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괴독
검첨이 잘게 흔들리며 하얀 꽃 세 송이를 피운다. 태청검법의 절초 농매삼문弄梅三問이다. 안으론 정精·기氣·신神이 조화를 이뤄야 하고 밖으론 심心·지志·체體가 일치해야 겨우 펼칠 수 있는 초식이다.
"아들, 참 대단하구나."
다른 사람을 볼 때는 차갑고 매서운 눈이지만, 화무룡을 바라볼 땐 봄볕보다 따스하다. 화무룡은 홍조 띤 얼굴로 겸양의 말을 뱉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아니다. 약관도 안 된 나이에 벌써 내 성취를 따라잡았구나. 장하다."
늘 엄한 눈빛이던 화진악 역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 벽파검법에도 진전을 얻었습니다. 한 번 보여드릴까요?"
"그래, 그러자꾸나."
화진악과 초민향이 자애롭게 웃는다. 신이 난 화무룡은 노도박안의 초식을 펼쳐 자신의 성취를 마음껏 자랑했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장하구나."
칭찬에 우쭐한 화무룡이 벽파검법의 다른 초식도 멋지게 풀어냈다.
"이건 어떻습니까?"
손으로 뭔가 잡은 모습을 한 무룡이 허공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러더니 환한 미소를 지으며 또 벽파검법의 초식을 펼쳤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자하동엔 독이 있다. 채 반 시진도 안 되어 옷과 죽검을 부식하여 사라지게 한 걸 보면 녹록한 놈이 아니다. 그러나 검과 가죽이 무사했던 걸 생각하면 성질이 괴이할 뿐 독성은 약한 편이다.
진실은 치명적이지 않으나 아예 무해한 독도 아니라는 것이다. 독에 장시간 노출된 무룡은 자신을 화무룡이라고 착각하며 환각을 보았다.
무룡이 있지도 않은 검을 손에 잡고 온갖 상상 속의 초식을 펼치며 자화자찬하는 모습을 말리거나 걱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노혼 역시 독에 중독되어 환각을 보고 있었다.
"천하제일이 되고 나니 허무하구나."
아내와 아들의 무덤 앞에서 노혼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때 내가 네 말을 듣고 협의행에 나가지 않았으면 너희 모자가 그렇게 죽진 않았을 텐데."
환상속에서 노혼은 자하신공을 대성하고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그리고 협의행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요절한 아들과 자결한 아내의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제사를 지냈다.
"아버지. 왜 거기에 그러고 계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노혼은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려보니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소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아버지 아들 무룡입니다. 어찌 매일 얼굴 맞대고 사는 아들을 못 알아보시는 겁니까?"
"그럼 네 어미는?"
"왜 저한테 물으시는 겁니까? 어머니에 관해 한 번도 말씀해주신 적 없잖아요."
노혼은 고개를 돌려 묘를 바라봤다. 방금까지 크고 작은 묘가 함께 있었는데 어느새 작은 묘가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가 제 어머니 묘입니까? 도대체 어머니가 뭘 잘못해서 여태껏 절 한 번도 데려오지 않은 겁니까?"
"미안하구나. 이 아비가 죄인이다. 잘못한 건 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노혼이 묘 앞에 쓰러져서 펑펑 울었다. 반듯하게 자란 아들은 묘에 술을 붓고 정성 들여 절을 올렸다.
가슴이 미어터졌다.
"이십여 년 전이었다. 변방에 반란이 크게 일어 천하가 어지러웠다. 화산의 일반 제자였던 난 장문인이 벽파검법을 전수한다는 말에 홀려 협의행에 참가했다. 그리고 육 년이 지나서야 화산으로 돌아왔고 그때 네 어미는 이미 죽고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을 겁니다. 저도 정진하여 어머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겠습니다."
"기특하구나."
노혼은 아내의 묘 앞에서 아들을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아들아, 이 아비가 자하신공을 가르쳐 주겠다."
총명한 아들은 노혼이 말하는 구결을 채 절반도 듣지 않고 다 암기했다고 말했다. 의심하는 노혼에게 아들은 구결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창하게 외웠고 수련 방법까지 정확히 말했다.
"네 자질이 나를 한참 능가했구나. 어서 수련하거라."
아들이 가부좌를 틀고 자하신공을 수련했다. 품은바 공력이 약하긴 하지만, 수련 자체는 처음 하는 사람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여 차질이 전혀 없었다.
"네 총명은 내가 일찍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대단하나 혈도의 단련이 부족하구나. 내가 추궁과혈로 도울 테니 수련을 잠깐 멈추거라."
노혼은 추궁과혈로 아들의 혈도를 강하게 단련했다. 단전은 감히 만질 엄두가 나지 않았고 남은 이백사십이 개 혈도는 남김없이 강화했다.
"우선 수련하고 있어라. 네가 일정 경지에 이르면 그때 다시 추궁과혈로 돕겠다."
노혼은 아내의 묘 앞에서 아들과 함께 수련에 매진했다. 아내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지 가끔 죽은 쥐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리고 근처에 마침 작은 샘도 있어 마실 물도 해결했다.
'내게 더 강해질 여지가 있었다니.'
즐겁게 수련에 매진하다 보니 새로운 경지가 눈앞에 닥쳤다. 노혼은 신중하고 세밀하게 기를 통제하며 단전을 포함한 이백사십삼 개 혈도를 하나로 이으려 애썼다.
일기관통一氣貫通.
혈도들이 이어졌다. 단전에서 출발한 기의 줄기는 끊이지 않고 이백사십이 개의 혈도를 거쳐 단전에 돌아왔다.
예전에는 기의 덩어리를 던져 모든 혈도를 지나 돌아온 후 다시 기의 덩어리를 던지는 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면면부절 하나로 이어졌다.
이백사십삼 개의 혈도 모두에 기가 있고 기가 흘렀다.
노혼은 더듬더듬 얼굴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눈을 떴다. 열 걸음 떨어진 곳에 무룡이 자하신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자하신공을 대성하며 독을 물리친 덕분에 환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간 보았던 게 전부 환상이었음도 깨달았다.
"아버지. 제가 먹보인가 봅니다. 또 배가 출출합니다."
무룡이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혼의 눈에서 또 눈물이 쏟아졌다. 자식 얼굴도 보지 못하고 보낸 한 때문에 제자를 받기 싫어했다. 무룡 역시 사부인 전대 장문인의 엄명이 아니었으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자신 손에서 자라서인지 제자 역시 음침한 구석이 보였고 사람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늘 사부를 공경하고 받들었지만, 저렇게 친근한 얼굴은 몇 번 보여주지 않았다.
'군사부일체. 내가 저 아이의 아버지고 저 아이가 바로 내 아들이다.'
마음을 굳힌 노혼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무룡아, 이 아비가 곧 먹을 걸 구해오마."
천장으로 오른 노혼은 손으로 작은 내공 덩어리를 뽑아냈다. 내공 덩어리는 꽤 강한 열기를 발산했다.
약 두 시진 뒤에 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협의행 때 큰 부상으로 누워 있으며 발견한 사실이다. 뱀은 눈이 장식인지 죽은 지 오랜 쥐나 개구리는 그냥 지나쳤다.
그 후 호기심으로 뱀을 지켜봤고, 놈이 뜨거운 물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걸 먹고 있어라. 이 아비는 잠시 어디 다녀올 데가 있다."
노혼은 경공을 펼쳐 이름 모를 계곡과 통한 문에 다가갔다.
'마지막 희망이다. 제발.'
자하신공의 공력으로 밀자 바랐던 대로 문이 열렸다.
'하늘이 나와 무룡을 버리지 않았구나.'
밖으로 나간 노혼은 문을 닫은 후 은밀히 움직였다.
악가장은 불타 사라졌고 조가장과 주가장 그리고 왕가장은 주인이 바뀌었다. 노혼은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옥녀봉에 있는 정기관正氣觀으로 갔다.
마침 화진악이 제자들을 이끌고 강호로 나가서 정기관엔 인기척이 드물었다.
화진악의 거처로 몰래 숨어든 노혼은 바닥과 벽에 내공을 흘렸다. 그리고 벽에서 울림이 크게 생기는 곳을 찾았다.
벽에 걸린 선인지로의 그림을 떼고 내공을 흘리니 작은 문이 열렸다. 자하동처럼 자하신공을 익힌 사람만 열 수 있게 설계된 기관이었다.
안엔 책 세 권이 있었다. 하나는 자하신공의 비급이고 하나는 태청심법의 비급이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자하괴독이라는 이름의 책이었다.
'다행이다.'
환각 속에서 무룡을 자기 자식이라고 착각할 때는 뭘 해도 그렇게 기특해 보였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냉정하게 판단하니 무룡이 자하신공을 대성하여 독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태생적으로 단전이 약하게 태어난 무룡이다. 아무리 남은 혈도들을 단련해도 기의 출발점이자 종점인 단전이 큰 힘을 운용하지 못하면 진전이 느릴 수밖에 없고, 언제 한계에 부딪혀 평생 같은 경지에 머무를지 모른다.
노혼은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화진악의 거처를 찾았고 다행히 원하는 것을 얻었다.
- 자하괴독은 자하신공이 일 단계에 이르면 절로 해독된다.
책에는 화씨 가문의 선조가 자하신공을 얻은 경위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노혼은 자신이 겨우 자하신공의 첫 단계를 이뤘음을 깨달았다.
- 자하신공 일 단계 이전의 사람에겐 환각만 보게 하지만, 그 후엔 몸을 해치는 독이 된다. 그러니 꼭 자하단을 넉넉히 준비하여 자하동에 들어가야 하며 미간에 붉은 점이 생기면 바로 자하동을 떠나야 한다.
노혼은 빠르게 종이를 넘겼다.
- 자하신공을 운용하면 벽에 새 글자가 보일 것이다. 사람에 따라 글자가 다름을 거듭 확인했고, 다른 사람의 구결로 수련하면 해가 된다.
같은 수련을 해도 사람마다 성취가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르게 수련한 자하신공을 운기 하여 생긴 노을로 벽을 비추면 다른 글자가 보인다.
- 자하신공은 일곱 번째 단계까지 확인했다. 그러나 칠 단계에 성공한 사람이 없어 여덟 번째 단계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노혼은 빠르게 종이를 넘겨 자하단을 만드는 처방을 확인했다. 비싼 약초는 없지만, 구하기 힘든 재료가 몇 가지나 보였다.
'도둑질 좀 해야겠구나.'
정기관을 나온 노혼은 세 장원에 들러 옷과 은자를 훔쳐 장안으로 향했다.
'자하단에 들어가는 약재만 사면 화진악에게 들킬지도 모른다.'
노혼은 은자를 다른 물건 사는 데 쓰고 약초는 훔치기로 했다.
- 작가의말
제가 자하동에 들어갔다면 아마 의자왕이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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