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파유동
마교의 흑응조가 화산의 벽파검에 목숨을 잃었다.
마교의 흑응조가 화산의 벽파검에 패한 후 목숨을 버렸다.
이 둘의 차이는 매우 크다. 전자는 흑응조가 벽파검 앞에서 목숨도 부지 못 할 정도로 약하게 느껴지고, 후자는 패배의 수치를 못 이겨 목숨을 버린 것이기에 두 무공이 대등한 듯 여겨진다.
채 장로가 목숨을 버리기로 한 이유고, 그 청을 마교 장로가 선뜻 들어준 이유다. 채 장로는 목숨을 같은 편 손으로 끝장내는 것으로 흑응조의 명예를 지켰다.
"내가 싸운다."
채 장로의 목을 벤 붉은 수염의 장로가 나섰다. 붉은 수염에 노란 눈알은 누가 봐도 서역인이다. 대머리여서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 머리도 붉을 것이다.
"공평하게 짝눈끼리 대결해보세."
마교에서 홍 장로로 불리는 붉은 수염은 안대를 쓰지 않았다. 실명한 눈의 푹 꺼진 모양으로 볼 때 그저 시력을 잃은 게 아니라 눈알을 뽑힌 듯했다.
"난 화산제일검이고 그대는 강호의 무명소졸이오. 공평하려면 이렇게 해야지."
노혼이 부러져서 날이 아주 조금만 남은 검을 툭 던졌다. 우연인지 고의인지 날에 피가 남아있는 검은 채 장로의 주검 근처에 떨어졌다.
홍 장로가 얼굴을 크게 씰룩였다.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니 여전히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 그럼 이건 어떻소?"
노혼이 가죽 바지를 찢어 띠를 만들었다. 가죽 띠로 두 눈을 가린 노혼이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붉은 수염의 장로를 도발했다.
얼굴만 보면 성격 더러울 게 분명한 홍 장로는 격장법에 걸려들지 않았다. 채 장로의 죽음으로 이기든 지든 마교는 남은 화산 제자들을 해칠 명분을 잃었다. 만약 화진악의 행방을 모른다고 어린 제자들을 죽이면 채 장로의 죽음에 불복하여 보복한 것으로 강호에 전해질 수 있다.
그러나 채 장로를 죽음으로 몰아간 노혼만큼은 어떻게든 죽여 마교의 체면을 살려야 한다.
동귀어진할 지언정 노혼은 꼭 죽여야 하기에 홍 장로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다스렸다.
"어허. 마교 장로들이 화산의 벽파검법에 겁을 제대로 먹었군. 그럼 이건 어떻소?"
노혼이 왼손을 뒤로 보내 허리띠에 꽂았다. 검을 버리고 눈을 가렸을 뿐이 아니라 왼손까지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왼손을 절대 안 쓴다고 한 적은 없으니 아예 무시할 순 없다. 그러나 뒷짐도 아니고 허리띠에 꽂은 손을 뽑아서 공격하는데 반응하지 못할 사람이면 마교에서 장로가 되지도 못했다.
"사부, 제자의 검을 쓰시는 게 어떻습니까?"
홍 장로는 여전히 넘어오지 않았다. 격장지계가 완전히 실패했다는 생각에 노혼이 걱정된 손청우가 끼어들었다.
"화산 제자들은 들으라."
노혼은 아침을 배불리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산책 나온 사람처럼 편안한 말투였다.
"손에 익지 않은 무기는 생사를 건 대결에서 없기만 못하다. 유생들은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그들이 글을 쓰는 데 목숨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산 제자들이 분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버리고 눈을 가리고 손 하나 양보하는 게 나로서도 한계다. 나보고 손에 익지 않은 검을 들고 싸우라는 건 상대를 아주 무시하는 나쁜 생각이다. 강호에 명문으로 이름이 드높은 화산의 제자라면 상대가 아무리 하찮은 마교 장로라도 그렇게까지 능멸해선 아니 된다."
홍 장로의 인내심이 한계를 돌파했다.
"노혼, 손을 빼고 눈을 뜨고 검을 들어라."
"내가 무시할 만하지 않은가? 마음에 새긴 검을 손에 잡은 게 언젠데 아직도 빈손 타령인가?"
"개소리!"
홍 장로가 신형을 날려 노혼을 덮쳤다.
홍 장로의 칼은 얼핏 검과 비슷했다. 보통 머리 쪽이 더 넓고 두꺼운 대부분의 칼과 달리 도신의 넓이와 두께가 균일했다.
그러나 날은 한쪽에만 세웠고 끝이 검처럼 뾰족하지 않고 둥그스름했다. 굳이 비슷한 물건을 찾으면 여물을 써는 작두가 제일 근접했다.
탁, 탁탁.
홍 장로의 칼이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부딪쳐 둔탁한 소리를 냈다.
"어기성검御氣成劍!"
손청우가 저도 모르게 외치곤 깜짝 놀라며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노혼은 기를 모아 짧은 검을 만들어 홍 장로의 칼을 모조리 막아냈다.
부러져서 손에 익지 않은 검은 버리고 집중력을 높이려고 눈을 감쌌다. 홍 장로를 도발하기 위함인 것처럼 꾸몄지만, 사실은 더 강한 상태로 대결에 임하려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노혼이 앞서 도발한 게 있어서 극소수 사정을 꿰뚫어 본 사람을 제외하면 씩씩거리며 양손으로 커다란 칼을 휘두르는 홍 장로가 하찮게 보였다.
그리고 홍 장로는 극소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평소에도 불같은 성격인데 도발을 계속 참다 보니 인내의 한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 반발로 훨씬 흥분하여 자기 목숨을 버려서라도 상대를 죽일 생각만 머리에 가득했다.
수비로 일관하던 노혼이 태세를 바꿔 공격하기 시작했다. 홍 장로는 흥분한 가운데도 한 가닥 냉철한 마음을 억지로 살렸다.
'오늘 너만 사는 일은 절대 없다.'
홍 장로의 도법은 벽파검법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상대가 정신을 못 차리게 끝없이 몰아친다는 점에선 벽파검법과 흡사했다.
그러나 벽파검법은 노혼이 팔백이 넘은 목숨을 제물로 바쳐 완성한 살인 검법이고 홍 장로의 도법은 벽파검법에 미치지 못했다.
조금씩 홍 장로가 밀렸다. 필살의 일격을 날리려고 일부러 힘을 조금 거둔 것도 있지만, 그러지 않더라도 홍 장로가 밀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노혼의 우위가 점점 명확해졌다. 화산 제자들은 살 수 있다는 기쁨에 딱딱하던 얼굴이 많이 풀렸다. 반면 마교 장로와 무사들은 침통한 표정이 역력했다.
노혼의 공격은 점점 거세지고 홍 장로의 대응은 법도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왔다!'
상대를 제압한 노혼이 치명적인 일격을 날렸다. 그리고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도 한 가닥 힘을 남겨뒀던 홍 장로 역시 필살의 일격을 펼쳤다.
'이겼다!'
노혼이 공격하던 오른손을 급히 회수해 홍 장로의 칼을 막았다. 그러나 강한 공격을 펼치는 중에 다급히 회수한 거여서 내공으로 만든 검이 아닌 팔뚝이 칼을 맞았다.
"약속은 지키시오."
노혼이 비틀거리다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홍 장로가 가슴으로 피를 콸콸 쏟으며 하나밖에 없는 눈을 부릅뜬 채 앞으로 엎어졌다.
"어떻게 된 일이지?"
마교 장로 하나가 못 참고 입을 열었다.
"오른손을 희생해 홍 장로의 칼을 막고 뒤에 숨긴 왼손으로 기검을 뽑아 자기 배를 관통해 홍 장로의 심장을 찔렀소."
대답한 자는 청수한 얼굴을 한 점잖게 생긴 미중년이었다. 신발은 가죽 바닥에 푸른 천을 기워 만든 보기만 해도 비싸 보이는 단화였고, 몸에는 먼지 한 톨 안 묻은 흰 장포를 입었다.
머리에는 비를 막는 우관雨冠과 비슷한 형태의 모자를 썼고 손에는 가죽 부채를 들었다.
"진짜 대단한 사내군."
질문한 장로가 감탄했다.
노혼은 홍 장로의 칼을 기검으로 막지 못한 게 아니라 아예 오른손으로 기검을 뽑지 않았다. 홍 장로가 치명적인 일격이라고 생각해 동귀어진의 초식을 펼치게 했던 공격도 가짜였다.
노혼은 채 장로를 상대하며 입은 내상으로 싸움을 길게 끌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단기간에 승부를 가릴 생각으로 상대를 자극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내상이 악화할 위험을 무릅쓰고 공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상대를 궁지에 몰았다. 상대가 동귀어진을 노리는 걸 알고 거둘 수 없는 공격인 것처럼 속여 상대를 낚았다.
오른손의 기검을 거두고 팔뚝으로 칼을 막았다. 동시에 뒤에 감춘 왼손으로 기검을 뽑아 발사했다. 왼손으로 뽑은 기검은 노혼의 몸을 우선 관통한 후 홍 장로의 심장을 쪼갰다.
벽파검법의 오의 중 하나인 암파유동暗波流動이다.
노혼은 눈 하나와 오른손을 희생해 마교의 장로 셋을 죽였다. 동시에 몇 달은 요양해야 회복할 정도의 내상을 입었고 배를 관통하는 목숨이 위험한 상처도 생겼다.
그러나 칠십 명에 달하는 화산 제자의 목숨까지 생각하면 남는 장사다.
"난 마교의 장로 후문영이라고 한다. 오늘 일을 복수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세세겁화봉으로 찾아와서 화산 제자임을 밝혀라. 그러면 털끝 하나 안 건드리고 내 앞으로 데려올 것이다."
화산 제자들은 후문영이 갑자기 나서는 영문을 몰라 서로 쳐다봤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의 모든 원한은 나 후문영이 지겠다."
말을 마친 후문영이 손에 든 가죽 부채를 휙 저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한 가닥 기가 날아가 노혼의 심장을 때렸다.
눈 하나 멀며 느낀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했고 팔뚝이 잘리고 배를 관통당하며 흘린 피도 한가득하다. 거기에 내상까지 겹친 노혼은 후문영의 공격을 감지하지 못했다.
울컥 피를 토한 노혼이 눈을 부릅뜬 채 죽어버렸다.
"사부!"
손청우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렀다.
"무슨 짓이냐!"
같은 마교 장로가 질책했다.
"살려두면 후환이 끝없을 것 같습니다."
몇몇 화산 제자가 검을 뽑았다. 교만한 마교 무사들은 화산 제자들을 제압한 후 무기를 압수하지 않았다.
"화산 제자들은 들으라."
눈가가 피로 얼룩진 손청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사부의 희생을 욕보이지 말고 검을 거둬라."
제자들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검을 거뒀다.
"멀리서 오면 손님이라고 했으나, 보다시피 화산이 주인 된 도리를 할 상황이 아니오. 마교에서 먼 걸음 하신 분들께 죄송하지만, 이만 화산의 땅에서 떠나시오."
후문영이 손청우를 바라봤다. 손청우는 눈가를 푸들거리며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잡초고영복雜艸枯榮復."
열흘 붉은 꽃 없고 잡초는 시들고 푸르기를 반복한다.
"멀리 안 나갑니다!"
축객령이 떨어졌다.
- 작가의말
암파유동 - 물밑에서 몰래 이는 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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