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봉육걸
자하동을 나와 옥녀봉으로 향하는 무룡의 귓가엔 여동빈이 마지막에 남긴 말이 계속 맴돌았다.
"네가 여의주를 삼켜 봉인한 바람에 이룡이 미쳐 날뛸 것이다. 정확히 오늘부터 구백 일 뒤에 깨어나 다시는 잠들지 않는다. 그날이 오기까지 공원파를 제대로 익혀 놈의 악행을 저지하여라."
도움을 줄 수 없냐는 무룡의 질문에 여동빈은 이렇게 대답했다.
"헤아리기도 힘든 많은 생명이 놈의 독에 죽겠지만, 그래도 세상이 망할 정도는 아니다. 우리가 개입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신선과 요괴 중에는 하계가 망해버렸으면 하는 놈들도 있다. 여의주의 봉인을 헤쳐 자하동이 생기게 한 것도 놈들의 짓이다."
인간에게 신선은 악한 자를 벌하고 선한 자를 돕는 존재로 전해졌다. 그러나 여동빈의 말을 들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굳이 멀리 안 가고 여동빈만 보더라도 치졸한 면이 없지 않았다.
'머리 복잡하게 굴릴 거 없다. 추영과 아이를 구하는 게 먼저다.'
무룡은 잡념을 훌훌 털어버리고 정기관에 있는 장문인의 처소에 몰래 들어갔다.
"사형, 무사하셨군요."
얼굴을 확인한 청우가 검자루에서 손을 떼며 눈물을 글썽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무룡은 자하신공 십 단계를 이루고 호세도와 맹룡도도 손발 다루듯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청우도 놀고만 있지 않았는지 무룡의 기척을 감지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장문 사제, 시간이 별로 없으니 요건만 말하겠네."
무룡은 구백 일 뒤에 마교의 영역에서 이룡이 날뛸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줬다. 무룡에겐 간단한 정보지만, 청우라면 화산파에 유용하게 써먹을 것이고 이룡을 처치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생각을 떠올릴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사형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무공을 익혀 놈을 처치하는 일에 손을 보탤 생각이오."
"제게 꾀가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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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청우 덕분에 무룡은 훨씬 홀가분한 마음으로 화산을 떠났다. 이제 여동빈이 만든 문파인 절검문에 가서 공원파를 익혀 이룡을 죽이면 모든 게 끝난다.
구백 일의 기한 안에 공원파를 익혀낼지는 무룡에게 달렸기에 어려운 일임을 알면서도 마음은 편했다.
항거할 수 없는 외력에 휘둘릴 필요 없이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결과가 바뀔 수 있으니까.
품에서 큰 산과 강 그리고 도시가 모두 표기된 지도를 꺼낸 무룡은 잠깐 고민했다.
장안으로 가서 배를 두 번 갈아타면 형주에 도착한다. 그런데 시간이 이레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되고, 원하는 배가 없으면 더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빠른 대신 돌아가는 길이어서 중도에 노선을 바꾸기 어렵다.
장안으로 안 가고 바로 달리면 나흘 정도에 형주에 도착할 수 있다. 문제는 나흘 내내 쉬지 않고 달려야 하는데, 자하동에서 거의 잠을 자지 못한 무룡이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여의주를 경계한 마환기공이 대부분 기운을 끌어다 단전 주변 혈도들에 배치하여 순환하고 있기에 무룡이 쓸 수 있는 내공도 한 갑자에 조금 못 미친다.
한 갑자만 돼도 어디에서 손색하지 않는 내공이지만, 단전이 없어 맹룡도로 기운을 움직여야 하는 무룡이기에 반 갑자 정도 효과밖에 없다.
'하루 정도 쉬더라도 닷새다. 배를 안 타고 달린다.'
무룡은 화산에서 형주 방향으로 곧게 가기로 했다. 어차피 장강만 찾으면 형주를 못 찾을 리 없기에 편한 마음으로 방향을 정하고 달렸다.
황하와 장강 사이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 무척이나 많았다. 기왕이면 장강 혹은 황하와 가까운 곳에 사는 게 훨씬 풍족하기 때문도 있고, 초목이 무성하여 산짐승이 많기에 그걸 먹는 맹수도 득실거리기 때문이다.
다행히 본능이 뛰어난 맹수들이 알아서 무룡을 피했기에 발걸음을 지체하거나 하진 않았다.
'쉬고 싶다.'
무룡은 약 여든 번째로 떠오른 생각을 탄압했다. 육체적인 피로가 아닌 정신의 피로기에 의지로 이겨낼 수 있다고 여겼고, 실제로 정말 한 걸음도 더 못 갈 것 같은 상황을 수십 번 극복해 여전히 달리고 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는 게 순리다. 피곤하면 하품이 나오고 힘들면 쉬는 게 정상이다.
그러한 것을 거스를 땐 아닌 때보다 사고가 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무룡은 마환기공을 극성으로 익혔기에 산사태와 같은 천재지변이 아닌 사람의 손에 해를 입을 가능성이 아주 미약하다.
마교 교주와 검극 모두 세세겁화봉 근처에 있기에 중원 무림에서 걱정해야 할 상대는 없는 셈이다.
그러나 무력의 형태는 고작 한둘이 아니다. 몰려오는 졸음과 피로감을 이겨내는 데 정신이 팔린 무룡은 그만 진법에 들어갔다.
갑자기 변한 풍경에 화들짝 놀란 무룡은 자신이 진법에 갇혔음을 알아챘다. 그리고 천환서고에서 얻은 수많은 지식으로 빚은 지혜 덕분에 해가 뜨면 사라질 인위적이고 불안정한 진법임을 알아챘다.
엎드린 김에 절이라고, 무룡은 그간 미루고 미뤘던 잠을 자기로 했다. 괜히 진법을 나간답시고 부산을 떨며 정신력을 소모하기보단 폭 자두는 게 백 번 남는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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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은 오래 자지 못했다. 조급함이 마음 구석에 콕 자리를 잡고 쉬는 무룡을 수시로 콕콕 찔러댔다.
채 두 시진도 못 자고 일어난 무룡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전부 고수인가?'
자신이 푹 곯아떨어진 건 생각 안 하고 기척도 없이 나타난 사람들이 절세의 고수라고 의심했다. 잠이 덜 깬 것도 있고, 머릿속에 온통 공원파를 배워 이룡을 처리하여 추영과 아이를 구할 생각뿐이어서 예전보다 훨씬 둔해진 탓도 있었다.
"깼다.","깼네.","깼구나."
무룡은 눈을 비비는 척하며 몰래 얼굴을 꼬집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니 꿈은 절대 아니었다.
무룡을 둘러싼 사람은 총 다섯이다. 그리고 약 삼 장 거리에 아이 한 명이 기절한 채 쓰러져 있었다. 숨이 가쁘지 않은 걸 보면 부상은 없는 듯했다.
수염이 하얗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얼핏 어디 학당에서 어린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호통을 칠 법한 외모인데, 현재 자신의 키와 비슷한 장검을 여인의 어깨에 얹고 있다.
시장통에 가면 볼 법한 우람한 체격의 여인. 키는 남자 기준으로 보통에 해당하지만, 몸집이 정말 컸다. 날이 시퍼렇게 선 소 잡을 때 쓰는 도축용 칼을 어떤 남자의 가슴에 대고 있었다.
과거 보러 갔다가 시험을 제대로 못 보고 낙심하여 옷도 안 갈아입은 채 고향에 돌아온 듯한 누추한 차림의 남자. 외모가 꽤 수려하여 뭇 여인들의 사모를 한 몸에 받을 것 같았다.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우람한 여인의 몸과 마음을 훔친 다음 돈까지 훔쳐 장안으로 과거 보러 가는 비용을 장만하지 않았나 공상을 펼칠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 수려한 외모의 남자는 현재 비수처럼 날을 세운 접은 부채를 건장한 사내의 명치에 대고 있다.
장비가 다시 태어난 게 아닌지 의심할 법한 무식한 인상의 사내. 그러나 무식하게 생긴 얼굴과 안 어울리게 몸매는 늘씬했다.
어깨가 넓고 가슴이 두꺼우며 허리가 잘록하다. 키에 비해 다리가 긴 편이고 팔도 길다. 전형적인 장사의 체격이다.
그걸 증명하려는 것인지 족히 서른 근은 넘어 보이는 낭아봉과 비슷하게 가시가 가득한 무기로 노파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
어떻게 보아도 노파로 보이나 얼굴에 주름이 거의 없는 여인. 그래도 세월이 공평하여 젊은 시절의 미모를 앗아간 듯 여겨진다. 만약 저대로 서른 살만 젊어진다면 강호의 청년준걸들이 속앓이를 꽤 할지도 모른다.
노파는 은색 비녀로 노인의 태양혈을 겨누고 있었다.
"뭡니까?"
"재촉하지 마. 어차피 다 말해줄 거니까."
노인이 고함을 질렀다. 나이 먹으면 느긋해진다는 말이 무색한 광경이었다.
"멍청한 늙은이. 뭐냐고 묻는 게 왜 재촉이냐? 이런 상황에 뭐냐고 안 물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지."
노파의 꾸중에 노인은 대꾸를 못 했다. 태양혈을 비녀로 겨눈 장본인이기에 감히 비위를 거스르기 힘들었다.
부채를 든 서생 차림의 남자가 대신 입을 열었다.
"저희는 용봉육걸龍鳳六傑이라고 합니다."
강호의 소문에 어두운 무룡이기에 침착한 얼굴을 유지했다. 만약 강호 지식이 풍부한 손청우였다면 깜짝 놀라며 검부터 뽑았을 것이다.
용봉육걸은 독과 암기를 비롯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자들이다. 사실 본인들만 호걸 걸자를 쓰고 남은 사람들은 거지 걸乞자를 쓴다.
"저희가 최근에 운 좋게 귀한 책을 하나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누가 소유할지를 토론하다가 이렇게 얼굴을 붉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가 맞는다고 우기는데, 방관자인 과객(過客 - 지나가는 손님)께서 시비를 가려주기 바랍니다."
그새 잠이 깨며 무룡의 머리가 영활하게 돌아갔다. 마환기공 덕분에 몸은 멀쩡하지만, 무룡의 새 옷엔 병장기 자국이 몇 개 보였다.
강호 경험이 얕아 어느 자국이 누구의 무기인지 확실히 구분하기 어렵지만, 자칫 다섯 모두가 무룡을 죽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룡은 이런 사소한 일로 지체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추영과 아이를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것도 있고, 이룡이 날뛰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지 모른다.
자신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음을 통감한 무룡은 어떻게든 공원파를 익혀서 이룡과 싸울 생각뿐이었다.
"집안일에 외인이 함부로 끼어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 이만 가겠습니다."
"못 갑니다."
서생의 말은 협박이나 강요처럼 들리지 않았다.
"문제가 있습니까?"
"진법을 깨려면 저희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그제야 무룡은 현재 상황을 이해했다. 이들은 한 권의 책을 두고 다투고 있음에도 서로 해치지 못하고 있다. 다섯 중 하나라도 없어지면 진법에 영원히 갇힐지도 모른다.
"절로 사라질 진법이라고 여겼는데 아니었군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원래는 밤새 맹수를 막아줄 그런 진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이 손을 하나씩 써서 진법이 변했습니다. 어딜 어떻게 만졌는지 모르기에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무룡은 마환기공이 있기에 진법을 잘못 건드려 폭주하더라도 걱정이 덜하다. 그러나 혹시나 다치거나 더 확실히 갇힐 가능성에 대비하여 이들의 문제점을 해결해주고 안전하게 나가기로 했다.
"우선 어떤 책인지 알고 싶습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의술서야. 의원인 내게 꼭 맞는 책이지."
노파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약초를 다루는 책이다. 약제사인 내가 가져야 한다."
서생이 부드럽게 웃었다.
"상고시대의 글자로 적혔습니다. 무식한 저들은 읽지도 못하는 책입니다. 절세의 보검을 전장에서 적의 목을 베는 장수가 아닌 삼척동자의 손에 쥐여줘야 쓰겠습니까?"
도축용 칼을 든 여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내 차례다. 이번에 얻은 물건은 내 거다."
무룡은 고개를 돌려 건장한 사내를 바라봤다.
"그냥, 갖고 싶어."
건장한 사내를 빼고 모두 꽤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냥 같이 보면 안 됩니까?"
다섯 모두 입을 꾹 다물고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글을 읽는 사람은 한 명뿐이잖아요."
"보는 사람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책이야."
노인의 말에 다른 넷이 눈을 매섭게 치켜올렸다. 내공을 듬뿍 실어 내리쳐도 꿈쩍도 안 하는 고수 상대로 자신들이 얻은 게 얼마나 대단한 책인지를 누설한 노인의 목을 바로 베고 싶은 걸 모두 억지로 참았다.
"그럼 저분이 갖는 게 맞는 듯합니다. 어차피 남은 분들은 책의 내용을 못 읽잖습니까."
서생의 얼굴에 득의의 빛이 잠깐 머물다 사라졌다.
"넌 황금 열 근을 주웠는데 쓸 일이 없다고 남한테 양보하니?"
노파의 말에 무룡은 말문이 막혔다. 물욕이 별로 없는 무룡이기에 정말 필요한 사람에게 양보할 마음이 충분히 있지만, 절대다수의 사람은 딱히 쓸 일이 없더라도 황금을 양보하진 않는다.
- 작가의말
혹시 연재가 끊기면 제 vpn이 끊긴 겁니다. 오늘 vpn 연결이 되게 불안하네요. 이 글 올리는 사이 몇 번이나 연결이 끊겨서 재연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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