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왕회동
무공에는 공수탈인空手奪刃이라는 초식이 있다. 이는 빈손으로 상대의 무기를 빼앗는 걸 이르는 말이다.
추영은 마중구문의 최대 무기가 뭘지 고민했고, 추향에게 들은 금고가 떠올랐다. 고작 하수인 하나가 그렇게 많은 재물을 보유할 정도면, 마중구문이 얼마나 부유할지 유추할 수 있다.
"이미 열 곳이 넘게 털렸습니다. 빨리 조치하지 않으면 힘겹게 모은 세력이 흩어집니다."
암중 세력의 하수인 중에 구왕이 있다. 각자 세상을 이루는 큰 축 하나씩 담당한 것으로, 현재 발언하는 건 추향에게 금고를 털린 상왕이었다.
그리고 상왕의 편을 드는 건 군대를 맡은 군왕軍王과 산적과 수적 및 대규모 상단을 맡은 마왕馬王이 있었다.
군왕은 어렵게 포섭한 군벌들이 연이어 죽어 나가면서 입지가 줄었고, 마왕 역시 마찬가지다. 난세가 되면 산적과 수적이 창궐하기 마련인데, 마교의 백만이 넘은 무리가 휩쓸고 지나면 숨 쉬는 입 하나 남지 않았다.
본인들도 필요에 따라 약탈을 서슴지 않지만, 마교는 기본적으로 일하지 않고 재물을 축적하는 자를 멸시한다.
"난 모두의 의견에 따르겠소."
병왕兵王은 철로 된 무기와 농장기의 제작 및 유통을 책임진다. 물론, 유통에는 상왕의 밑에 있는 표국들이 움직이지만, 어디에 얼마를 보낼지는 병왕이 책임진다.
원래는 야왕冶王으로 불렸는데, 마음에 안 든다고 병왕으로 바꿨다.
병왕 입장에선 마교 역시 훌륭한 고객이기에 무조건 상왕의 뜻에 따라 적대하긴 힘들었다.
"윗선에서 지시가 없소?"
유왕儒王이 고개를 저었다. 선비의 무리를 규합한 유왕은 얼핏 가장 약한 듯 보이나 실질적으로 구왕의 우두머리다.
이들이 붓을 놀려 무지한 백성을 현혹하면 검은 것도 희게 되고 사슴이 말이 된다.
태평성세에도 붓의 위력은 여실하나, 난세인 지금은 더하다. 부르기 쉬운 동요 따위를 만들어 민간에 널리 퍼뜨리면 그거로 왕이 바뀌고 다음 황제가 바뀐다.
"어렵게 경영한 강산이 다 무너지게 생겼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오?"
상왕이 발을 구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나 본데, 사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윗분들에게 소꿉장난일 뿐이오."
유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는 둘밖에 없었다. 남은 자들은 천하를 경영하는 일이 어찌 소꿉장난이냐고 강하게 반발했다.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부터 그분들을 모셨소. 그분들의 뜻은 고작 중원이 아니라 더 큰 곳에 있소.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당금의 사태는 우리 손에 있는 자원으로만 해결해야 하오."
상왕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마교의 백만 대군은 이미 혈교 영역으로 갔다. 문제는 이기든 지든 마교가 다시 세세겁화봉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미 한 차례 홍역을 치렀는데, 돌아가는 길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다.
혈교와 큰 전투를 벌이고 흥분한 마교 무리가 더 포악한 모습을 보일 게 자명한 일이니까.
회의는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자칭 아홉 왕은 하나씩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무왕武王과 도왕盜王은 마지막까지 남았다.
"특별 지시라는 게 뭐요?"
무왕은 강호에 큰 영향력이 있고 도왕은 온갖 시정잡배를 부릴 수 있다. 사람이나 물건을 찾는 데 있어 이 둘이 손을 잡으면 세상 누구보다 확실하다.
"나도 이해는 잘 안 가는데, 오행의 기운을 품은 짐승을 찾으라고 했소."
유왕과 달리 무왕과 도왕은 바로 알아들었다.
"새끼인지 성체인지 요구가 없소? 그리고 품은 기운은 얼마나 강해야 하오?"
"일단 닥치는 대로 잡아서 마왕에게 맡기면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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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영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촉씨 가문이 소식을 보낸 덕분에 추향 일행이 무사함을 알았고, 아미파의 문제도 추향이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마교가 혈교의 영역에 침입했다는 정보도 받았다. 아직 진법에 진입하진 않았으나 사마영이 호언장담한 걸 생각하면 혈교를 지우는 건 그냥 시간문제다.
"뭔가 걸리는 겁니까?"
당백호를 따르는 자들은 이대로면 제국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 하나같이 들떴다. 추영의 지시는 어긋남 하나 없이 실행되었고 대부분 만족할 만한 결과를 보였다.
"놈들의 대응이 문제다. 발버둥은 있어도 조직적인 반격은 아직 없었다. 저토록 치밀한 조직이 이렇게 대응이 없는 게 정녕 이상하지 않으냐?"
그제야 들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놈들에겐 천하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 그게 뭔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걸 모르면 이 싸움의 끝에 우린 패배자로 남을 것 같구나."
그때 오지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했다.
"조금 이상한 정보긴 하지만, 거슬리는 게 있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뭐지?"
"정의연이 갑자기 사람을 풀어 영물을 찾는다고 합니다. 저는 그저 영물의 내단으로 무공을 증진하는 방법을 찾아낸 게 아닌가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는데, 태후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보니 조금 달리 보입니다."
오지열은 당백호한테서 호국공護國公의 칭호를 얻었다. 실질적인 관직은 아니지만, 제帝와 왕王 다음으로 쳐주는 공公이다.
이는 대대손손 자랑거리로 남길 수 있는 큰 명예다. 왕조가 바뀌더라도 충신의 후손은 함부로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법이니까.
"조사는 어떻게 되었지?"
추향이 보낸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정의연을 만든 남궁세가가 암중 세력의 하수인이었고, 종남파와 더불어 장안 근처의 큰 문파였던 화산 역시 암중 세력의 하수인이었다.
소위 강호로 불리는 무림은 주로 동부와 강남에 집중됐다. 관과 군의 세력이 강하면 문파가 자리를 잡는 데 불편함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산파나 종남파는 강호에 영향력이 강한 문파가 아니다. 그러나 실력으로만 따지면 종남파는 열 손가락 안에 들고 화산파도 스무 손가락 안엔 여유 있게 들었다.
지금에야 실력도 명성도 부족하지만, 화진악이 장문일 때만 해도 화산의 위세는 꽤 대단했다. 그런 화산이 암중 세력의 하수인이었다니.
그리고 화진악이 도망치면서 백 명에 가까운 화산 고수를 대동했다. 그런 자들을 일거에 없앤 세력이 늘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쓸모를 다한 사냥개를 암중 세력이 팽한 듯하다.
"오랜 문파일수록 통째로 넘어간 경향이 강하고, 새롭게 부상한 문파는 수뇌부가 모르고 암중 세력의 조종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더 확실히 피아를 구분하려면 교차 검증이 필요한데,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추영은 정의연에 아직도 연줄이 남은 오지열에게 조사를 지시했고, 오지열은 갖은 수단을 다해 정의연 위주로 강호의 문파들을 조사했다.
아주 확실치는 않지만, 뜬금없는 행동을 일삼은 문파들을 가려냈고 일차 분류 작업은 끝냈다.
그러나 제한된 정보로 내린 결론이어서 전혀 자신할 수 없었다.
"적을 과대평가해서 두려워하면 안 되지만, 과소평가해서 얕보고 방심하는 건 더 큰 문제다. 일단 놈들이 영물을 찾는 게 현재 상황을 일거에 뒤집을 묘수라고 생각하고 정보를 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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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와 화무룡은 별을 보며 방위를 정한 다음 열심히 노를 저었다.
"비라도 퍼부었으면 좋겠다."
사마귀가 아는 게 많다지만, 바다에 나온 건 처음이다. 게다가 추영처럼 책의 지식을 자기 것처럼 쓰는 재능도 부족해 온갖 실수를 저질렀다.
거기에 말린 화무룡 역시 진짜 죽는 거 빼면 다 겪어봤다고 해도 될 정도로 고생했다.
그렇게 고생하며 둘은 수십 년을 알고 지낸 친우처럼 스스럼없는 사이가 됐다.
"저기, 저기서 하루 보내자."
지름이 열 장 정도로 보이는 바위섬이 있었다. 둘은 열심히 노를 저어 배를 섬에 갖다 댔다.
"여기에 묶으면 안 보일 거야."
배를 안 들키게 숨긴 다음, 여전히 마음이 안 놓여 바다에서 해조를 건져 배 위에 덮었다. 그리고 둘 역시 적당한 곳을 찾아 숨었다.
"태산파 도사가 아닌 자들도 우릴 쫓기 시작했다."
나무를 잘라 배를 만든 다음 방위를 판단해 중원에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많은 배가 바다에 나타났다.
둘은 자신들이 만든 배에 큰 바위를 매달아 가라앉힌 다음 잠수해서 큰 배에 올라 숨었다.
둘 다 강호에 보기 드문 수준의 고수이기에 몸 하나 숨기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런데 이놈의 배들은 도무지 바다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물과 음식도 전문적으로 공급해주는 배가 있었다.
섬이든 육지든 배가 정박하길 기다리던 둘에겐 정말 허탈한 일이었다.
그래서 음식과 물을 공급하는 배에 침투해 숨었는데, 육지가 아닌 섬에 둘을 데려갔다.
"마중구문의 목적은 뭘까?"
섬에는 바다에 뜬 백 척이 훌쩍 넘은 배를 지휘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 수뇌부엔 태산파 도사도 있었지만, 태산파가 아닌 게 분명한 자들이 훨씬 많았다.
"갑자기 왜?"
"중원을 제 주머니 속 물건처럼 취급하는 세력인데 전혀 안 알려진 것도 우습잖아. 그리고 그 섬만 봐. 쌓인 재물이 중원의 모든 사람을 몇 년 먹여 살려도 될 정도야."
둘은 그 많은 배가 자신들을 찾아다니는 거란 정보를 입수한 후, 고심 끝에 작은 배를 훔쳐서 도망쳤다.
놈들은 둘이 나무로 뗏목 정도를 만들어 움직일 거로 예상하고 해류의 영향까지 고려해 수색 범위를 정했다. 놈들이 수색 범위를 넓히거나 바꾸기 전에 서쪽으로 직진하면 중원에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확실히 수상쩍구나. 그리고 우릴 이토록 찾아다니는 것도 그래."
태산파가 마중구문의 수하 혹은 몸통이라는 정보가 지금처럼 수백 척의 배에 수만 명이나 되는 인력을 투입해서 지켜야 할 정도로 대단한지 의문이다.
"놈들의 목표가 우리한테 있다면?"
"우리한테 뭐 있나? 네 백변검이 보물이라고 하지만, 무결검을 익힌 게 아니면 차라리 자신한테 꼭 맞는 검을 드는 게 낫지."
일반 무인은 초식에 검을 맞추는 게 아니라 검에 초식을 맞춘다. 초식의 위력을 극대화하려는 발상으로 창안한 무결검법만 백변검이 필요하다.
"난 절대 아니니까 네가 분명하다."
사마귀는 몸에 지닌 물건을 모조리 꺼내서 쭉 진열했다.
'탐낼 만한 물건이 전혀 없는데? 설마 난화봉이 마중구문의 수뇌인가?'
- 작가의말
적의 무기를 빼앗아 내 무기로 쓰면 내가 강해지는 동시에 적이 약해집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공수탈인은 최고의 재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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