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천서
무룡과 추향은 추영과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이지만, 천하에서 가장 밝다는 오지열의 귀를 속이고 현천궁에 잠입할 자신이 없었다.
특히 혈영살수의 재방문이 걱정되어 삼교대를 이교대로 바꾸며 철통같이 방어하는 바람에 비영마저 복귀한 다음 함부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젠 당백호가 직접 오가며 말을 전할 수 있지만, 괜한 의심을 살까 봐 황궁 비고에 자주 방문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룡은 심심했고, 천성이 가만히 못 있는 추향은 몇 배로 심심했다.
그래서 당백호가 건드려도 괜찮다고 한 서책을 모아둔 곳에서 탐험을 벌였다.
"아빠, 여기 글자 없는 책이 있어."
다른 곳에서 봤다면 필사하는 데 쓰는 빈 책으로 여겼겠지만, 여긴 황궁 비고다. 그것도 황제와 황태자 외엔 출입을 거부하는 비밀스러운 곳이다.
이런 곳에 아무 글자도 없는 책이 있다면 그건 오히려 글자가 있는 책보다 백 배 더 귀하다.
무룡은 천환서고에서 너무 많은 책을 읽은 탓에 글자만 봐도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도 시일이 조금 지나 머리가 어느 정도 비워졌기에 억지로나마 읽을 순 있다.
책을 받아든 무룡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추향을 바라봤다. 눈이 아플 정도로 깨알 같은 글자가 가득 적힌 책인데 글자가 없다고 하니 추향이 또 장난치는 게 아닌지 의심했다.
"무자천서無字天書다."
붉은 부리의 까마귀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천방기사가 유일한 제자인 추향에게 문제라도 생길까 봐 자신의 유일한 말벗인 까마귀까지 보냈다.
"무자천서?"
"천환서고랑 비슷한 놈이야."
천환서고가 양으로 유명하다면 무자천서는 적중률이 우위다. 원하는 걸 찾으려면 품을 팔아야 하는 천환서고와 달리 무자천서는 책을 잡은 상대에게 필요한 걸 보여준다.
"나는 왜?"
"넌 필요한 게 없으니까."
까마귀의 대답에 추향이 턱을 치켜들었다.
"어쭙잖은 걸 보여주면 비웃음당할까 봐 감히 글자를 못 나타내는 거구나."
추향이 자신의 완벽함에 취해 망언을 뱉을 때, 무룡은 딸의 인성 교육보다 더 중요한 일에 매진했다.
화타초경華陀艸經.
역사상 최고의 의원이 누구냐고 하면 다들 편작을 뽑는다. 그러나 약을 가장 잘 쓰는 의원이라고 하면 화타다.
편작은 사람 배를 가르고 치료한 후 다시 기워 살린 적이 있을 정도로 의술이 대단한 의원이지만, 약초를 쓰는 것만큼은 화타에 못 미친다.
화타초경은 세상의 풀을 세세히 분류했다. 분류 기준에 따라 대부분 풀은 약초에 들어가기도 하고 독초에 들어가기도 했다.
수많은 분류 기준에도 모두 약초인 것은 몇 없고, 모두 독초인 것 또한 몇 없었다.
화타는 그러한 약초와 독초에 절대의 이름을 달아줬다.
그리고 약초와 독초의 분류만 한 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약초와 독초를 다듬으면 어떤 효과가 나오는지도 상세히 적었다.
'살 수 있다.'
무룡은 가족과 오순도순 살다가 때가 되면 혼자 먼 곳으로 떠나 죽을 작정이었다. 어차피 죽음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얼마나 세상에 피해를 덜 끼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런데 화타초경에는 무룡의 독을 해결할 방법이 적혀 있었다. 그대로 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아예 희망이 없을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늘이 날 버리지 않았구나.'
그러려고 한 건 아니지만, 무룡은 세상을 구했다. 완전히 구한 건 아니어도 최소 세상의 파멸을 뒤로 미뤘다고 할 수 있다.
황궁 비고에서 무자천서를 얻고 거기에서 화타초경을 본 건 어쩌면 하늘이 무룡을 가엾이 여겨 살길을 열어준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보고 끝까지 자하구를 책임지라는 건가?'
무룡이 오독교에 가서 자하구를 수습한 건 다 인연이 있어서다. 그러니 내친김에 무룡더러 세상에 전혀 피해가 없도록 자하구의 독을 완전히 해결하라는 뜻인지도 모른다.
하늘의 뜻이 뭐든, 무룡은 살길이 생겼다는 게 일단 기뻤다.
'독 역시 내공이랑 다를 게 없다.'
독공은 내공보다 훨씬 위험한 기운을 품고 쓰는 방식이다. 인간이 아주 나약한 시절엔 강대한 적을 죽이려면 독을 쓸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독공이 생겼다.
그러나 인간이 점점 강해지며 자신까지 해치는 위험한 독공은 천천히 사라졌다.
오독교처럼 수천 년 외부와 격리된 삶을 사는 곳에서나 그 명맥이 겨우 유지되었다.
가류한테 의술을 배우고 석실의 귀한 책들로 깊이를 더했다. 오독교에선 독을 배우고 독을 조합하는 방법을 조금 배웠다.
여태껏 둘을 합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화타독경이 의술과 독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단전을 잃은 것부터가 하늘의 뜻인가?'
외부 충격으로 단전만 잃고 몸은 멀쩡하기가 정말 어렵다. 단전이 파괴될 정도의 타격은 그 여파만으로 사람 몸을 박살 내야 한다.
그간 마환기공의 특성 때문이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하늘의 보살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단전을 잃었기에 의술을 배웠고, 단전을 잃어 공력을 못 움직이기에 음양강수로 자하동 문을 녹이려 하다가 오독교에 가서 독을 배웠다.
'운명은 흐름의 방향이 있지만, 경로도 목적지도 결코 정해진 게 아니라고 했지.'
천방기사는 사람이 경박한 면이 있지만, 헛소리는 안 한다. 천방기사는 천기의 흐름으로 미약한 존재의 운명이 정해진다고 했다.
그러나 방향만 정해질 뿐, 경로와 목적지는 다르다고 했다. 그게 아니면 하찮은 인간은 모두 같은 운명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홍수나 가뭄에는 굶주림이 따르고, 굶주림이 길어지면 전란이 인다. 천기가 이럴 때 인간은 쉽게 앓고 쉽게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전쟁통에도 장수하는 노인이 있고 건강하게 뛰노는 아이가 있다.
무룡은 하늘이 자신을 돕는 거란 낙관적인 생각은 버리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버려야 화타초경에 적힌 독공을 익히고 약초와 독초를 찾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
무의식에 조금이라도 태만함이 있으면 백이면 백 죽을 현재 운명을 비틀지 못할 것 같았다.
추향은 정기적으로 무룡에게 멸화장을 펼쳐 암혈을 봉인하면 아무 문제도 없는 줄 안다. 시간이 흐를수록 봉인의 효과가 약해지며 종국에는 멸화장이 무룡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함을 미처 몰랐다.
그러나 무룡의 상황이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음은 알기에 무자천서에 집중하는 무룡을 방해하지 않고 다른 책을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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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무룡은 바로 코앞에 보이는 추향의 얼굴에 피식 웃어버렸다. 예전 폭포 뒤 동굴에 숨었을 때 자신이 거짓으로 수련하는 거로 의심하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시험하던 추영이 생각난 때문이다.
"아빠, 나 또 좋은 책 찾았어."
무룡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거로 칭찬을 대신했다. 화타초경의 내용대로 수련하며 깊은 감동에 빠진 탓에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추향이 건넨 책을 펼치자마자 탄성을 참지 못했다.
"허신도虛神圖?"
전신도록의 하나인 허신도였다.
맹룡도는 체내의 기운을 움직이고 호세도는 몸 밖의 외기를 움직인다. 허신도 역시 몸 밖의 기운을 움직이는데, 호세도와는 조금 달랐다.
호세도는 살기를 비롯한 인간의 의지를 강화하고 그 의지로 외부 기운을 움직인다. 이는 내공의 유무보다 인간 본연의 의지가 굳건해야 한다.
그러나 허신도는 몸의 기운과 외부 기운을 공명하여 외부 기운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의지가 박약해도 내공만 충분하면 외기를 움직일 수 있고, 호세도보다 훨씬 정밀하게 움직인다.
수많은 시련을 겪으며 수동적으로 의지가 강해진 무룡이다. 호세도만으로도 외기를 곧잘 움직이는데 허신도까지 익히면 단전이 사라진 단점을 일정 부분 덮어버릴 수 있다.
'경공에 큰 도움이 되겠구나.'
물론, 법술이 아닌 무공을 익힌 무룡에겐 경공과 보법에 큰 도움이 되고 무공 위력에는 보탬이 적다.
천방기사나 추향처럼 법술을 익힌 사람에겐 허신도가 범의 날개이고 용의 여의주 같은 존재다.
"네 사부한텐 당분간 비밀로 하자."
허신도를 배우면 천방기사가 또 사고를 잔뜩 칠지도 모른다. 자기 사부를 잘 아는 추향은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겼다.
"천방기사가 내 눈과 귀를 통해 여기 일을 다 보고 들었다. 이미 짐을 싸고 장안으로 달려오는 중이야."
"얼마 걸리지?"
"내가 없으니까 열흘 정도 걸릴 거야. 그전에 빨리 네 가족을 찾아 도망치지 않으면 천방기사가 친 사고에 휘말려들 거야."
차라리 천방기사가 심술을 부려 일부러 사고를 치면 괜찮다. 천방기사의 사고는 늘 호의에서 시작되고, 본인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며, 그 규모가 본인의 예상을 월등히 뛰어넘는다.
결국 어떻게 될지는 본인도 모르기에, 사고를 친 장본인도 피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기도 자기가 친 사고에서 못 빠지는데 무룡 등을 제외해주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내가 또 사고를 쳤구나."
허신도를 찾은 건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그걸 천방기사한테 들킨 바람에 사고는 필연적으로 터지게 생겼다.
천방기사의 사고도 추향과 비슷한 맥락인데, 그 규모와 위력이 어마어마하여 문제다.
"어쩔 수 없구나. 일단 내가 재난을 경고해야겠다."
붉은 부리의 까마귀가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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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성에 수많은 까마귀가 몰렸다. 까마귀들은 거친 목청으로 불길한 소리를 내며 밤낮없이 울어댔다.
겁이 많은 자들은 짐을 싸 들고 피난을 갔다. 부유한 자들은 가마를 타고 종남산에 가서 향을 태우며 치성을 올렸다.
그리고 전설의 붉은 부리의 까마귀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드디어 황궁도 술렁였다.
황제가 붕어했을 때도 못 치르는 칠칠사십구일제를 지내기로 했다. 칠칠사십구일제는 오직 하늘에 올리는 제사로 한정되었고, 무려 사십구 일 동안 흉일이 없어야 한다.
사십구 일 동안 길일이 없는 일은 종종 있어도 흉일이 없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러니 사십구일제는 하늘이 허락해야만 할 수 있는 제사다.
그러나 지금처럼 흉조가 확연할 땐 그러한 규정을 무시한다.
"사십구일제를 지내면 민심이 흉흉해집니다."
문제는 대부분 왕조가 패망할 때 마지막 수단으로 사십구일제를 올렸다는 것이다. 이미 다 무너진 왕조가 고작 제사 하나로 다시 일어날 리 없으니, 세간에는 사십구일제가 새 왕조가 들어서기 위해 낡은 왕조를 하늘에 바치는 제사 정도로 인식이 박혔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마찬가지로 민심이 흉흉할 것이다."
폐황태후가 말했다. 제국의 팔대 명문 중 최고인 박릉 최씨로서 여황제가 될 야심을 품은 대단한 여인이다.
"폐하가 허락할까요? 나이가 어려도 이런 불구덩이에 뛰어들 위인은 아닙니다."
원래 폐황태후는 제국을 물려받으려 했다. 그러나 사십구일제로 제국의 패망을 알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대신들의 반대였다. 대신들은 폐황태후가 아닌 제국에 충성한다. 지금 폐황태후를 밀어주는 것도 정의연의 허수아비인 황제를 견제하기 위함이다. 세력이 전무한 황제보단 폐황태후가 제국의 혼란을 더 잘 수습할 거라는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십구일제로 제국이 뒤집히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는 건 절대 원하지 않는다. 누구도 역사서에 제국 패망의 일원으로 자기 이름이 올라가는 걸 원치 않기 때문이다.
세가 연합의 몰락으로 정의연의 균형이 깨진 것과 마찬가지로, 붉은 부리의 까마귀가 재난을 경고하는 바람에 폐황태후 세력에도 분열이 보였다.
- 작가의말
무룡이 항주의 남궁세가를 없앤 것과 추향이 허신도를 찾는 바람에 천방기사가 움직인 것. 둘 다 무심결에 한 일이지만, 결국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흘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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