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대란
황궁 비고에 도착했을 때 일행은 채 스무 명도 안 남았다. 청룡대는 오지열만 남았고 당백호와 추영을 지키던 시녀도 몇 명 사라졌다.
일행을 따라온 무인 중에서도 목숨을 부지한 자가 없었다.
당백호가 기관을 건드려 비고의 문을 열었다. 날짜에 따라 기관이 작동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모르는 자는 기관의 위치를 알아도 열기 힘들다.
"큰일이다."
초췌한 몰골의 천방기사가 일행을 맞이했다.
"남은 여덟 개 진법도 이미 발동됐다."
까마귀가 떠난 후 천방기사 혼자서 어떻게 해보려다가 남은 진법들도 더 빨리 발동했다. 정말 타고난 사고뭉치가 아닐 수 없었다.
"장안성만 해도 이미 이십만이나 죽었어. 다 내 탓이다."
괴물의 강함을 생각하면 이십만밖에 안 죽은 게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핵의 위치는 어딥니까?"
무룡의 담백한 질문에 천방기사도 정신을 차렸다.
"장안을 인간의 몸으로 생각하고 이 비고를 단전이라고 여기면 진법의 핵은 심해혈深海穴 위치다."
심해혈은 실제로 존재하는 혈도가 아닌 무룡과 천방기사가 만든 가상의 혈도다.
내공 심법을 대성한 후 더 깊은 성취를 보려면 가상의 혈도를 만들고 운기 경로를 바꾸는 수련을 해야 한다. 무턱대고 바꾸는 건 효과가 없기에 가상의 혈도를 어떤 위치에 만들고 어떤 성질로 설정할지가 매우 중요하다.
심해혈은 그렇게 만든 수십 개 혈도 중 하나다.
무룡은 검을 뽑아 손에 잡은 다음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감각이 느리게 퍼지며 점점 많은 걸 듣고 느끼게 되었다.
괴물이 움직일 때 내는 거친 마찰음이나 인간의 비명은 지웠다. 담벼락이 무너지는 소리나 피가 모여 흐르는 소리도 지웠다. 하늘을 원망하는 악다구니나 제발 살려달라는 애원도 지웠다.
점점 넓어진 감각에 천방기사가 말한 핵이 잡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진법의 핵이 세 개나 되었다. 무룡의 능력으론 하나만 부술 수 있다.
'하나는 봉인, 하나는 소환, 하나는 조화.'
조화를 담당한 핵을 찾아 부숴야 한다. 강력한 힘을 품은 핵이 저리 가까이 붙어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조화를 담당한 핵이 부서지면 남은 두 핵이 서로 싸우다가 공멸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무룡의 능력으론 도저히 어느 핵을 부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빠, 하루 지났어. 서둘러."
겨우 몇 가지 고민을 떠올린 것 같은데 어느새 하루가 지났다. 그러나 무룡은 조급함을 버리고 계속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 세 개의 핵 중 하나가 갑자기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공원파.'
무룡의 검에 빛 망울이 맺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간 성취가 늘어 몸을 다른 공간에 넣지 않고도 공원파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공원파에 맞은 진법의 핵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가자."
당백호가 기절한 무룡을 둘러업었다. 청람이 앞장서고 추영과 추향은 당백호를 지켰다. 시녀들이 중간에 서고 오지열은 천방기사와 함께 가장 뒤에 섰다.
비고를 벗어나고 채 몇 걸음 못 갔는데 비고 건물이 폴싹 무너졌다.
"뭡니까?"
궁금증이 도진 오지열이 천방기사에게 질문했다.
"무룡 아우가 진법에서 조화를 담당한 핵을 부쉈다. 남은 두 핵이 힘 싸움하는 바람에 건물이 무너진 거다. 곧 지진도 올 거야."
일행이 황궁을 벗어났을 때 땅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가장 약한 시녀들도 지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빠르게 성 밖으로 달렸다.
"역시 절검문이야."
앞에서 길을 열던 청람이 뜬금없이 외쳤다.
"저건 무슨 말입니까?"
"형주의 절검문이 진법을 파훼했다. 덕분에 무룡 아우가 어느 핵을 부술지 알아낸 거고. 근데 넌 누구냐?"
"같은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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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문검은 검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서문문검의 주변엔 수백 명 무인이 가부좌를 틀고 내공심법을 돌리고 있었다.
괴물과 싸우고 진법을 파훼하는 과정에 내상을 입은 절검문과 서문세가 무인들이다.
'놈들이 크게 당황했겠지?'
역천진을 만든 놈들이 때아니게 발동한 진법 때문에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하니 조금은 통쾌했다.
비록 형주도 삼십만 명 이상 사람이 죽었지만, 만약 놈들의 계획대로 됐다면 중원은 물론이고 천하의 모든 사람이 죽었을지도 모른다.
"장안도 끝났습니다. 무룡이라는 자의 소행으로 보인답니다."
조화의 핵이 사라지고 봉인의 핵과 소환의 핵이 싸우다가 반나절 만에 공멸했다. 덕분에 장안 역시 해결됐다.
"다른 곳은?"
"낙양은 몰살입니다."
서문문검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여의주 문제를 해결하고 이젠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법 문제는 서문문검이 아니라 훨씬 뒤의 절검문주가 고민할 일이다.
그런데 천방기사라는 중뿔난 놈 때문에 서문문검의 대에서 사고가 터졌다.
일견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수련할 시간이 다 사라진 걸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낙양엔 요괴와 마물이 생기겠군. 봉인진을 통과할 방법을 빨리 찾아서 마물과 요괴의 숫자를 조절해야 한다."
소환된 청동괴가 진법 안의 인간을 다 죽이면 요괴와 마물이 생긴다. 진법의 보호를 받으며 번성한 요괴와 마물은 강력한 힘을 키운 다음 진법을 찢고 세상에 나온다.
그러니 요괴와 마물이 번성하지 못하게 정기적으로 들어가서 숫자를 줄여야 한다. 그래야 자기들끼리 잡아먹으며 점점 강해지지 못한다.
"큰일입니다. 대도는 봉인진이 박살 났다고 합니다."
봉인진이 박살 나고 소환진만 남으면 계속 청동괴를 소환해 세상에 내보낸다.
"제녕도 몰살입니다."
"천성도 몰살입니다."
서주, 양주, 파중, 오해 역시 몰살이었다.
아홉 개의 역천진 중에서 둘이 파훼되고 여섯은 요괴와 마물의 낙원이 되었다. 그리고 가장 북쪽의 대도는 땅의 기운이 다할 때까지 괴물을 뽑아내다 진법이 사라질 것이다.
청동괴는 그나마 상대하기 편하니 몰살당한 곳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다.
"세가 연합이 무룡에게 당한 게 크구나."
문파 연합은 대부분 산에 자리를 잡았기에 진법 범위 밖이다. 대도시에 자리를 잡은 세가 연합이 힘을 썼어야 했는데, 무룡의 손에 수천 명이 죽으면서 쇠락한 바람에 결국 청동괴에게 모두 죽고 말았다.
"놈들이 모습을 드러낼까요?"
서문문검이 고개를 흔들었다.
"성공이면 몰라도 실패했는데 꼬리를 보일 리 없지. 그리고 놈들이 꼬리를 드러내도 우린 잡을 여력이 없다. 관리해야 할 곳이 여섯 개나 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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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동안 기절해 있던 무룡이 드디어 깼다.
천방기사는 자신이 그간 알아낸 바를 무룡에게 설명했다.
대도에선 봉인진이 깨지며 청동괴가 천하로 퍼졌고, 무려 여섯 개 대도시의 인간이 모두 죽었다는 말에 무룡도 마음이 아팠다.
"절검문과 벽력문이 봉인진에 틈을 만들 방법을 찾아냈다고 한다. 아우, 이 모자란 형을 도와줘."
"미안합니다. 공력을 전부 잃었습니다."
공원파로 진법의 핵을 부순 무룡은 그간 힘들게 모은 내공을 전부 잃었다.
"공원파를 펼치지 못하면 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입니다."
천방기사는 손을 뻗어 무룡의 완맥을 잡았다. 작은 힘으로도 심맥에 내공을 전달해 심장을 멈출 수 있는 위험한 곳임에도 무룡은 순순히 잡혀줬다.
"혈도가 굳어버렸어."
혈도가 굳은 바람에 무룡의 몸은 기운을 모을 수 없었다. 이젠 마환기공도 순양공도 없는 무룡은 그저 힘이 조금 센 평범한 인간이다.
"혈도가 멀쩡하다고 해도 더는 내 부군을 혹사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도와달라는 말을 다신 꺼내지 마세요."
추영이 나서자 천방기사도 고분고분 물러났다.
"천하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당백호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질문했다. 추향은 마음이 약한 동생이 조금 걱정되었다.
"아홉 도시는 용맥이 순환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중 여섯이 막혔으니 재해가 끊이지 않겠지. 게다가 수많은 권력자가 사라졌으니 당분간은 야만의 세상이 될 거다."
"제가 나서서 수습해야겠습니다."
당백호가 무룡과 추영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 이젠 상대가 인간뿐이 아니라 괴물도 있는데. 그리고 인간뿐이라고 하자. 군대를 만들려면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하는데, 그 많은 재물은 어떻게 얻을 거야?"
추향의 말에 당백호는 침울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을 못 했다.
"제가 돕겠습니다."
오지열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차피 천하가 혼란에 빠지고 수십 개 지역에 군벌이 난립하는 건 피할 수 없는 흐름입니다. 그러나 큰 군대를 만들지 못하는 건 누구나 같은 입장입니다. 천하의 재부가 반 이상 아홉 도시에 모여 있으니깐요."
당백호는 몸을 돌려 오지열의 말에 집중했다.
"폐하께선 명분이 있습니다. 이제 힘만 있으면 됩니다. 충성심이 가득한 수백 명 무인만 있으면 군벌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말을 안 들으면 죽이면 됩니다."
추향이 손뼉을 치며 좋은 생각이라고 찬성했다.
"보기보다 똑똑하네. 각 지역 군벌에겐 옥새를 찍은 친서를 보내 지위를 보장해 주고, 말을 안 들으면 죽여버리고. 어차피 황제가 돼서 호의호식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천하의 혼란을 최대한 잠재우려는 거라면 이게 딱 맞는 방법인데?"
오지열은 자기 생각을 바로 간파한 추향에게 진심으로 탄복했다.
'차라리 둘이 성별이 바뀌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태평성세엔 당백호처럼 어진 황제가 좋으나 지금 같은 난세엔 추향이 훨씬 낫다.
"수백 명 무인은 또 어찌 양성할 것이오?"
"마교가 있지 않습니까."
외삼촌이 마교 소교주고 어머니가 성녀다. 아버지는 독무곡 곡주다. 여기서 자질이 괜찮은 사람을 뽑아 알맞은 무공을 익히게 하면 몇 년 안에 오지열이 말한 숫자를 채울 수 있다.
"그러려면 일단 독무곡에 가야겠구나."
그렇게 일행은 독무곡으로 가게 되었고, 천방기사만 죄책감을 못 이겨 절검문을 찾아가 요괴와 마물을 줄이는 일에 손을 보탰다.
장안은 겨우 만 명도 안 되는 사람이 운 좋게 살아남았다. 문무백관이 모두 죽었고 황제와 황후도 사라졌다. 폐황태후 역시 괴물의 발톱에 찢긴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바야흐로 난세가 되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고, 주먹보다 칼이 셌다. 조정의 지원이 끊긴 군대는 도적이 되었고 관도 지방 토착 세력과 손잡고 백성들을 착취했다.
북방은 청동괴 때문에 피가 마르는 날이 없고, 남방은 인간끼리 다투느라 칼부림이 멈추는 날이 없었다.
그사이 무룡은 천륜지락을 마음껏 누렸다.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자식에게 주면서 부모의 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꼈고, 무공에 일취월장하는 당백호나 학문에 재미를 붙인 추향 덕분에 커다란 즐거움도 느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무룡에겐 즐거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1부 완결.
- 작가의말
1부 완결입니다. 2부는 반드시 이 게시판에 이어서 연재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어차피 글이 막혀서 연재를 중단한 게 아니라 접속 불량으로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건강이 나빠져서 내린 결정이니깐요.
그럼 최대한 빨리 복귀하길 바라며 잠시 쉬겠습니다. 2부는 그간 비축분을 쌓으며 더 빠른 연재를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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