 권법이라고 주먹만 쓸 거야?"
이건 처음부터 지금까지 합의를 보지 못했다. 나는 두 주먹에 붕천권 하나씩 준비해놓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 반면 이소룡은 주먹만 사용하고 다리를 이용한 공격은 전혀 펼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이소룡도 필살의 공격을 다리로 준비한 듯하다.
"무릇 권법이라면 주먹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법."
- 시간이 별로 없다. 승부를 갈라야 한다.
예지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 손오공은 그런 부분에서 나보다 감각이 훨씬 뛰어나다. 지혜와 경험으로 빚어낸 예지이기에 난 흉내 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필살기를 펼쳐야겠구나. 아직 필승의 자신은 없지만.
돌진하며 어깨로 이소룡의 명치를 노렸다. 이소룡은 자세를 낮추며 왼 주먹으로 내 목을 노린다. 지금까진 발경으로 이소룡의 공격을 튕겨냈지만, 이번엔 회피를 선택했다.
몸을 더 낮춰 이소룡의 주먹을 피하면서 왼 주먹으로 바닥을 때렸다. 붕천권의 위력에 바닥이 들썩인다. 이소룡도 예상 밖의 사태에 중심을 잡으려고 허벅지와 허리에 힘줬다.
바닥을 때린 반탄력을 이용해 몸을 일으키며 오른 주먹으로 붕천권을 이소룡에게 먹였다. 흔들리는 바닥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몸을 낮췄던 이소룡으로서는 이 주먹을 피하기 무척 힘겨울 거다.
만약 이걸 회피한다면 뒤에 77연환권이 준비되었다. 위력은 조금 부족하지만, 일단 걸리면 연속으로 얻어맞아야 하는 무시무시한 권법이다.
이소룡은 밑에 침대라도 있다는 듯이 가로로 누워버렸다. 붕천권을 재빠르게 거두고 연환권을 펼치려 했는데, 이소룡의 두 다리가 상상도 못 한 각도에서 나타나 나를 타격했다.
"원앙퇴, 쌍룡출해."
묵직한 타격에 진체가 흔들렸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이를 악물고 연환권을 펼쳤다. 첫 주먹이 적중하면 남은 주먹은 누구라도 피할 수 없다.
"내가 졌다."
"비긴 거 같은데."
내 입 말고 주둥이를 꿰매고 싶다. 꼴에 자존심 있다고 패배를 인정하는 상대의 말에 반박했다.
"나는 다리로 승기를 잡았고 넌 주먹으로 승기를 잡았어. 권법 대결이니까 네가 이긴 거야."
"그럼 약속 지켜."
다행히 정신을 빨리 차려서 계속 우기진 않았다. 이소룡은 허공에 주먹질 몇 번 하면서 방금 전투를 되새겼다. 나도 방금 연환권을 어떤 식으로 펼쳤던지 회상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 네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권법을 펼쳐서 그래. 네가 수준이 높아지면 언젠가 생각날 거야. 일단은 삼장 찾는 데 집중해라.
손오공이 강신했을 때 여의금고봉을 어떻게 다뤘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기억나면 손오공 무릎 정도 수준이라고 했는데.
그럼 손오공은 이소룡보다 무공이 얼마나 더 강한 건가? 손오공이랑 우마왕 무공 수준이 비슷하다 들었는데, 손오공이 저평가받은 건가? 아니면 우마왕이 나랑 싸울 때 실력을 다하지 않았던 걸까?
- 천계 존재가 하계로 내려가면 약해진다. 우마왕도 예외가 아니야.
"내가 찾는 사람은 그림자가 가장 짙은 곳에 있다."
말을 마친 이소룡이 사라졌다. 구절편을 합친 백절편도 한번 상대해보고 싶은데, 빨리 삼장을 찾아야 한다.
형님, 이소룡 무슨 개소리 한 거예요?
- 너 머리 쓰는 습관 좀 키워. 빛이 가장 강한 곳이 그림자가 가장 짙다. 가장 밝은 곳으로 가라고 한 거 아니냐.
저 새끼, 내게 지고 심통 나서 일부러 나 엿 먹이는 것 같은데? 그냥 환한 곳이라고 말하면 죽어?
- 그건 아니지. 빛이 반사가 심하면 그림자가 옅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빛의 방향성이 강하면서도 밝은 곳이어야 해.
오케이. 쿨하게 넘어가자. 나라도 싸워서 지면 아는 정보를 알아듣기 쉽게 풀어서 말해주진 않을 거다. 객관적으로는 나보다 강한 이소룡인데, 붕천권처럼 어마어마한 필살기가 없어서 내게 진 거다. 내가 붕천권을 펼치고 틈을 보였을 때 붕천권 정도의 공격으로 때렸다면 승리자는 이소룡이었다.
날개옷으로 몸을 띄우고 후보군 몇 개 찾은 후 순서를 정하고 움직였다. 확실히 운은 나쁘지 않은지, 두 번째 방문한 곳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네가 신룡이 보낸 사람이냐? 그래, 내게 할 부탁이란 게 뭐지?"
이 할아버지는 누구지? 이소룡은 삼장이 아니라 이 할아버지를 찾았던 거구나.
이 할아버지에게 삼장 행방을 물으면 날 알려줄까? 그 대단한 천궁의 신선들도 모르는 일을 이 수염이 몇 가닥 남지 않은 할아버지가 알까?
"누구세요?"
"치밀한 놈이군. 나 오행진인이다."
"어떤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데요?"
"뭐야? 너 아무것도 못 듣고 온 거야? 오행과 음양의 기운을 안정시키는 게 내 전문이다. 신룡의 기운을 안정시키려고 날 찾은 게 아니었어?"
"아닌데요. 그런 쉬운 일이 아니에요."
오행진인의 눈에 불이 켜졌다. 말투, 표정, 자세 등에서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일부러 자극했다. 고 변명하려 했으나, 그냥 말이 헛나간 거다.
"하하. 설마 삼태극을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내겐 그 희귀한 기운이 없지만, 기운만 넉넉하다면야 이 오행진인이 못해낼 일이 세상에 어딨어?"
"그렇게 장담하지 마시고. 일단 보면 손사래를 칠 겁니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 내가 법력은 부족하지만 삼계 합쳐서 기술은 최고야."
오행인을 꺼냈다. 오행진인의 눈이 커다래진다. 발을 동동 구르더니 손을 싹싹 비빈다. 몇 가닥 없는 턱수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더니, 끝내는 수염 한 가닥이 툭 끊어졌다.
"어마어마한 기운이 조잡하게 엮였구나. 운이 엄청난 놈이군. 딱 봐도 마구잡이로 다룬 것 같은데 아슬아슬하게나마 균형을 이뤘다니."
"할 수 있어요 없어요? 그냥 간단하게 말해보세요."
내 오행인이 오행진인의 자신감을 싹 날려버린 것 같다. 아까와 달리 눈알이 팽그르르 돌아가고 혀가 자꾸 입가를 핥는다. 입술을 계속 달싹거리며 시원한 대답을 쏟아내지 못했다.
"내게 기회를 줄 수 있어? 한번 해보고 싶구나."
"실패하면요?"
나쁜 사람은 아니다. 입에 발린 소리로 나를 구슬려 오행인의 안정화를 시도하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실패를 떠올렸는지 얼굴이 핼쑥해진다.
"잠깐만 손을 얹어봐도 될까?"
- 허락해도 된다. 이 무기는 너랑 인연이 정말 깊다. 누구도 앗아가지 못한다.
대답 대신 오행인을 쭉 내밀었다. 오행인을 골고루 쓰다듬던 오행진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해보고 싶어. 6할 자신 있어. 실패하면 어떻게든 갚을 거고, 성공해서 내 격이 높아진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네게 해줄게."
"안정화에 성공하면 내게도 좋은 거니까 보답 안 해줘도 돼요."
오늘따라 내 양심에 난 털들이 다 사라진 느낌이다. 나 왜 이러지? 호구의 호구동을 깨고 법력을 얻어내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이 없었는데.
"그건 네 사정이고. 내 사정은 그저 고맙기만 한 거야. 내가 네게 고마워하는데 네 사정까지 헤아려야겠어?"
적반하장과 반대되는 말이 뭐지? 이건 숫제 물에서 건져내고 보따리 못 내놔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꼴 아닌가?
- 맡겨라. 감이 좋다.
삼장 빨리 구해야 할 텐데요?
- 느낌 좋다니까.
"해보세요."
오행인을 건네받은 오행진인은 품과 소매에서 물건을 잔뜩 꺼냈다. 수염 한 가닥을 손가락으로 돌리면서 입안으로 뭐라 중얼중얼했다.
"진화를 앞둔 삼매진화에, 마르지 않는 만천에, 불괴후토의 최고 등급, 하늘과 땅의 기운에 세 번째 기운을 섞은 상록청에, 가두는 성질을 가진 기체 금속까지."
그 외에도 수많은 말을 중얼거렸지만, 나는 저 부분만 알아들었다. 남은 말은 분명히 귀에 들어왔는데 관련 지식이 없어 전혀 해석되지 않았다.
"음양이 뭔지 알아?"
혼자 중얼거리다 말고 갑자기 내게 질문한다. 말투가 무척 까칠하다. 마치 중대한 수술을 앞둔 외과 의사처럼 예민해 보였다.
"세상을 이루는 세 기운 중 둘이요."
"네가 음양에 대해 조금 더 알면 내가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니까 내 말을 새겨듣고 최대한 이해해."
"오행의 상생을 양이라고 하면, 오행의 상극은 음이라고 한다. 때리는 사람을 양이라 하면 맞는 사람이 음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양이면 배우는 사람이 음이지. 쉽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행진인이 열성적으로 강의를 이어갔다.
"반대로 상생을 음이라 하면 상극이 양이 된다. 때리는 놈이 음이 되면 맞는 자가 양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음이면 배우는 사람이 양이고. 이해됐어?"
"음양은 상대적이라는 말이군요."
"그렇지. 세상은 모순이 빚어냈다. 그 모순을 기운으로 표현한 게 바로 음양이다. 중심을 잡아주는 기운이 있고, 음양이 충돌로 만물을 빚어낸 거다. 그중에서 법칙을 위배하는 것들은 사라졌고, 법칙에 순응한 것만 남아 이 세상을 구성했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쏙쏙 머리에 꽂히는 느낌도 아니다. 뭔지 알겠는데 자세히 따지려고 하면 막히는 정도로 이해했다.
"결국 세상을 살아가는 주체는 자신이다. 내가 뭔가를 양이라고 정하면, 그와 반대되는 건 전부 음이다. 비슷한 건 양이고."
상대성 이론인가?
"누군가 이건 음이요 이건 양이요 정한 건 아무 쓸모 없다. 네가 기준을 정하고 음양을 구분할 수 있으면 되는 거다."
손을 양이라 하면 발은 음이 된다. 머리를 양이라 하면 엉덩이는 음이 된다. 그런데 돼지를 양이라 하면 양은 뭐가 되지? 말은 뭐가 되고 소는 뭐가 돼?
"그 기준을 정하려면 만물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아까 말했다시피, 만물은 음양이 빚어낸 전부가 아니다. 법칙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천천히 소멸하였다. 만물과 음양을 제대로 알려면 법칙을 이해해야 한다."
"이해 못 하면요?"
"머리로 명확히 알아야 이해한 게 아니다. 구체적인 말로 끄집어내지 못하지만 네가 알고 있을 수도 있다. 난 네가 음양을 이해했다고 믿고 도전을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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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달리 오행진인은 미적거렸다. 오행인을 중심으로 온갖 잡동사니를 이리저리 배치하며 망설였다. 나는 다급한 마음을 억누르며 인내심을 키워갔다.
"내겐 세 가지 선택이 있다. 셋 다 결과가 불확실하여 선택하기 힘들구나.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머리를 비우고 마음 가는 대로 한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마음조차 비운다."
난 이 방법으로 지금까지 모든 고난을 헤쳐왔다. 이 방법은 대다수 신선에게는 무척 어렵다. 자기 머리와 지식이 부족함을 인정해야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이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낙타들이 선택하기에는 쉽지 않다.
"그래. 결심했어."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레이서처럼 오행진인은 거침없이 물건을 옮겼다. 결론을 내리고부터 일말의 주저함도 엿볼 수 없었다. 배치를 끝낸 오행진인이 오행인에 가루를 뿌렸다.
"보통 오행을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기운들이 있지. 삼매진화나 불괴후토처럼. 그러나 그건 오행을 벗어난 게 아니야. 오행을 벗어났다면 새로운 기운이 되었어야지. 그저 보편적 법칙을 벗어난 것뿐이야. 결국 일반 오행의 기운보다 훨씬 강한 오행의 기운이 되었을 뿐이지."
그럼 나는? 나는 뭐지?
"진정 오행을 벗어나면 상생과 상극을 선택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지. 나처럼 말이야. 이 무기는 오행에 기반을 두었지만, 오행을 벗어나야 비로소 그 위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어. 상생과 상극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이 법보 자체가."
잠자코 듣기만 했다. 오행진인의 말에 담긴 뜻을 조금밖에 헤아리지 못했다.
"하나로 합치기 위해 오행을 어설프게 얽어맸어. 융합에는 성공이지만, 법보로서는 실패야. 어마어마한 수준의 기운을 품은 다섯 법보가 합쳐져서 하나의 법보에도 못 미치는 위력이 되었어."
오행인에 불이 붙고 흙이 꿈틀대고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자라고 금속이 생겼다.
"우선 다섯 기운을 독립시켜야 해. 독립한 기운이 오행의 이치에 맞게 서로 동조하게 하고. 오행의 상생과 상극을 적절히 조율해 하나처럼 얽히게 만들어야 해. 그리고 오행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상생과 상극의 절대 균형을 이루는 거야."
인터넷에서 레시피 찾아 내가 요리하면 맛없다. 내가 오행진인의 말을 다 이해해도 오행인의 안정화를 도울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다. 이해조차 못 한 지금에야 말 한마디 섞을 용기도 없고.
"오행은 조화가 우선이야. 위력을 강조하면 오래가지 못하지. 조화를 이룬 후 다섯 기운이 함께 성장하는 게 맞아. 느리지만 옳은 길이지."
오행진인의 다독임을 통해 다섯 기운이 서로 키우고 죽이고 하면서 균형을 찾아갔다.
"먼저 서로를 이해하게 해야 해. 그 과정은 상생과 상극, 충돌과 화합이지. 법칙을 비틀어야 참모습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상생과 상극 과정에서 이 기운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어. 불이 다 같은 불이 아닌 것처럼, 똑같은 기운도 둘로 갈라서 따로 두면 다른 성질을 띠거든."
내겐 일부 기운이 커 보이고 일부 기운이 약한 듯 느껴진다. 그러나 오행진인은 나랑 생각이 다른 듯, 커 보이는 기운을 오히려 북돋고 약해 보이는 기운을 오히려 누른다.
"보통 오행에서 가장 안정적인 토의 기운을 중심으로 하지. 그건 잘못된 거야. 수준 낮은 자들의 궁여지책일 뿐. 오행이 조화를 이루려면 어떤 기운이 아닌 오행 자체가 중심이 되어야 해."
오행인의 모양이 변한다. 더욱 평범하게.
"억지로 하나가 되며 결속력이 부족해 이렇게 요란한 모습이 되었지."
그렇구나. 제천권법도 불필요한 동작이나 발경을 덜어내면서 오히려 더 수준이 높아졌다. 반박귀진이라는 건, 평범해지는 걸 추구하는 게 아니다. 더 나은 모습을 추구하다 보면 불필요한 것들이 사라지고 알맹이만 남아 수수해 보이는 거다.
자루와 자루 끝 고리와 망치 머리만 남았다. 잉어 비늘 무늬도 사라지고 네 발굽과 두 날개 그리고 꼬리도 사라졌다.
자루 한쪽엔 망치 머리가, 손잡이로 볼 수 있는 곳엔 싸구려 고리가 씐 모습이다.
"자, 이제부터 난 태극진인이다. 옥황상제 발바닥 핥아주는 태극천황대제에게 태극 두 글자를 떼라고 큰소리쳐도 되겠구나."
내게도 수십억 포인트가 들어왔다. 오행인이 오행을 뛰어넘은 법보가 되었다. 자루를 슬쩍 잡으니 아무 파동도 없이 고요하다. 법력을 넣어도 빼도 아무 반응이 없다.
"이건 내 사례금. 넉넉한 형편 아니라서 이 정도밖에 못 해주겠다."
"이거 뭡니까?"
"오행판(五行板)이다. 물건이나 사람이나 목적지를 말해주면 거기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는 법보. 혼돈에 숨은 것만 아니라면 대부분 찾아낸다. 약점 하나 있는데, 가까운 길을 알려줄 수도 있고 무척 돌아서 가는 길을 알려줄 수도 있다."
오케이. 길치에게 딱 알맞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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