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류성하
전투가 끝나고 하얀 옷을 입은 자들이 전장에 투입됐다. 부상으로 숨만 붙어 있는 거동이 힘든 아군을 구하고 주검을 수거하는 하얀 까마귀 부대다.
물론, 목숨이 간당간당한 적군을 발견하면 작은 비수를 숨통에 꽂는 임무도 있고 보검이나 비싼 물건을 먼저 주워야 하는 임무도 있다.
그러나 오늘 마교 측 까마귀 부대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전장에서 거물이 발견된 탓이다.
경공이 뛰어난 자가 후문영을 업고 남은 자들은 빙 둘러싸 엄호했다. 하얀 까마귀를 투입한 후엔 전투를 쉬기로 했지만, 그 대상이 후문영과 같은 거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다행히 마교 고수들이 빠르게 마중 나와 상대는 추격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후 장로가 왜 저곳에 있은 것이냐?"
세세겁화봉에서 교주를 모시고 있어야 할 후문영이 갑자기 전장에 나타난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독무곡 곡주께 얼른 보내라."
그런데 하필이면 가류가 약을 조제하는 중요한 과정을 완성하러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제가 살피겠습니다."
무룡이 나섰다.
"그대는 누군가?"
"독무곡의 대제자입니다."
그간 무룡의 치료를 받은 무사도 많아 신분은 금세 확인되었다.
"그런데 자네 왠지 낯이 익은데?"
칼질로 엉망인 얼굴이지만, 오관의 위치까지 달라진 건 아니다. 후문영의 수하는 무룡을 알아보진 못했으나 익숙한 느낌을 받아 신분을 의심했다.
"그런 소리 많이 듣습니다. 덩치가 큰 사람은 체형과 얼굴이 대체로 비슷하거든요."
"목소리도."
"이 새끼 지금 제정신이야? 장로께서 쓰러져 있는데 의원 붙잡고 뭐 하는 짓이야!"
"괜찮습니다. 어차피 침이 준비가 안 됐거든요. 그리고 후 장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사부 밑에서 십 년 배웠습니다."
무룡을 의심하던 후 장로의 수하가 뒤로 물러났다.
삼 년여 전에 후문영과 함께 바다에 가서 무룡을 본 적이 있다. 덩치도 말투도 목소리도 비슷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작 삼 년 만에 독무곡의 대제자가 된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더구나 상대는 단전을 다친 사람답지 않게 건강했고 목소리에도 중기가 충만했다.
"다들 나가주세요."
무룡은 약물에 담갔던 침을 손가락을 집고 사람들을 쫓아냈다.
천막 안에 후문영과 단둘이 남자 무룡은 바로 손을 썼다. 침을 약물에 담근 사이에 자세히 살폈기에 거침이 없었다.
침 다섯 개를 심맥에 속한 다섯 혈도에 꽂은 무룡은 후문영의 코밑에 향이 강한 독을 발랐다.
혼절해 있던 후문영이 번쩍 눈을 떴다.
"무슨 독에 중독되었는지 아십니까? 그리고 독 외에 혹시 다른 상처가 있습니까? 외상은 안 보이지만, 내부 어딘가가 큰 타격을 받은 듯합니다."
"살아있었어."
후문영이 퀭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날 알아봤구나.'
무룡은 진심으로 후문영을 치료하고 싶었다.
후문영의 목숨을 살린 다음 왜 사부를 죽였냐고 질책하고, 원망과 저주의 말을 한가득 쏟은 다음 다시 죽일 계획이다.
그런데 후문영의 상처가 너무 엄중했다. 후문영은 독에 중독된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중수법으로 유추하는 수법에 당해 내부가 심하게 다쳤다.
무룡은 부득이하게 후문영을 깨워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가류였다면 배를 째고 다친 부위를 찾아 치료하는 거로 후문영을 살렸을지도 모른다. 일반인이라면 배를 째고 깁는 고통만으로도 죽어버리겠지만, 후문영 정도 고수라면 치료를 받고 살 가능성이 팔 할 이상이다.
그러나 무룡은 그럴 능력이 없다. 그래도 직접 자기 손으로 후문영의 숨을 끊기 위해 어떻게든 살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후문영이 자신을 알아보는 듯해 보이자 바로 죽이기로 했다.
"얼마나 외롭고 분통하셨을까."
독침을 잡은 손이 멈췄다.
"하나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후문영은 미망이 가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화산에서 왜 노혼을 죽였습니까?"
후문영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한 무룡은 속에 오랜 기간 묻어뒀던 질문을 끄집어내 던졌다. 단지 질문한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했다.
"명에 따른 것뿐이야. 자하신공을 익힌 자는 모조리 죽이라는 명에 따른 거야."
'진짜 날 못 알아봤구나.'
후문영은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성녀는 어디 있습니까?"
"성화전에 있지. 작은 장원에 갇혀서 밖을 못 나가. 가엾은 아이."
고분고분 대답하던 후문영이 갑자기 울컥 피를 토했다. 무룡은 황급히 독침을 후문영의 심장에 꽂았다.
'넌 내 손에 죽어야 해.'
그대로 둬도 죽는다. 그러면 영원히 복수를 이룰 수 없다. 무룡이 아무리 대단한 의술을 익히더라도 죽은 사람을 되살려서 다시 죽일 순 없다.
그래서 깊이 생각지 않고 바로 독침을 심장에 꽂았다.
"컥. 너, 넌!"
심장에 독침이 꽂힌 후문영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한눈에 무룡을 알아봤다.
"없어. 성화령이 없어. 소교주께 전해."
말을 마친 후문영이 검은 피를 토하며 숨을 거뒀다. 죽으면서도 걱정이 남았는지 부릅뜬 눈엔 미련이 한가득했다.
무룡은 후문영의 심장에 꽂은 독침을 뽑아 숨기고 격동한 마음을 진정한 후에야 밖으로 나갔다.
"후 장로는 돌아가셨습니다."
아까 무룡을 의심하던 자가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왜? 왜 죽었어!"
"깨워서 어디를 공격당했는지 질문했는데 대답을 안 하고 그대로 죽었습니다."
"알아듣게 말해. 날 설득 못 하면 오늘 네가 죽을 거야."
그때 허공을 가르는 채찍 소리가 울렸다.
"누가 감히 독무곡 제자의 목숨을 노리는 거지?"
가류가 등장했다. 왜소한 키에 다리 하나가 이상하게 뒤틀리고 얼굴과 목에 커다란 혹이 붙은 가류의 모습에 대부분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후 장로가 죽었습니다."
가류는 바로 경공을 펼쳐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해부를 해도 되겠는가?"
가류의 질문에 후문영의 수하들이 망설였다.
"내 제자가 잘못해서 죽은 건지 아니면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었는지 확실히 가려야 하지 않겠는가?"
"저희가 먼저 살펴도 되겠습니까?"
가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후 몇 걸음 물러났다.
"심장. 심장에 침 자국이 있어. 아깐 없었거든."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난 눈으로 무룡을 쏘아봤다.
"방금도 말했지만, 어딜 공격당했는지 물으려고 심맥을 자극해 깨웠습니다."
"그걸 왜 묻는 건데?"
"독은 눈가림이고, 후 장로는 내가 중수법에 당했습니다. 제 재주가 얕아 다친 곳이 어딘지 몰라 깨워서 질문했습니다."
후문영의 수하들이 이마를 맞대고 상의했다.
"좋소. 해부하여 정확한 사인을 밝히시오. 다른 상처가 있다면 우리가 무릎을 꿇고 사죄할 것이고, 저 의원이 실수해서 죽은 거라면 후씨 가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가류가 침통에 꽂힌 가늘고 긴 침을 뽑아 내공을 담았다. 그러곤 침을 비수처럼 움직여 후문영의 배를 갈랐다.
"허!"
후문영의 창자가 수십 가닥으로 끊어졌다. 그러나 몸을 뒤집어 등을 살펴도 자국 하나 없었다.
"검극劍極이 온 건가?"
천하에 작은 흔적 하나 안 남기고 내부만 타격할 수 있는 무인은 둘밖에 없다. 하나는 중원 제일의 고수인 검극이고 하나는 마교 교주다.
"독으로 흔적을 없앴을 수도 있소. 그리고 작은 벽력탄을 삼키게 해서 터뜨려도 비슷한 모습이 보일 것이오. 물론, 이건 벽력탄으로 한 짓이 아니오."
가류는 후문영의 피를 두 병 가득 담았다.
"난 돌아가서 후 장로가 무슨 독에 당했는지 알아내겠소. 만약 외부에 남은 흔적을 지우려고 독을 쓴 거였다면 검극은 아니오."
가류는 후문영의 죽음을 밝힌다는 이유로 다시 독무곡에 돌아갔다. 그러나 약을 조제하는 일에 이틀 동안 몰두하고 나오니 병이 어느새 사라졌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후문영 개인에게 호감도 있고 후문영의 가문도 두렵다. 예전이라면 후문영의 가문이 협박해도 코웃음을 쳤겠지만, 약을 만들 재료를 다 모은 지금은 아니다.
괜히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한껏 굴렸다.
그때 무룡이 나타났다.
"사흘 전투를 쉬기로 했습니다."
후문영의 죽음으로 마교와 정의연은 며칠 동안 싸우지 않기로 했다.
"누가 피를 담은 병을 훔쳐 갔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흔적을 없애는 독을 발견했다고 하십시오."
"왜지?"
"그런 독이 없다면 흉수는 천하에 둘밖에 없습니다."
"검극과 교주."
"알려지지 않은 자가 더 있을지 모르지만, 누구든 우선 둘을 떠올릴 겁니다. 그러나 검극이라면 굳이 독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 교주가?"
"그걸 노리고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후 장로가 검극에게 당한 후 교주가 의심받을까 봐 일부러 독을 삼켰을 수도 있습니다."
가류는 머리가 아팠다.
"간단하게 말해."
"흔적을 지우는 독이 있다고 말하면 제삼자가 검극 혹은 교주를 흉수로 몰아가려고 꾸민 흉계가 됩니다. 아마 마교도 중원 무림도 아닌 제삼의 세력이겠죠. 그렇게 되면 제삼자를 경계한 마교와 중원 무림이 전쟁을 멈출지도 모릅니다."
전쟁이 멈추면 부상자가 안 생기고, 부상자가 없으면 약을 조제할 시간이 넉넉해진다.
가류는 무룡의 의견을 받아들여 후문영의 가문에 흔적을 없애는 독을 발견했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무룡의 추측은 절반만 들어맞았다. 마교와 정의연은 무룡의 말대로 결국엔 전쟁을 멈췄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크게 붙었다.
죽은 자만 삼천 명에 달하고 부상자는 이만을 훌쩍 넘었다. 마교 쪽만 센 숫자이니 정의연의 피해까지 합치면 훨씬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건강을 잃었다.
덕분에 가류의 화가 더 커졌다. 무룡의 말대로 전쟁이 멈춘 건 좋은데 치료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최소 달포는 독무곡으로 돌아갈 틈도 안 생길 것 같았다.
그래서 채찍을 잡는 일이 잦아졌고, 무룡이 가류의 명을 받고 독무곡에 갔을 땐 다른 제자들이 화를 당했다.
그렇게 무룡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두세 명씩 죽어가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예전 같으면 그냥 독무곡을 뛰쳐나가거나 자신만은 가류의 채찍을 피해갔으면 하던 제자들이 하나로 뭉쳐 대안을 연구했다.
"지금 사형과 같이 만드는 게 엄청난 독약이라고 하던데."
"먹으면 죽겠지?"
"그랬으면 좋겠지만, 죽으려고 먹는 게 아니라면 살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어?"
"거기에 뭔가를 탄다면?"
이들은 대담하게 대화했다. 어차피 가류한테 잘 보이려고 고자질을 할 멍청이는 없다. 공을 세워 가류를 가까이에서 모시면 오히려 채찍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커진다.
"사형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까?"
"사형은 내가 설득할게."
- 작가의말
꽤 중요한 초반 캐릭터로 보이던 화산파 장문인 화진악 - 의문사
격산타우를 펼치며 두드러지던 주씨 가문의 가주 주만통 - 반란에 실패하고 허무하게 죽음주인공을 고수로 이끌어줄 캐릭터로 보이던 노혼 - 장렬히 희생그냥 영약 셔틀 역할로 여겨지던 천노 -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활약하여 똥을 잔뜩 뿌리고 다니다가 고환을 잃은 고통을 품은 채 사망주인공이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하던 상대인 후문영 - 의문스러운 말을 남긴 채 의문사이들이 죽은 이유 - 주인공보다 더 높은 출연료를 요구함자본주의가 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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