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비와행
"갇힌 손님인가 가두는 주인인가?"
무룡은 갑자기 들린 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강호에서 아주 흙내가 풍길 정도로 뒹굴진 않았지만, 큰 사건을 거듭 겪으면서 마음이 단단한 편이다.
그런데 단지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에 소름이 끼쳤다.
'왜지?'
무룡은 주변을 경계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훨씬 큰 닭살이 온몸을 뒤덮었다.
'소리가 내 귀에서 생겼다.'
누군가가 무룡의 귀에 들어와서 외친 게 아니라면, 상대는 최소 음공에선 무룡이 쳐다보기 아득할 수준의 대단한 고수다.
그리고 하나를 남들보다 월등하게 익혀낸 사람은 다른 부분에서도 크게 부족하지 않다.
"둘 다 아닙니다. 제 발로 들어왔습니다."
무룡이 공손히 대답했다.
"들어올 줄 알면 나갈 줄도 알겠네?"
"진법의 틈을 찾는 거라면 당연히 압니다. 그런데 길은 모릅니다."
진법 안에서 안전하게 걸을 수 있지만, 나가는 길은 모른다.
"좋아. 제안 하나 하지."
'제안? 내가 왜 여기 왔는지 묻지도 않고?'
상대한테 느꼈던 두려움이 빠르게 사라졌다. 음공 혹은 무공이 대단할진 몰라도 사람 자체는 뛰어나게 여겨지지 않았다.
"여긴 감옥이다. 그리고 갇힌 사람은 딱 둘이지. 나랑 힘을 합쳐 남은 자를 죽이고 여길 탈출하자."
"왜 죽여야 합니까?"
"그자가 출구를 지키고 있으니까."
무룡은 들을수록 머리가 어지러운 느낌이었다.
"갇힌 자가 출구를 지킨다고요?"
"그래. 거기가 출구가 분명해. 몰래 거길 들어갔던 자들이 다신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몰래 들어갈 수 있으면 왜 죽여야 합니까?"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무룡은 이미 답을 알았다.
'날 미끼로 던지고 몰래 들어가려는 거구나.'
"같은 편이 되었는데 솔직히 얘기하지. 출구가 분명하다고 자신하지만, 안전한 길은 아닐 거다. 그러니 계속 드나들면서 위험을 제거하고 안전한 길을 찾아야 하는데, 놈이 그걸 방해해."
'이미 몇 번 드나들었구나. 지금은 미끼가 없어서 진입을 시도하지 못하는 거고.'
"대화로 풀면 안 됩니까?"
"내가 여길 온 지 이십 년이 되는데 그놈이 누구랑 대화하는 걸 들은 적 없고, 나보다 먼저 있던 사람도 마찬가지야."
"저는 의원 무룡이라고 합니다. 혈교 여러 가문의 전쟁에 휘말렸다가 목숨을 보전하려고 도망치는 중에 우연히 여길 발견하고 들어왔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한참 맴돌던 정적이 어렵게 깨졌다.
"혹시 강호에 아직도 비천각이 있는가?"
"제가 견문이 짧아 들은 적 없습니다."
"하긴. 내가 제자로 들어갔을 때 이미 몰락한 문파였지. 대공을 이뤄 문파를 다시 일으켜 세우나 했는데 영문도 모르고 여기 갇혔다."
무룡은 의문의 목소리가 말한 내용을 전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거짓도 아니라고 느꼈다.
"난 비천각 각주다. 황궁은 물론 삼대금지까지 마음대로 드나들던 강호 제일의 도둑이었지."
"삼대금지가 뭡니까?"
"삼대금지는 강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이야. 하나는 남해의 부유도浮遊島. 섬인데 배처럼 바다에 떠다녀. 바위로 이뤄진 섬이 떠다닐 정도로 바다가 사납기에 경공이 웬만큼 뛰어난 자도 익사하기에 십상이지. 하나는 남만南灣의 독림毒林. 거기에 세상의 어떤 독도 해독한다는 대단한 물건이 있지. 그리고 마지막은 현녀문玄女門. 들어간 자만 있고 나온 자는 없다는 대단한 문파지."
현녀문은 절검문, 오독교, 벽력문, 남화교와 더불어 오대비문으로 불리는 문파다. 여자만 있는 문파인데 어디에 있는지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알려진 게 없다.
절검문만 해도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하고, 남화교도 출입이 어렵지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다. 그러나 현녀문은 강호에 일절 알려진 바가 없다.
"셋 다 가봤다는 말입니까?"
무룡의 관심은 독림과 현녀문에 있었다. 독림의 기물이 혹시 자신의 독도 해결할 수 있을지 작은 기대가 있고, 현녀문은 무룡에게 꼭 필요한 환생환을 보유한 문파다.
"현녀문이 부유도에 있어. 그리고 부유도는 독림을 가로지르는 강을 흐르기도 하고."
'날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처음 등장이 놀라웠던 거에 비해 비천각 각주가 점점 하찮게 여겨졌다. 어지간히 심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무룡이 의심할 걸 대비하여 조심을 거듭할 텐데, 비천각주는 이미 자기 뜻대로 다 이뤄진 것처럼 굴었다.
자신의 속을 무룡이 훤히 들여다보는 것도 모르고.
그때. 무룡의 귀에 다른 전음이 울렸다.
- 마환기공을 익힌 걸 보니 마교 소속이구나.
무룡은 놀라움에 멈칫했다. 비천각주의 전음이 귓속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면, 이번 전음은 머리에 말을 새기는 느낌이었다.
"자네도 느꼈군. 저 음침하고 어두운 기운을."
"이제 뭘 합니까?"
무룡의 질문은 비천각주한테 던진 듯하지만, 실상은 또 다른 전음의 주인한테 하는 거였다.
"자네가 잠깐만 시선을 끌어주면 내가 요혈을 찔러 죽일 거야. 백팔 요혈 중 남은 마지막 하나거든."
비천각주의 전음과 동시에 또 다른 전음이 들려왔다.
- 놈이 하자는 대로 해. 이번에야말로 내가 바라던 기회다.
"당신을 어떻게 믿습니까?"
무룡의 말에 바로 대답이 들렸다.
"네가 들어왔던 곳은 입구다. 그대로 돌아간다고 밖으로 나갈 순 없다. 그러니 싫어도 내 말을 믿어야 해."
- 마교 교주 사마영이다. 네가 마교 사람이라면 내 말에 따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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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발치에 닿을 정도로 긴 괴한은 무룡의 주먹을 무시하고 작은 구멍으로 몸을 던지는 비천각주를 덮쳤다.
마지막 순간 무룡의 주먹이 멈췄고, 비천각주가 구멍으로 사라졌다.
"실팹니까?"
자신을 마교 교주라고 칭한 괴한이 고개를 저었다.
- 성공이다. 놈의 비급을 훔쳤다.
전음을 마친 괴한이 비급을 무룡에게 던져줬다.
- 읽어라. 난 눈이 안 보인다.
"눈이 멀쩡해 보입니다."
- 글자를 못 읽는다.
무룡은 괴한이 던진 비급의 표지를 확인했다.
응비도鷹飛圖.
칠신도록의 네 번째인 응비도의 비급이었다.
칠신도록은 전신도戰神圖·와행도蝸行圖·맹룡도猛龍圖·응비도鷹飛圖·경탄도鯨呑圖·호세도虎勢圖·허신도虛身圖의 일곱이다.
뒤에 여섯을 익혀야만 전신도에 입문할 수 있기에 전신도록이라고도 부른다.
무룡은 맹룡도와 호세도 그리고 허신도를 이미 익혔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못한 기회에 응비도를 얻자 명명 중에 하늘의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빨리 읽어.
"궁금한데, 말도 못 합니까?"
- 너 마교 사람 아니냐?
"독무곡 소속입니다."
"말하기 싫은 것뿐이다."
괴한의 목소리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추영과 추향이 시원한 목소리라면 괴한의 것은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졌다.
"전음보다 훨씬 듣기 좋습니다."
머리에 글을 새기는 듯한 전음은 왠지 불편했다. 무룡은 최대한 괴한을 설득해 육성으로 대화하고 싶었다.
"내가 광대라면 이 목소리가 참 좋겠지. 그런데 난 교주다."
"그럼 제가 봤던 건 사마월이겠군요."
무룡의 말에 괴한이 몸을 흠칫 떨었다.
"사마월의 정체가 탄로 났느냐?"
"그건 아닙니다. 검극이 당시 교주에게 사마월이냐고 질문한 걸 들어서 추측한 거고, 세간에는 전혀 소문이 없습니다."
"검극 그 꼬맹이가 아직도 살았어? 제멋대로여서 환갑 넘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사십여 년 전에 검극은 이미 천하제일을 논하는 고수였다. 그러나 강호라는 게 무공만 강하면 목숨을 부지하는 그런 만만한 곳이 아니다.
"은거해서 수련에만 몰두한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래. 뭐든 좋다. 설사 내가 사마영이 아니더라도 뭔 상관이냐. 어서 응비도를 읊어라."
무룡도 응비도의 내용이 궁금하던 차여서 남은 의문을 속에 집어넣고 비급을 읽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좋구나."
"뭐가 좋다는 겁니까?"
무룡이 느끼기엔 응비도의 재주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응비도는 내공의 절대적 정지를 이용하는 기술이다. 현재 모든 무공은 내공의 흐름을 이용해 위력을 내는 데 반해, 응비도는 내공을 움직이지 않는 거로 힘을 냈다.
"응비도만 익히면 경공에나 쓸 수 있겠지."
무룡은 고개를 끄덕여 사마영의 말에 동의했다. 몸이 허공을 날 때 내공을 멈추면 훨씬 빠르고 멀리 간다. 응비도를 익히지 않더라도 절정에 이른 고수라면 내공을 일시적으로 억제해 빠른 움직임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러나 와행도와 함께 익히면 다르다. 커다랗게 뭉쳐서 느리게 움직이면 그냥 가만히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경공뿐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와행도는 느리게 움직이는 것도 있지만, 단전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몇 개 혈도 사이에서 소순환을 이루는 뛰어난 재주다.
현재의 내공 심법 대부분이 단전을 시발점과 종착점으로 하여 모든 순환을 이룬다. 무룡이 익힌 자하신공도 수백 개 혈도를 거치지만, 단전에서 출발해 단전에서 끝난다.
그러나 와행도를 익히면 단전이 아닌 임의의 혈도에서 시작해 임의의 혈도에서 끝날 수 있다.
이는 반드시 단전을 경유해야 하는 한계를 벗어나 운기 경로를 간단히 그리고 효율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식이다.
"와행도를 익히려면 단전을 버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무룡의 말에 사마영이 혀를 찼다.
"범상한 놈은 아니라고 여겼는데, 모르는 게 없구나. 그래, 난 여기 갇힐 때 단전이 뽑혔다."
무룡의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파괴가 아니라 뽑혔다는 말입니까?"
"그래. 달리 생각나는 표현이 없구나."
"저도 단전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사마영이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무룡의 몸을 살폈다.
"마환기공이 괴이한 내공심법과 결합해 단전 없이도 운기할 수 있게 변했구나. 넌 참 운도 좋구나. 난 단전도 없이 이 안에서 몇 년이나 버티다가 어렵게 와행도를 배워 무공을 겨우 절반 회복했다."
"그래서 응비도가 필요했던 겁니까?"
"그래. 정보를 흘려 비천각주를 오게 했지. 그런데 놈이 하도 조심스러워서 이제야 응비도를 얻는구나."
비천각주는 무룡에게 말한 것처럼 영문도 모르고 잡혀 온 게 아니라 제 발로 들어온 거였다. 그리고 무룡은 교주 역시 비천각주처럼 자기 질문에 지나칠 정도로 성실하게 대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날 죽일 생각입니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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