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도화
아미로 가는 길은 즐거움이 가득했다.
추향과 난화봉은 원래 걱정이 뭔지 잘 모르는 성격이다. 더구나 아미로 가서 소교주의 편지를 전하기만 하면 되니 부담도 없다. 시일을 다투는 일이 아니어서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그야말로 느긋한 여행이었다.
게다가 당백호도 웬일인지 예전처럼 책에서나 쓸 법한 말로 귀찮게 굴지 않고, 아직 송곳니도 채 자라지 않은 예두의 재롱까지 얹으니 세상 즐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미까지 채 절반도 못 간 상황에 문제가 생겼다. 예두가 갑자기 고열을 앓더니 드러누워 낑낑 신음만 해댔다.
"무슨 진도가 이리도 빨라?"
요괴도 성장한다. 단, 인간의 성장과 달리 급격하다. 그냥 지켜보면 어느새 자라 있는 인간과 달리 요괴는 특정한 시점에 급성장한다.
성장하는 단계가 많을수록 강한 요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성장할 때마다 새로운 재주를 깨우칠 가능성이 크니까.
"오래 걸려?"
난화봉이 전혀 조급하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내 계산이 맞는다면 백 일 정도 걸려."
비록 급할 게 없는 일이라곤 하지만, 너무 늦어지는 것도 문제다. 다른 건 다 제쳐놓더라도 추영을 비롯한 남은 사람들이 셋에게 무슨 사고가 나지 않았는지 걱정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자기들이 무사하다는 걸 알리려고 까마귀를 불러 소식을 전할 수도 없다. 소환에 쓰이는 법력이 조금 부담되기도 하고, 까마귀를 보고 마교 사람들이 공황에 빠질까 봐 걱정이다.
더구나 영물인 까마귀가 늑대 요괴를 어떻게 대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예두가 좀 더 강해지면 괜찮지만, 아직 새끼인 지금 까마귀가 몸에 좋은 보양식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단축할 방법은?"
당백호가 차분하게 질문했다.
"음양진과 오행진을 겹친 다음 외부에서 기운을 보충하면 돼."
외부에서 보충한 기운은 진법이 알아서 음양과 오행의 기운으로 분리한다. 그렇게 분리한 기운을 흡수하면 예두의 성장이 빠르고 안정적으로 끝날 수 있다.
"뭐가 필요한데?"
"물의 기운이 풍부한 곳을 찾아야 해. 불은 모닥불을 지피면 되고 땅과 나무의 기운은 격발하면 되고, 쇠의 기운은 이 검이면 돼."
땅의 기운이야 어디든 있고, 현재 수림이 울창한 곳에 있기에 나무의 기운도 걱정이 없다. 특히 끝을 모르는 이 두 기운은 격발을 통해 강하게 할 수 있기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행진만 치면 음양진은 쉬운 거야?"
당백호의 질문에 추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법만 치면 모닥불을 꺼도 되니 굳이 장작도 많이 필요치 않아."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물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추향은 영결 계약 때문에 예두와 멀리 떠날 수 없고, 난화봉은 오행의 기운을 감지할 줄 모른다.
결국, 당백호 혼자서 물의 기운이 강한 곳을 찾기로 했다. 따라가면 짐이 될 게 뻔한 난화봉은 추향이 함께 예두를 보살피자는 이유로 잡아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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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좋겠다.'
물과 불의 기운에 쇠의 기운까지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 있었다. 쉬지 않고 반나절 뛴 보람이 있었다.
당백호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곳으로 달려갔다. 기운이 요구에 부합해도 진법을 칠 공간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언니, 그만해. 간지러워."
급한 마음에 기척을 살피지도 않고 달리던 당백호는 급히 멈추려 했다. 그러나 반나절 쉬지 않고 경공을 펼친 탓에 몸이 지쳤고 마음도 지쳤다.
제때에 멈추지 못해 온천에 첨벙 빠진 당백호는 눈을 꼭 감은 채 다급히 외쳤다.
"미안하오. 사람이 있는 줄 몰랐소."
그러면서 황급히 몸을 일으켜 기척이 없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어머, 이 궁벽한 산골에 어디서 이런 헌앙한 상공相公(성인 남성에 사용하는 존칭으로 아내가 남편을 부를 때도 사용)이 생겼을까?"
온천에서 목욕을 즐기던 여인들은 당백호의 출현에 놀라기는커녕 교태롭게 웃으며 희롱을 걸었다.
여태껏 희롱은 남자가 여자한테 하는 나쁜 짓으로만 알았던 당백호는 당황으로 머리가 하얘지며 생각이 멈춰버렸다.
"설마 이 깊은 산속에 혼자 올 리는 없고, 일행도 불러서 함께 즐기는 건 어때?"
"맞아. 언니는 손에 힘이 없어서 등 밀어줄 때 시원하지 않단 말이야."
"때는 남자 손으로 밀어야 잘 벗겨지지."
"남자가 뭐 때만 잘 벗기나."
"호호. 언니들도 참. 이러다 우리 잘생긴 상공 얼굴이 터지겠어요."
웬만큼 강호 경력이 되는 사람이면 여인들이 무공을 익혔는지부터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면 더 경계했을 것이다.
여인들의 말처럼 현재 당백호가 있는 곳은 여염집 여인이 나타날 만한 장소가 아니다. 사냥꾼과 약초꾼들도 발길을 마다할 깊고 험한 산속이고, 여기까지 찾아오는 과정에 사람이 사는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작은 장원에 갇혀 살고, 정의연이 세세겁화봉을 점령한 후엔 큰 황궁에 갇혀 산 당백호는 강호에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이다.
"어머. 우리 상공께서 부끄러움 많이 타시나 봐."
여인들이 첨벙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당백호는 굳었던 몸이 풀렸다.
"상공, 우린 천계에서 내려온 칠선녀입니다. 범부 속자들처럼 예의를 따지고 그러지 않으니 그냥 눈을 뜨셔도 됩니다."
여인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가운데 뭔지 모를 단단함이 있어 그대로 따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행히 굳은 몸이 풀린 덕분에 당백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칠 수 있었다.
"어머, 고작 그 정도 무공으로 우리 칠선녀 손에서 벗어나려고?"
당백호는 뒤에서 강한 기운이 여럿 느껴지자 끝내 못 참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몸을 말리고 옷을 차려입은 일곱 여자가 잠자리가 물 찍는 듯한 가벼운 몸놀림으로 쫓고 있었다.
'정신 차리자.'
무의식적으로 추향과 난화봉이 있는 곳으로 달리던 당백호가 급히 방향을 틀었다.
"낭인 같은데?"
여자들은 당백호가 이미 낭중지물囊中之物(주머니 속 물건)이라도 된 듯 큰소리로 대화했다. 이는 쫓기는 자에게 심적 부담을 주는 수작인데, 당백호에겐 소용이 없었다.
이미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뭘 할지 정했기에 같잖은 수작에 흔들릴 일은 절대 없다.
"무공이 잡다하긴 한데 하나같이 잘 배운 티가 나. 절대 낭인은 아니야."
"저 덩치만큼 물건도 컸으면 좋겠다."
"막내. 남녀의 정사에 빠지면 대공을 이룰 수 없다. 늘 한겨울의 호수 같은 맑음과 고요함을 지켜야 한다."
'날 몰고 있다.'
어느새 정신을 완전히 차린 당백호는 저들이 일부러 큰 소리로 대화하여 본인들의 위치를 알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도주로를 제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일단 몰리는 척하자.'
그런데 그때 갑자기 아까 고개를 돌려 확인했던 일곱 여인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르며 단전 근처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온천에서 눈을 감고 흐릿하게 맡았던 여인들의 향긋한 내음도 강해졌다.
'독은 아닌데.'
무룡과 덕구는 물론 추영도 독에 꽤 조예가 깊다. 덕분에 당백호는 독에 관해 꽤 많이 배웠다.
'설마 무공인가?'
여인들이 단순히 자신을 몰기 위해 대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이럴 때 어떻게 하라고 했지?'
비록 강호에 처음 나온 거지만, 당백호 주변엔 조언을 건넬 노강호가 많다.
'관찰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라.'
당백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쫓는 일곱 여자를 다시 확인했다.
이팔청춘의 소녀인 듯 하나같이 볼이 통통하고 살결이 보드랍다. 그러나 어려 보이는 외모로 덮기 힘든 요염한 기운이 얼굴과 몸 전체에서 풀풀 풍겼다.
옷의 색은 제각각이지만, 양식 자체는 비슷했다. 그러나 같은 문파 혹은 가문 출신이라고 판단하기엔 뭔가 부족했다.
대부분 문파나 가문은 무기 혹은 복식에 통일성을 주는 거로 유대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일곱 여자는 외관상으로 그러한 특징이 없었다.
'사람 다음은 환경.'
당백호는 몸을 훌쩍 띄워 높은 나무를 박찼다. 그리고 주변을 자세히 한 번 둘러본 다음 방향을 정하고 더 빠르게 달렸다.
"여력이 있었나 봐."
"어쩔까요?"
"시야에 있으면 그만이다."
당백호는 반나절 경공을 펼치느라 지쳤다. 매일 무공 수련을 하지만, 오늘처럼 쉬지 않고 연속으로 움직인 적은 처음이다.
그래서 초반엔 조금 엉망인 모습이었지만, 마음이 안정된 지금은 평소 기량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방심해서 고맙다.'
목표한 지점에 도착한 당백호는 산월공散月功을 펼쳤다. 산월공은 물 위를 빠르게 달려 물에 비친 달을 사라지게 하는 경공을 말한다.
아무리 첨벙대도 달은 여럿이 될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물에 비친 달이 사라질 정도가 되려면 정말 빨리 움직여야 할 뿐만 아니라 발로 물을 세게 차서 큰 파문을 연이어 일으켜야 한다.
"어."
"흩어져. 찾으면 호각 불고."
이화접목과는 비교가 미안하지만, 산월공도 꽤 괜찮은 경공이다. 특히 순간적으로 가속하는 데 있어 강호에 알려진 경공 중 세 손가락에 들 정도로 훌륭하다.
당백호는 미리 계산한 대로 산월공을 펼쳐 일곱 여인의 시야를 한꺼번에 벗어났다. 비록 추향에는 못 미치지만, 당백호 역시 계산에 능하다.
'상대를 놀래줘 판단력을 흐린 다음, 상식의 사각을 찔러라.'
당백호는 은밀히, 그러나 빠르게 멀리 보이는 장원으로 달렸다. 지은 지 채 일 년도 안 되어 보이는 반듯한 장원은 담장마저 없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장원이 저들의 근거지겠지. 도망치는 내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가리라곤 절대 상상도 못 할 거야.'
일곱 여인은 당백호가 도망칠 것 같은 곳만 살피느라 정작 바닥에 바짝 엎드려 빠르게 장원에 접근하는 당백호를 발견하지 못했다.
'감옥인가?'
비록 앞을 지키는 사람이 없지만, 분위기로는 그렇게 느껴졌다. 당백호는 깊이 생각지 않고 감옥으로 보이는 음산한 건물로 몸을 던졌다.
- 작가의말
깊은 산속에서 도화운이 터졌는데, 19금이 될까 봐 도주하는 사려 깊은 우리 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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