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대립
자하괴독을 품었던 여의주는 사마월의 천멸장에 깨졌다. 그 틈을 타 흑백구가 자하괴독을 품어 여의주가 되었다.
그러나 억지로 끌어올린 격 때문에 자하괴독을 제대로 품지 못하고 무룡의 독룡담에 숨어서 기회를 기다렸다.
무룡은 늘 자하괴독만 염두에 뒀지만, 실상은 어딘가 다소 부족한 여의주까지 셋이서 벌이는 삼파전이었다.
대체로 여의주와 무룡이 같은 편이지만, 확실한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 깨질 동맹이었다. 더구나 무룡은 여의주와 자신이 손잡은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어 배신 따위는 염두에 두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오매불망 고대하고 고대하던 기회가 오자 여의주는 무룡의 안위는 전혀 고려치 않고 자신만을 위한 길을 골랐다.
- 진짜 여의주를 품었어?
무룡의 혼을 제압하고 무룡의 백과 결합하여 새로운 존재가 된 후 다시 수련하여 선계로 갈 생각에 들떴던 정혈단이 기겁했다.
'뼈저린 실수구나.'
자하괴독이 풀려나면 세상이 멸망한다. '반드시'라고 할 순 없지만, 십중팔구 벌어질 일이다. 그래서 무룡은 늘 자하괴독만 염두에 두고 자하괴독을 품은 여의주는 까맣게 잊었다.
그간 여의주의 노력으로 자하괴독이 잠잠했던 덕에 위기감을 덜 느낀 탓도 조금 있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무룡마저 여의주를 잊고 지냈던 탓에 어느 정도 무룡의 생각을 읽을 수 있던 정혈단도 미처 여의주의 존재를 몰랐다.
'놈은 뭘 원하는 걸까?'
위기의 순간에 무룡은 오히려 극도의 평온을 찾았다. 그러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정작 무룡이 아닌 정혈단이 찾아냈다.
- 격이 안 맞다. 틈을 비집어라.
무룡과 독룡담, 무룡과 세상이 강하게 연결됐다. 두 번 다시 안 올 기회에 여의주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바로 자하괴독으로 무룡 등이 고전했던 독룡을 흉내 내어 함께 승천하려고 했다. 애초부터 천계로 가는 게 목표였던 자하괴독이 여의주의 계획에 동참했고, 용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여의주도 정상이 아니고 자하괴독으로 이뤄진 용도 정상이 아니다. 여기에서 굳이 따지자면, 여의주의 격이 부족했다.
천계에서도 그 존재를 두려워하는 자하괴독의 격이 더 높아 여의주와 결합하고도 승천할 수 없었다.
여의주가 무룡의 독룡담에서 나오지 못하고 자하괴독의 발을 잡은 이유다.
'틈을 비집는 방법은?'
- 연결 고리를 끊어 저놈만 밖으로 내보내면 된다.
정혈단은 여의주와 자하괴독을 분리하라고 무룡을 종용했다. 그렇게 되면 바로 무룡의 몸을 차지한 다음 최대한 멀리 도망칠 생각이다.
저 독이 풀려나면 세상이 멸망하겠지만, 완전히 망하기 전에 격을 올려 선계나 천계로 도망가면 된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세상이 망하는데.'
한시가 급한 상황이어서 정혈단도 더는 심계를 안 부리고 정보를 털어놨다.
- 세상이 그리 쉽게 망할까? 그리고 세상이 망하는 과정에 천계와 하계를 분리한 천라지망도 부서질 거야. 그럼 확실히 안전한 천계로 갈 수 있어.
선계 역시 하계와 분리되었지만, 안전을 확실히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니 되도록 천계를 노리는 게 좋다.
'나 혼자 살라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 골치 아프구나.
갖춘 힘에 비교해 격이 떨어지는 자들이 있다. 이런 자들은 힘을 함부로 휘둘러 난장판을 만든다. 그리고 갖춘 격에 비교해 마음가짐이 부족한 자들이 있다. 이런 자들은 위기 상황에 늘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정혈단은 무룡이 갖춘 힘이나 격과 비교해 마음 수양이 몹시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아까부터 보여줬던 쇠고집까지 합치면 설득할 가능성이 아예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 용이 꼬리를 뽑으려고 요동쳤다.
- 함께 살 방법은 꼬리를 자르는 것밖에 없다. 잘 생각해라.
정혈단은 지금이라도 무룡의 혼을 제압할 자신이 있다. 그러나 무룡의 백과 결합하여 몸을 완전히 통제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고, 그사이 무룡이 품은 여의주에 먹힐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어떻게든 여의주와 용의 연결이 끊어지고 그 여파로 여의주가 약해진 후에야 무룡의 몸을 차지할 수 있다.
무룡은 전해 조급해하지 않고 신중하게 고민했다. 위기라고 느껴서인지 평소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떠올린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 확실히 느껴졌다.
정혈단은 여의주가 두려워서 무룡을 공격하지 못한다. 용은 무룡의 몸에 있는 여의주 때문에 무룡을 공격하지 못한다.
여의주는 부족한 격 때문에 벌어진 격차를 줄여야 하기에 함부로 힘을 쓰지 못한다. 만약 무룡을 상대하느라 힘을 소모하면 용이 된 자하괴독과 결합하는 데 실패해 영원한 소멸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난 급할 게 하나도 없다.'
서두를 게 없다는 생각에 무룡은 정혈단과 독룡과 여의주의 변화를 살피며 임기응변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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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주가 서두른 건 단지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여의주의 계산으로 무룡이 정혈단을 이길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했다.
보다 격이 높은 정혈단이 무룡의 몸을 차지하면, 어쩌면 여의주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격도 힘도 여의주가 확실한 우위지만, 현재 무룡의 독룡담에 숨은 신세다.
남의 집 처마 밑에 서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하듯이, 정혈단이 무룡의 몸을 차지하면 여의주와의 격차를 줄이거나 아예 역전해버릴지도 모른다.
반대로 무룡이 정혈단을 이기면 격은 물론 힘까지 얻는다. 정혈단이 이기는 것보단 낫지만, 여의주한테 위협이 되는 건 마찬가지다.
더구나 여의주로서 짝을 찾아 승천하고 싶은 욕망이 독룡담에 갇혀 지내는 동안 강하게 자극받아 어렵게 생긴 기회를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자하괴독의 격이 높아 완전한 결합에 실패했다. 그래서 독룡이 된 자하괴독이 독룡유와 칠신도록의 흐름을 타고 무룡을 벗어날 때 여의주는 독룡담에 갇혀 독룡의 꼬리를 잡았다.
해결책은 무룡을 죽이는 것인데, 정혈단이 걸림돌이 됐다.
무룡의 몸을 빼았아야 사는 정혈단은 절대 무룡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물론, 격이 다소 부족해도 명색이 여의주인데 진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단, 둘을 상대하는 과정에 힘의 손실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힘의 손실은 격의 하락으로 이어진다.
정혈단은 힘의 격차가 심해 여의주를 공격할 수 없고, 무룡은 말할 것도 없다. 정혈단에도 못 미치는 힘과 격으로 여의주에 대항할 수 없다.
자하괴독 역시 다를 게 없다. 무룡과 천방기사를 비롯해 진실을 아는 자들이 늘 자하괴독이 세상에 풀려나 하계가 망할 것을 걱정하지만, 정작 자하괴독은 세상을 소멸할 의지가 전혀 없다.
자하괴독의 목표는 천계로 가서 파괴를 일삼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 자체가 공존이 어려운 자하괴독이기에 부득이하게 하계에 풀려나면 세상은 망한다.
다시 돌아와서, 자하괴독은 여의주와 결합하여 천라지망의 틈을 비집어 천계로 가는 게 유일한 목표다. 실패하여 하계에 부득이하게 남겨지면 세상과 싸워야 하고, 그 과정에 힘이 유실하여 천라지망이 사라져서 천계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도 목표했던 천계 파괴를 이룰 수 없다.
그러니 자하괴독 역시 여의주를 공격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의주도 무룡과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으면서 변화를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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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혈단은 무룡이 품은 힘이나 이룬 격에 비교해 정신 수양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여의주와 용의 연결을 끊는 최선의 선택을 배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 역시 격과 힘과 비교해 턱없이 부족한 정보로 여지없이 오판하고 있음을 몰랐다.
만약 용과 여의주의 연결을 끊으면 용도 여의주도 큰 타격을 받는다. 그렇게 되면 정혈단이 무룡을 제압하고 심지어 여의주까지 삼킬 기회가 생긴다.
그러나 여의주를 잃어 화가 잔뜩 난 자하괴독이 그걸 차분하게 지켜볼 거란 생각은 삼척동자도 어처구니없어 혀를 찰 일이다.
그러나 정혈단 역시 말 못 할 고충이 있다.
남은 셋 모두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차분히 기다리는 무룡과 여의주, 힘으로 뽑는 것 빼고는 딱히 해결책이 없어서 별다른 수를 내지 못하는 자하괴독.
이대로는 영원히 대치 상태일 것 같지만, 사실은 정혈단이 제일 불리했다. 칠신도록의 여섯 운기법을 결합한 무룡이 느리지만 확실히 힘을 비축하고 있다.
이대로 천 년 비축해도 여의주와 자하괴독을 어찌할지 의문이지만, 정혈단에겐 확실히 위협이 된다.
그리고 무룡이 어떠한 이유든 갑자기 죽어버리면 정혈단에겐 아무런 희망도 남지 않는다.
정혈단이 서두를 수밖에 없고, 부족한 정보를 활용해서라도 억지로 결론을 얻어야 하는 이유다.
정혈단은 용과 여의주의 연결을 끊는 선택을 우선 배제했다. 무룡이 하면 몰라도, 제삼자인 정혈단이 하려면 엄청난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연결을 끊은 다음 무룡의 몸을 차지하기도 힘들고, 차지했다고 쳐도 여의주를 꼭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무룡의 몸을 빼앗는 선택 역시 배제했다. 그리고 여의주와 싸우는 것도 배제했다.
- 길이 없는 건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씩 배제하다 보니 남는 게 없었다.
- 아니다.
절망에 허덕이던 정혈단이 생각을 전환했다.
왜 무룡과 여의주만 생각했을까?
정혈단은 크게 반성했다.
현재 용의 꼬리가 갇힌 건 여의주와 용 사이의 결합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혈단에게도 기회가 있다.
무룡의 몸을 차지해 수련한 다음 선계나 천계로 가는 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
정혈단은 자신의 존재를 걸고 여의주로 전환했다. 여의주로 전환하는 데 실패하면 영원한 소멸. 여의주가 된 이후 용을 만나지 못해도 영원한 소멸.
그러나 만약 여의주가 되어 저 어마어마한 파괴의 힘을 품은 용과 결합하면 단번에 천계로 올라갈 수 있다.
천계에 가서 자신을 버리고 매정하게 떠난 백을 찾아 삼키면 사신수의 하나인 청룡보다 더 존귀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무룡이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 같던 대치 상태가 정혈단의 도박으로 변화가 생겼다. 정혈단이 실패하면 여의주가 무룡을 죽이고 자하괴독과 함께 승천할 거고, 정혈단이 성공하면 그다음은 누구도 예상 못 한다.
용 두 마리가 여의주 하나를 두고 다투는 일은 있었어도 여의주 둘이 용 하나를 두고 다투는 건 태고 이전에도 없었던 일이니까.
- 작가의말
과연 누구를 위한 변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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