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지난
약 삼십 년 전에 변방에서 큰 반란이 일었다. 겉보기엔 여전히 강대한 제국이 사실상 속이 텅 비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사건이다.
그래도 제국의 기운이 다하지 않아 반란은 채 삼 년도 지속하지 못하고 제압되었다. 반역에 연루되어 수많은 사람이 목을 잘렸고 무수한 가문이 멸문지화를 입었다.
삼 년의 전쟁 중에 황폐해진 땅이 기수부지이고 미처 수리하지 못해 홍수에 무너진 뚝도 헤아리기 힘들었다.
천하는 바야흐로 난세의 조짐을 보였다. 삶의 터전을 잃고 유리걸식하던 자들이 더는 제국의 보살핌을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닫고 산적이나 수적이 되고 도둑이 되었다.
관의 힘으로 대처하기 어려움을 인지한 황실은 재상인 독고현천의 주장에 따라 강호 문파들에 협의행을 지시했다.
협의행 덕분에 천하가 안정을 찾은 듯했으나 관과 군의 힘이 줄고 강호가 번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해석하기에 따라 소규모 무력 단체로 볼 수 있는 문파와 세가들이 강해지며 오히려 민초들이 난을 일으킬 때보다 더 큰 우환이 심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독고현천이 반란을 획책한다는 투서가 황궁에 날아들었다. 황제가 대로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할 것을 지시하고, 사실일 경우 독고현천의 구족을 멸하고 거짓일 경우 투서를 보낸 자를 찾아내 구족을 멸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채 조사가 반도 진행되기 전에 독고현천이 장공주인 녕서 공주를 납치해 도주하는 행각을 벌였다.
제국은 거대한 땅을 차지하고 헤아리기 힘든 숫자의 백성을 다스린다. 황제의 폭정으로 제국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걱정해 견제 장치를 수없이 마련했다.
그중 장공주는 황제의 큰딸로 황태자를 견제하는 역할이다. 별다른 권력은 없지만, 황태자를 조사하고 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아주 엄중한 죄가 발각될 시 장공주의 독단으로 황태자를 폐위할 수도 있다.
반란을 일으켜 황제 자리를 뺏으려던 독고현천이 왜 굳이 장공주를 납치해서 도망쳤는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비밀이다.
"그때 독고현천의 목에 걸린 현상금으로 산 게 바로 양주 분가의 장원이다."
대장로의 말에 장로들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별채의 젊은 손님이 용혈은 맞지만, 동시에 반역자의 핏줄이기도 하다는 말이군요."
젊은 장로가 말했다.
"독고현천은 가문의 장로 열세 명의 목숨을 취하고 가주의 검에 죽었다. 그리고 납치되었다던 장공주는 회임한 상태였고."
"정말 금수만도 못한 놈이군."
"잘못 알았다. 사실 독고현천과 장공주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였다. 장공주는 혼인이 허락되지 않은 신분이라 둘은 맺어질 수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끓어 몰래 만나며 정을 쌓아온 것이야. 독고현천이 장공주를 납치해 도망친 게 아니라 장공주가 회임하는 바람에 둘이 도주한 것이 세상은 모르는 진실이지."
혼인은 물론 생육도 허락되지 않는 게 장공주라는 신분이다. 태아를 지키기 위해 독고현천과 장공주는 도주를 선택했다.
"장공주는 장안으로 압송 받다가 무주霧州에서 출산해 건강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반역자의 핏줄이기도 해 즉참해야 하지만, 누구도 용혈을 건드리려 하지 않아 어영부영 장안까지 데리고 갔다."
추영이 무룡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줬다.
"잠시만."
남궁영천이 대장로의 말을 끊었다.
"독고지난이면 나이가 안 맞소. 별채의 손님은 내년에 약관에 이른다고 했는데 대장로 말대로면 두 살이 비오."
"아무래도 화산에 데려갈 때 나이를 속인 것 같다. 한 살인 걸 세 살이라고 해서 누구도 장공주의 아들이라고 생각지 못하게 했겠지. 남궁인만 해도 속았잖아."
나이를 속인 덕분에 무룡이 용혈이란 걸 알아내도 장공주의 아들이라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거다.
"화산도 몰랐겠군요."
"그렇지. 이 일을 아는 건 황제와 서문진후밖에 없었을 테니까. 화산은 그저 서문진후의 부탁이어서 들어준 것일 테고."
'지금 내 얘기를 하는 건가?'
무룡은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자하동에서 독에 중독된 채 환각을 보며 즐겁게 살고 싶다.
"남궁인이 동그란 주사위를 가문에 들인 거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남궁인은 그저 가문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무룡을 남궁가에 들였다.
덕분에 남궁가는 무룡을 품지도 내치지도 못하는 양난의 궁지에 몰렸다.
품자니 무룡의 아버지인 독고현천을 직접 죽인 죄가 있다. 게다가 장공주의 죽음도 남궁가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못 한다.
죽이자니 아무리 어째도 용혈이다. 용혈을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남궁가의 멸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남궁세가와 인척을 맺은 수많은 가문도 덩달아 화를 당한다.
그렇다고 내치자니 명분이 없었다. 무룡을 설득하려고 꾸민 거짓들이 족쇄가 되었다.
그렇게 애써 설득하고 극진히 대접하다가 갑자기 떠나라고 하면 누구라도 의심한다. 괜히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별채 손님이 뭔가를 알아내고 움직인 게 아닌지 걱정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 특히 함께 온 그 여아의 신분이 미심쩍구나. 황실에 여인들로만 이뤄진 정보기관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거기 소속이 아닌지 의심이 가는구나."
"황실에 장공주의 세력이 남았다는 말입니까?"
"황태자를 견제하고 조사할 수 있는 세력이 그렇게 쉽게 사라졌을까? 장공주가 죽은 후 누구도 그 자리를 이어받지 않았지만, 세력은 유지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아의 신분을 확인하는 게 중요하군요."
"이미 사람을 보냈고 보고서가 두 번 날아왔다. 화음현에 춘영이라는 아이를 안다는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한다."
"말투가 장안 쪽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화음현에 살았다고 해서 그때는 그러려니 했습니다."
갑자기 소가주가 벌떡 일어섰다.
"잠시만. 차라리 몇 년 전부터 장안에서 살았다고 하면 들킬 염려도 없었을 텐데."
아무리 남궁세가라고 해도 장안에서 조사하고 다닐 순 없다. 시국이 흉흉하여 자칫 역모죄로 엮일지도 모르는 위험한 짓이다.
"소가주는 일부러 들키려고 작정한 거였다는 생각이오?"
"아니면 굳이 화음현일 필요가 없지 않겠소?"
사실 남궁가의 사람들은 헛다리를 짚고 있다. 추영이 일부러 노혼의 의붓딸이라 하고 화음현에 살았다고 꾸민 건 맞지만, 그 저의는 자신이 도둑질하겠다고 말할 때 무룡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려는 속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죽은 사부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고 말았다.
그때, 대장로의 명으로 떠났던 남궁인이 돌아왔다.
"선부가 정말 이해되지 않는 일이 발생했을 때 열어보라고 저한테 특별히 남긴 유서입니다."
"보았느냐?"
"네. 방금 읽었습니다. 혼자만 알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젊은 장로가 유서를 받아 소리 내어 읽었다.
"서문진후의 말에 따르면 아이의 이름은 무룡이라고 지었다. 어쨌든 용혈을 이었고 무주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의 성은 황실의 것도 독고현천의 것도 아닌 독毒 씨로 정했다."
독고현천의 가문은 역모죄에 연루되어 구족을 멸했다. 그래서 독고라는 성은 쓸 수 없다. 게다가 총애하는 장공주의 죽음을 아이 탓으로 돌린 황제가 독고라는 성에서 독자만 따고 같은 소리를 내는 글자 중 가장 뜻이 안 좋은 거로 성을 정했다.
"서문진후의 말에 따르면 아이를 살리자고 강력히 주장한 자는 장공주와 사이가 가장 나쁜 황태자였다."
남궁가 사람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큰일이오. 황태자가 황제가 된다면 우리한테 화풀이할지도 모를 일이오."
"별채 손님을 어떻게든 찾아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오. 우릴 위해 좋은 말 한마디만 해줘도 죽을 목숨을 살릴 수 있소."
황태자가 장공주를 싫어하니 아이도 싫어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무룡의 목숨을 살리자고 홀로 주장한 사람은 황태자였다.
연민이든 뭐든 황태자가 무룡에 대해 우호적이라는 뜻이고, 만에 하나 무룡이 황태자 앞에 나타나서 부모 복수를 해달라고 하면 제국의 무자비한 칼날이 남궁세가를 향해 휘둘러질지도 모른다.
"다른 길도 있소."
소가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찾아서 죽이면 되오. 창고의 은자 이백 냥을 훔친 도둑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무사와 방계는 물론 우리와 연관이 있는 무관과 문파 그리고 가문들을 움직인 다음, 죽이는 건 여기 사람들이 하면 되오."
누구도 소가주의 말을 쉽게 받지 못했다.
"송구하지만, 난 빠지겠습니다."
남궁인이 말했다.
"왜?"
"그간 정이 들어서 정작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습니다. 가문에 누가 되는 일은 하기 싫으니 처음부터 빠지겠습니다."
"대장로. 저자를 일이 끝날 때까지 지하 밀실에 가둘 것을 제안합니다."
소가주의 말에 대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에겐 본가에서 맡긴 중대한 임무 때문에 멀리 떠났다고 알리겠다."
남궁인은 순순히 포박을 받고 끌려갔다. 남궁인을 손수 가둔 남궁영천이 심사가 복잡한 얼굴로 돌아왔다.
"꼭 용혈을 죽여야 하오?"
"가문을 살리는 길 중에 가장 확실한 걸 택할 뿐이오."
무룡은 흐리멍덩한 가운데 추영과 참 비슷한 놈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사람을 믿으면 안 되는구나.'
노혼의 죽음은 무룡에게 가까운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교훈을 줬다. 평생 함께해줄 것 같던 노혼이 그렇게 떠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번 남궁가의 일을 겪으며 대가 없는 호의는 절대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세상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냥 똑같다고 여기는 게 마음이 편하다.
'추영. 추영은 뭐지?'
의심할 사람인지 가까운 사람인지 헷갈렸다.
'믿고 싶은 사람.'
- 작가의말
재상이 반란을 모의하다 장공주와 함께 도망친 일은 실제로 당나라 때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공주가 낳은 아들이 독씨가 된 것도 사실이며, 현재 독씨가 6명 살고 있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반란을 일으키려던 재상의 성인 ‘竇’는 ‘독’ 혹은 ‘두’로 번역되지만, 성일 때는 두씨입니다. 그래서 고심하다 재상의 성을 독고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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