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혈괴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
진법은 온갖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무룡을 괴롭혔지만, 그중에 불은 없었다. 너무 철저해서 혹시 누군가가 지켜보며 진법을 조종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심심하진 않은데.'
무룡은 한가한 생각을 떠올리며 천천히 굴렀다. 덕분이라고까지 하긴 뭐하지만, 진법의 다양한 공격으로 자환신공의 성취가 느리나마 꾸준히 늘었다.
"허, 이놈 봐라."
그러던 중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정확히는 전음이 귓속에 울렸다.
무룡은 몸을 빙글 돌려 시야를 확보했다. 한쪽 눈은 가까이만 보이고 한쪽 눈은 멀리만 보여서 시야가 흐릿하지만, 비천각주의 낭패한 모습을 확인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왠지 순순히 분다 했더니. 함정이었구나."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잖소."
"그렇다는 건 네놈도 함정임을 알고 갔다는 말이야? 너 혈교에 원하는 게 도대체 뭐야?"
무룡은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 이미 지하뇌옥에 이십 년을 갇혀 지낸 자이기에 현재 벌어진 일과 아무 연관도 없다.
"혈영살수가 내 가족을 공격했소. 무슨 속셈이고 누가 사주했는지 알아내려고 혈교로 들어왔소."
비천각주는 성큼성큼 다가와 무룡의 입에 검붉은 색의 환약을 수십 알 쏟아부었다.
"느리나 독성이 강한 약이다. 해약은 정기적으로 줄 테니 머리 굴리지 말고 진법의 틈을 찾아라."
비천각주는 용케 처음 만났을 때 무룡이 길은 몰라도 진법의 틈은 찾을 줄 안다던 말을 잊지 않았다.
"나라고 여기가 편한 줄 아시오?"
수련 효과만 보면 진법에서 몇 년이고 더 있고 싶은 마음이다. 원래대로라면 면면불식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이 며칠 안 됐지만, 응비도와 와행도를 배운 덕분에 한계가 사라졌다.
응비도로 특정 기운만 뭉쳐서 체내에 들이는 덕분에 내공이 마르지 않아 격렬한 싸움만 안 벌이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어 한가하게 여기서 자환신공을 수련하며 보낼 순 없다.
비천각주는 바로 무룡을 업고 걸었다. 진법에 관해 무룡보다 아는 게 많은지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선 전혀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틈이 안 보이느냐?"
"밖에서 길라잡이들 대화를 엿들었는데 일정 기간마다 이 주변의 틈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한다고 했소. 아무래도 바로 찾긴 어려울 거요."
비천각주는 무룡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지 더 추궁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러나 마냥 걷기 심심했던 무룡은 궁금하던 걸 질문하기로 했다.
"혈교 사람들은 지하뇌옥을 어떻게 드나드는 거요?"
"혈교에서도 지하뇌옥을 출입할 능력이 되는 사람은 몇 명 없다. 그리고 그자들이 다니는 길은 알아도 걸을 수 없다."
"어떤 길이오?"
"길이라고 했는데, 길은 아니다. 그리고 딱히 규칙도 없다. 아무도 주의하지 않는 사이에 어딘가에 불쑥 나타나고, 떠날 때도 순식간에 존재감이 사라졌다."
공간을 건너뛰는 건 천방기사도 시도할 엄두를 못 내는 대단한 법술이다. 혈교가 대단하다곤 하지만, 공간을 넘는 자가 여럿이 있다는 건 믿기 어렵다.
"그런데 놈들이 지하뇌옥을 오래 출입하지 않았다고 들었소."
"내가 오기 전까진 자주 방문하며 가끔 사람을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온 이후로는 음식과 물을 던져줄 뿐 모습을 드러낸 적 없다."
"이유가 뭐요?"
"노괴물 때문이지. 내가 갓 들어왔을 때 노괴물이 난동을 부린 적 있다."
"혈교 사람을 죽인 거요?"
"아니. 내 추측인데, 길을 부순 것 같다."
"혈교 사람이 다니는 길 말이오?"
"그래. 길 몇 개만 남기고 다 부쉈겠지. 혈교 놈들은 나타날 위치와 사라질 위치가 한정되니까 드나들기 겁났을 거야. 노괴물 손에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때 비천각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차라리 지하뇌옥으로 돌아가는 건 어떻소?"
무룡의 말에 비천각주가 걸음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높은 경지 덕분에 내공의 힘으로 버티는 무룡과 달리, 비천각주는 아직 육신의 한계를 벗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이 흐르면 진법의 틈을 발견하더라도 허기 때문에 아사할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데 넌 여기 남아야겠다."
비천각주는 무룡을 바닥에 내동댕이친 다음 경공을 펼쳐 떠났다. 예상대로 비천각주는 다시 동굴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무룡의 예상과 달리 혼자서 돌아갔다.
'이유가 뭐지?'
무룡은 반나절을 고민하고 나서야 꽤 그럴듯한 추론을 얻었다.
비천각주는 와행도를 노리고 지하뇌옥에 침투했다. 그러나 진법 안에서 걸을 때 혈교의 중심부를 목표로 했던 걸 보면 와행도가 유일한 목표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혈교의 지하뇌옥이 강호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천각주가 정확히 찾아온 걸 보면 사전에 조사를 꽤 엄밀히 했을 것이다.
사전에 조사했다면 지하뇌옥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 텐데 서슴없이 들어왔다는 건 나갈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사마영은 합리적인 사람이다.'
사마영은 강호에 전해지는 것처럼 살인을 즐기고 쾌락에 묻힌 마두가 아니다. 기분이 나쁘다고 음식과 물을 공급하는 혈교 사람의 출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비천각주가 도망 못 치게 하려고 난동을 부린 거다.'
비천각과 혈교는 모종의 연결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 비천각주는 혈교 사람들이 지하뇌옥을 드나드는 방법을 알 것이다. 그저 길이 어디 있는지 모를 뿐.
이젠 사마영이 사라졌으니 혈교 사람들이 다시 지하뇌옥에 출입할지도 모른다. 비천각주는 아마 기척을 숨긴 채 혈교 사람들이 드나드는 걸 지켜본 뒤 길을 찾아 밖으로 벗어날 생각일 것이다.
혈교 사람들이 다니는 길로 진법을 바로 벗어날 수 있다고 가정하면 비천각주가 무룡을 버린 이유가 통한다.
'그럼 내가 할 일도 확실하구나.'
무룡은 비천각주가 먹인 독을 내공으로 꽁꽁 감싸 보호했다. 그렇지 않으면 독룡유가 흡수해서 독룡담의 자하괴독에게 음식으로 바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무룡은 내공으로 감싼 독을 입으로 뱉었다. 무룡이 뱉은 독은 밧줄에 닿자마자 뿌연 연기를 피워 올렸다.
비천각주의 으름장과 달리 무룡이 먹은 독은 별로 강하지 않아 밧줄을 다 녹이기엔 한참 부족했다. 그러나 밧줄을 약하게 하여 무룡이 힘으로 끊게 하는 큰 역할을 했다.
일부 끊긴 밧줄은 몸부림만으로 헐렁해졌다. 오랜만에 육신의 자유를 얻은 무룡은 제자리 뜀질을 하며 몸을 점검했다.
그리고 경각성을 잔뜩 높였다. 사마영의 은신술을 간파할 정도로 예민한 감각이지만, 방심하다가 비천각주의 기습에 당하기도 했다. 방심은 무인의 최대의 적이라던 노혼의 가르침을 다시 새기며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해 만전을 가했다.
무룡은 지하뇌옥에 접근할 때 써먹었던 방법으로 걸었다. 그러나 올 때는 땅 위에서 걸었기에 제한이 없었는데, 현재는 땅굴이어서 자주 막혔다.
그래서 거리는 훨씬 가까운데 지하뇌옥에 돌아가기까지 시간은 몇 배 더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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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 아는 걸 다 털어라."
무룡은 기척을 죽인 채 대화를 엿들었다.
"저도 혈교의 뿌리에서 나온 한 가지입니다. 아는 건 다 털어놨으니 제발 그만 괴롭히."
비천각주는 비명을 지르느라 말을 맺지 못했다.
"처음부터 다시 말한다. 아까랑 다르면 고통을 가할 것이고, 아까랑 똑같아도 고통을 가할 것이다."
이미 말했던 걸 그대로 말하고, 말 안 한 걸 더 털어놓으라는 뜻이다.
"저는 혈교 비천각의 각주 천영입니다. 우린 중원의 정보를 수집하고 유용한 지식을 모아 혈교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약 백 년 전부터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는 각주가 된 다음 기밀 자료를 보고 혈교와 비천각의 관계를 알았고, 지하뇌옥의 존재를 알았습니다. 그때 강호에 은밀히 와행심법에 관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구체적으로 뭔지 모르지만, 응비심법과 결합하면 천하무적을 이룰 수 있는 무공이라고 적혀 있었기에 저는 여기로 왔습니다."
비천각주는 주저리주저리 자기 사정을 늘어놓았다.
"여전히 성실하지 않군."
비천각주는 매번 똑같은 말을 반복했고, 신문하는 사내는 마음에 안 든다며 고문을 지속했다. 그렇게 수십 번 반복하고서야 비천각주가 항복했다.
"불사혈괴不死血怪의 전설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피만 있으면 영원히 안 죽는다고 들었습니다."
"아는 바를 다 말해."
"자신의 피를 버리고 젊은 피를 몸에 넣어 영생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단 부작용이 있어 용모가 흉측하게 변한다고 했습니다. 저야 원래부터 용모가 흉측하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생한다면 수많은 무공을 익혀 천하제일의 고수가 될 수 있으니 용모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래도?"
비천각주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이번 건 고통이 아닌 경악에 찬 비명이었다.
"살려주십시오. 살고 싶습니다."
"불사혈괴가 되고 싶진 않고?"
"그, 그게."
'얼마나 흉측하길래.'
비천각주가 고문을 당한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무룡이 도착한 후부터 세도 오십 번은 넘었다.
그렇게 성격이 모진 비천각주가 용모 때문에 포기할 정도라면 도대체 얼마나 흉측할지 궁금했다.
"원한다면 너도 나처럼 만들어줄 수 있다."
"아닙니다. 저같이 하찮은 자가 어찌 감히 넘보겠습니까."
"그런데 접문摺門에 관한 건 어디서 봤지?"
"비천각의 기밀문서에 적혀 있습니다. 제가 본 기밀문서에 적힌 내용 대부분은 중원의 것보다 혈교에 관한 게 많습니다."
무룡은 비천각의 기밀문서에 흥미가 생겼다. 다름이 아니라 현녀문이나 독림에 관한 정보도 거기에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이만 죽어라."
"아닙니다. 살려주십시오. 비천각의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세상의 비밀이 많이 있습니다."
"필요 없다."
"기린산 세 번째 봉우리에 있습니다. 밤이면 하얗게 보이는 바위를 옮기면 입구가 나옵니다. 그다음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관과 진법이 복잡한데,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가 죽기 전에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린 남화교이지 혈교가 아니다. 그리고 우린 남화교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다. 비천각에 천하의 재물이 다 있다고 해도 우리한텐 쓰레기나 다름없다."
무룡은 은밀히 고개를 내밀었다. 축 처진 비천각주의 몸뚱이와 바닥을 뒹구는 머리가 보였고, 천으로 꽁꽁 싸맨 자그마한 자가 허공에 문을 만들어 떠나는 모습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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