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전성시
무룡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여긴 길라잡이는, 무룡의 안내를 끝낸 후 올리는 보고에 좋은 얘기를 잔뜩 섞었다.
그게 무룡을 방해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노 신의. 제 처방을 잠깐 봐주십시오."
난씨 가문의 장원에 줄을 길게 선 환자를 돌려보내고 숨 좀 돌리려고 하니 바로 동료 의원들이 들러붙었다.
"제 침술 수법을 보고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해독 순서에 관해 의문이 있습니다."
"내상을 다스릴 때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난씨 가문의 의원들은 교주 자리를 차지한 미씨 가문의 의원들보다 수준이 떨어진다. 그리고 미씨 가문의 의원들은 또 중원의 의원들보다 수준이 떨어진다.
그리고 무룡은 발가락으로 진맥해도 중원의 대부분 의원보다 훨씬 잘 진단할 수 있다.
고작 반나절도 안 걸려 난씨 가문의 모든 의원이 무룡을 신의로 칭송하며 굽신거렸고, 길라잡이가 크게 낸 소문에 난치병이나 뭔지도 모르는 괴질을 앓는 자들이 난씨 가문의 장원을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더 많은 부족의 지지를 받는다고 반드시 교주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많은 지지를 받는 쪽이 교주가 되는 경우가 훨씬 흔했다.
난씨 가문은 뜻밖의 호재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어려운 환자만 무룡에게 배당했다.
그 때문에 쉬는 시간에 남화교가 이번 음모에 어디까지 어떻게 개입됐고, 어떤 배후가 있는지 조사하려던 무룡의 계획은 시작도 전에 아스라이 사그라졌다.
'무리 생활을 할 때 평판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었지.'
무룡은 화산파에 있을 때는 노혼하고 따로 살았고 화무룡하고만 마음을 터놓고 얘기했다. 독무곡에 있을 때부터 어려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억지로 다른 사람과 어울렸다.
독무곡 출신은 대부분 정상적이지 않은 성격과 사고방식을 보유했다. 그래서 무룡이 무리 생활을 하는 요령을 쌓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차 한 잔 마시면서 함께 얘기합시다."
무룡은 소교주나 덕구 등이 술자리에서 해준 얘기들을 떠올리며 동료 의원들과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생각 없이 오가는 대화 중에 중요한 단서가 나올지도 모른다. 일부 아무 곳에서나 입을 터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은 친근하게 생각하는 상대 앞에서만 경계심을 풀고 속에 든 말을 꺼낸다.
동료 의원들의 질문에 적절히 대답해주고 늦은 밤이 되어 자려는데, 불청객이 불쑥 찾아왔다.
난씨 가문의 소가주 난청응蘭靑鷹이었다.
"화봉 이모의 편지를 받아봤습니다. 노 선생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난화봉은 늦둥이여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난청응에게 이모 소리를 듣는다.
"과찬입니다."
"며칠 지켜본 바로는 화봉 이모가 칭찬에 무척 인색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난청응의 재치 넘치는 덕담에 무룡이 피식 웃었다.
"저를 믿는 겁니까?"
난청응이 난처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모양입니다."
"권문세가나 부호의 집에 가면 늘 이랬습니다. 괜히 치료도 못 하고 나쁜 소문만 퍼질까 봐 의원한테 솔직하게 다 털어놓지 않습니다."
"결국엔 다 털어놓았고, 노 선생이 해결했으니까 오늘 인연이 이뤄진 것이겠지요?"
"제가 입도 무거운 편입니다."
난청응은 조금 고민하다가 결심을 내린 듯 눈을 빛냈다.
"당분간은 저와 노 선생만 아는 거로 하죠."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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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의 일과에는 난치병 환자 치료와 동료 의원들에게 조언하는 외에 또 하나가 추가됐다. 바로 난씨 가문의 직계 혈통 모두의 피에 흐르는 독을 분석하고 해독하는 일이다.
'그냥 독이 아니다.'
독은 분류하는 방법에 따라 생물生物독과 고물固物독으로 나눌 수 있다. 고물독은 광물이나 짐승의 뼈 혹은 잔해에서 얻는 독으로,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흘러도 성질을 그대로 보유한다.
습기가 차거나 햇볕을 쬐면 독성이 약해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보관만 잘하면 오래오래 보존할 수 있다.
생물독은 반대로 성장에 적합한 환경을 만나지 못하면 죽는다. 그리고 적합한 환경을 만나면 빠르게 번식하여 강해진다.
천방기사나 가류는 개미 따위보다 훨씬 작은 짐승으로 이뤄진 독이라고 여기지만, 무룡은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피를 따라 물려받는 난씨 가문의 독은 당연히 생물독이다. 그냥 고물독이었으면 대물림에 따리 약해져서 언젠간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그저 생물독이라고 하기엔 또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향아가 있으면 물어볼 텐데.'
당백호는 생각이 깊고 예의가 몸에 깊이 배여 품을 떠난 자식 같다. 반대로 추향은 어른이 되고도 한참 지난 나이에도 불구하고 응석을 부리기 일쑤다.
그래서 늘 어리게만 생각했는데, 정작 법술에 관해 막히는 부분이 생기자 천방기사보단 추향이 먼저 떠올랐다.
이는 무룡이 무의식중에 추향의 지식이 천방기사를 초월했다고 여겼다는 뜻이다.
'각인, 봉인, 촉발. 그리도 또 뭐가 있을까?'
무룡이 독에 관한 지식이 깊다곤 하지만, 혈독에 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이 부분에선 남화교가 독보적이다.
게다가 피를 따라 대물림되도록 각인 법술까지 개입했고, 피를 따라 흐르는 독이 주인을 해치지 못하도록 봉인 법술이 개입됐다.
당연히 필요할 땐 봉인을 풀어 상대를 죽이기 위한 촉발 법술도 필수다.
"노 선생, 어떻습니까?"
난청응은 매일 자정이면 은밀하게 무룡의 처소에 방문했다.
"피로 대물림되는 독이고, 규모를 알아서 조절하는 살아있는 독입니다. 그리고 법술이 가미되어 독이 함부로 주인을 해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무공 증진을 돕는 효과도 있습니다."
난청응의 말에 무룡이 눈을 크게 떴다.
"영약이랑 비슷한 효과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피를 내서 다른 사람에게 먹여봤는데 효과가 없었습니다."
"낙인이군요."
"네?"
"고분고분 말을 들으면 영약이고, 거역하면 독이 되는, 그것도 태어날 때부터 피에서 흐르는."
무룡은 이 물건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 말꼬리를 흐렸다.
"언 갈약이군요."
갈약은 음식인데 한 번 얼면 독성이 생긴다. 그러나 독성이 강하지 않아 굶주림으로 목숨이 위태한 자에겐 여전히 식량이다.
먹으면 큰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 정작 목숨은 구할 수 있는 애증의 상대다.
아주 적절하진 않지만, 꽤 괜찮은 비유였다.
"치료할 방법은 있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법술이 가미되어 장담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제가 뭘 해드리면 될까요?"
"남화교의 모든 독은 정혈단에서 왔다고 들었습니다. 정혈단이 있으면 뭔가 단서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난청응은 낙심한 표정을 지으며 탄식했다.
"피에 독이 흐르는 데도 왜 여러 가문이 교주 가문에 저항하는지 아십니까?"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백여 년 전 일입니다. 어느 가문이 심계를 부려 갓난아기를 바꿔치기했습니다."
무슨 얘긴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은 무룡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 아이는 총명하고 무공도 뛰어나서 당시 교주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곁에 두고 끔찍이 아꼈죠. 뭐, 교주가 남색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닙니다."
"교주를 암살했습니까?"
"아니요. 정혈단을 없애고 피의 저주를 발동하는 주문을 훼손했습니다."
무룡의 암혈에는 세상을 지울 정도의 어마어마한 독이 있다. 물론, 무룡이 품은 독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게 아니다.
무룡이 품은 독은 세상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무룡이라는 봉인체가 사라지고 세상에 풀려나면 적수가 없는 독은 덩치를 불려 결국엔 모두를 삼킨다.
그걸 해결하는 데 필요한 남은 두 가지가 정혈단과 환생환이다. 이 둘이 있으면 무룡이 품은 독 역시 평생 무룡에게 각인되어 세상에 풀려나지 못한다.
무룡이 정말 강해져서 독을 완전히 분해하는 방법도 있긴 한데, 그 정도 수준이 되려면 백 년 단위의 노력이 필요하고 인간의 몸으론 절대 담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운도 있어야 한다.
"정혈단을 다시 만들 순 없습니까?"
"정혈단은 남화교가 만든 게 아닙니다. 남화교에서 키우던 신수가 떠나고 남긴 내단 비슷한 물건입니다."
"그런 물건을 없앴다고요?"
"저는 그렇게 들었습니다. 진실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그때부터 남은 가문들이 미씨 가문에 반항하기 시작했고 많은 피가 흘렀습니다."
"그럼 굳이 해독할 필요가 있습니까? 독을 촉발할 수 없다면 이건 그냥 영약인데요."
"정혈단을 진짜 없앴는지 의심하셨죠? 저도 주문이 진짜로 훼손되었는지 의심됩니다. 만약 독을 촉발하는 주문을 훼손한 게 아니라 숨긴 거라면요? 설사 훼손했다고 하더라도 복구 못 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법술로 훼손한 부분을 복원하면 우린 다시 미씨 가문의 손에 들어갑니다."
술사들이 갑자기 대거 등장하며 불가사의한 재주를 보여줬다. 난청응은 술사들의 재주를 전해 들은 후부터 주문이 복구될까 봐 편한 잠을 잘 수 없었다.
'심계가 깊은 자다.'
무룡은 난청응의 속셈을 단번에 알아챘다.
'피에 흐르는 독을 없애 안전을 확보. 거기에 주문을 얻어 다른 가문을 조종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능력은 몰라도 욕심은 대단한 놈이다.'
"다른 가문의 피가 필요합니다."
"우리 것과 뭐가 다른지 찾아보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뭐가 다르고 뭐가 같은지 알면 독의 성질을 분석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당분간 바쁠 겁니다."
난청응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도 아주 바쁩니다."
"곧 큰 가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환자가 배로 늘 것이니 지금부터 최대한 쉬는 게 좋습니다. 그럼 저도 노 선생을 귀찮게 안 하고 물러가겠습니다."
무룡은 경공을 펼쳐 떠나는 노청응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남화교로 오는 것까지는 참 순조로웠는데, 오고부터는 생각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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