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괴검왕
"늦었다."
추향이 짙게 탄식했다. 은성진을 친 공간 자체를 세상과 격리했던 법술을 연구하며 꽤 많은 영감을 얻고 있던 차여서 가족들 걱정보단 아쉬운 마음이 컸다.
"놈들의 계략이 먹혔습니까?"
석군의 질문에 추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바로 독무곡으로 가서 사백을 지원해야지 않겠습니까?"
추향이 가족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법술이 사라진 아쉬움에 탄식한 걸 모르는 석군은 바로 독무곡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추향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사부만큼 존경하는 노도검객을 볼 생각 때문이었다.
"늦었어. 손 여섯 개 보탠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아니고."
"이게 누군가가 꾸민 음모라는 걸 세상에 알려야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아무 증거도 없는 소문을 믿고 독무곡까지 몰려간 놈들이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멍청한 자들에겐 진실 따윈 소용없어. 차라리 패도문을 통해 흑막에 숨어서 음모를 꾸민 자들의 정체를 밝혀내는 게 나아."
추향은 몇 가지 색의 가루를 이용해 손청우와 석군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놨다.
"바로 출발할까요?"
석군은 바뀐 얼굴이 신기해 정신이 팔린 것도 잠시, 빨리 진법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감시자가 있어. 독무곡에 소식이 안 전해진 걸 보고 우리가 여기 숨었다고 추측했나 봐. 눈이 사라질 때까지 여기서 버틴다."
"그럼 얼굴은 왜?"
"그 얼굴에 적응하라고. 그리고 말투를 바꾸고 검법도 강호에 흔한 거로 바꿔."
손청우는 추향의 주도면밀함에 감탄했다. 다행히 손청우는 매화검법이라는 대단한 무공을 창안할 정도로 조예가 깊어 무공을 순식간에 바꿨다.
석군은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말투를 항주 근방의 것으로 바꿨다.
"그럼 제자는 서생으로 하고 사부는 호위무사가 되는 거야. 난 시종이나 해야겠다."
말을 마친 추향이 순식간에 분장을 마쳤다. 눈이 멀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눈길을 줄 법한 아름답고 생기 넘치던 소녀가 삶에 찌들어 눈이 거멓게 죽은 무기력한 얼굴의 중년 사내로 변했다.
"당분간 서로 얼굴에 익숙해지고, 말투랑 호칭도 확실히 하자. 사부는 웬만하면 입을 열지 말고, 제자는 절대 검을 뽑지 말고."
"근데 왜 말투를 바꿔야 합니까?"
"장안 사람 대부분이 죽었잖아. 그럼 장안 말투 쓰면서 검을 들고 세상을 돌아다닐 사람은 누구겠어? 화산파 아니면 종남파겠지."
석군은 추향의 지혜에 감탄하며 다소 등한시했던 벽파검법 수련에 몰두했다. 벽파검법은 노혼 덕분에 강호에 꽤 알려졌으나, 벽파검법의 초식 자체는 화산 제자들한테도 생소했다. 부득이하게 검을 휘둘러야 한다면 벽파검법을 사용하는 게 그나마 가장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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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군은 늙고 게으른 노새를 타고 가면서 속으로 거듭 감탄했다.
추향이 분장한 것임을 분명히 알고 내내 파탄을 찾으려고 애썼지만,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무기력한 걸음을 옮기는 시종 차림의 중년 사내는 의심할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게다가 노새 뒤를 따르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사부 역시 흠 하나 잡을 데 없는 호위무사의 표본이었다.
'나만 잘하면 돼.'
"공자, 저기 객잔이 있는데 잠시 발도 쉴 겸 배를 채워야겠습니다. 노새한테 여물이랑 소금물도 먹여야 하고요."
"그래."
추향은 능숙하게 노새를 마구간 구석에 묶은 다음 점소이를 불러서 엽전을 주며 여물과 소금물을 부탁했다. 그리고 창가의 환하고 깨끗한 자리에 가서 소매로 긴 걸상을 쓱쓱 닦았다.
시중을 수십 년 든 충성스러운 시종의 모습에 석군은 다시금 감탄했다.
"닭고기로 육수를 낸 소면 세 그릇에 돼지고기 정육 볶음이랑 초어찜 하나. 그리고 제일 좋은 술로 한 병 올려라."
추향의 주문에 객잔 안을 책임진 점소이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소위 육해공이라고 하여 한 끼 식사에도 반드시 날짐승, 네발짐승, 물고기가 모두 있어야 하는 건 권문세가의 식사법이다.
인원은 단출하지만, 세상 물정에 밝은 시종과 기세가 서릿발 같은 호위무사를 대동한 걸 보면 꽤 대단한 집안 자제라고 추측되어 추호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소면의 양도 다른 상보다 많았고 육수도 훨씬 진했다.
음식이 오르자 추향은 품에서 은으로 도금한 젓가락을 꺼내 석군과 손청우한테 건넸다. 음식에 독이라도 있으면 젓가락이 바로 검게 변할 것이기에 적이 많은 사람들의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오?'
손청우가 눈으로 물었으나 추향은 간단히 외면했다. 사실 추적자가 이미 사라졌기에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할 필요는 없다. 추향이 현재 상황에 큰 재미를 느끼며 과하게 몰입했기 때문에 지금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자네 마교의 불괴검왕 얘기 들었는가?"
소면으로 배를 채운 다음 술로 입을 가시며 쉬고 있노라니 다른 상에서 나누는 대화들이 귀에 들어왔다.
특히 불괴검왕을 언급한 자는 누가 못 들을까 봐 안달이 난 듯 일부러 목청을 키워서 귀를 닫지 않은 이상 안 들을 수 없었다.
"마교는 이미 다 망한 거 아닌가?"
아무리 강한 무인이어도 왕이란 이름을 잘 붙이지 않는다. 왕은 홀로 강한 자가 아니다. 왕은 지배하고 아우르는 자다.
중원 최강의 고수인 검극만 해도 검왕 대신 검극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무룡에게 무언독왕이라는 별호가 붙은 건 강호에 독을 쓰는 고수가 전무한 상황이기 때문이고, 또 남궁세가를 짧은 기간에 흔적도 없이 멸망시킨 자가 그저 개인이 아닐 거란 추측 탓이었다.
물론 고수가 얼마 없는 화산과 달리 마교는 아직도 와호장룡이다. 그러나 정의연에 함락당한 적 있고 검극과 비등하게 여겨지던 교주가 실종했기에 다들 망했다고 생각했다.
마교의 보복이 두려워서 일부러 얕잡아보는 경향도 다소 있고.
그래서 마교 출신에게 왕이 들어간 별호를 붙일 리 만무하다.
"검극과 비견할 고수라던데."
대화하던 두 사람이 갑자기 입을 먹는 데만 썼다.
"점소이, 저기 두 분 상에 좋은 술 두 병과 고기 안주 하나 드려. 내가 사는 거야."
결국 주머니가 넉넉하고 호기심이 넘치는 누군가가 못 참고 나섰다. 남은 자들은 바로 환호하고 손뼉을 치며 술과 고기를 주문한 자를 응원했다.
"독무곡에 무언독경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약 삼만 명의 무인이 독무곡으로 몰려갔지."
증오와 두려움 그리고 온갖 복잡한 감정으로 마교를 헌신짝 취급을 하는 중원이지만, 마교 세력권에 있는 독무곡으로 가기가 저어되었다.
그래서 장안이 있던 곳에서 모여 어느 정도 규모를 이룬 후에야 출발했다.
소문을 퍼뜨린 자들은 화산 근처에서 모였다가 하루 정도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덕분에 독무곡으로 향한 무인의 숫자는 강호에 얼추 알려졌다.
"독무곡이란 곳은 일 년 내내 독 안개가 자욱한 곳이야. 게다가 온갖 진법과 기관으로 보호받아서 강호에서 고수 소리를 듣는 자들도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이면 특이한 재주가 있는 자가 나타나기 마련이지."
실상은 이번 음모를 꾸민 배후 세력이 보낸 사람이다. 그러나 삼만 명의 오합지졸이 모였는데 일일이 출신을 따지고 배경을 알아낼 방법은 없다.
"진법이든 기관이든 다 파훼했어. 물론 약간의 희생이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 사람은 사지 멀쩡하게 독무곡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네."
그리고 검은 갑옷에 검은 가면을 쓴 검객 한 명이 나타났다.
"검을 휘두르면 번개가 울고, 멈추면 파도가 일었다네. 혼자서 넓이가 사십 장이나 되는 입구를 막고 있었는데, 경공에 자신 있는 자들도 그자가 선 자리를 넘지 못했네."
이들은 독무곡에 사람 죽이러 온 것이 아니다. 무언독경을 찾은 후 무사히 도망쳐서 숨으면 승리자다. 그래서 처음엔 누구도 괴이한 차림의 검객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검객이 검기를 날려 독무곡에 진입하려는 자를 모조리 죽이자 생각을 바꿔 먼저 사내를 죽이기로 했다.
"그때부터 괴사가 벌어진 거야. 사내를 공격한 자들은 하나같이 피를 토하며 즉사했어."
이젠 불괴검왕으로 불리는 검객. 그러나 당시엔 누구도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큰 경계심 없이 덤비던 자들은 불괴검왕의 몸에 공격을 적중하는 동시에 피를 토하며 튕겼다.
"그때부터 진짜 고수들이 등장했지. 소속 무인이 만 명 넘는 거대 문파의 장로나 호법들이 자신의 진산절기를 펼쳐 불괴검왕을 공격했다네. 그리고 드디어 불괴검왕의 갑옷이 깨졌네."
술사들이 대거 등장하며 법보가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법보를 파괴하는 방법도 서서히 퍼졌다.
무공으로 해석할 수 없는 현상에 누구나 갑옷이 꽤 높은 수준의 법보라고 생각했고, 수십 명 고수의 목숨을 대가로 갑옷을 부수는 데 성공했다.
"그때부터 절망이 시작됐지."
갑옷이 깨지고 가면도 깨진 불괴검왕은 알몸으로 검 한 자루만 들었다. 그런데 변한 건 전혀 없었다.
몰래 독무곡에 들어가려던 자는 검기에 죽고, 불괴검왕을 공격한 자는 피를 토하며 즉사했다.
"법술인 줄 알았는데 그게 무공이었던 거야."
심마니한테 가장 절망적인 상황은 산이 있고 삼이 있는데 오르지 못하는 것이다. 무공을 익히는 자들에게 불괴검왕 역시 절망으로 다가왔다.
검극의 경지는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질이 되고 영약이 받쳐주고 정확히 수련한다면 그 경지에 이를 자가 한둘이 아니다.
대부분 무인에겐 상상도 어려운 경지긴 하지만,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경지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불괴검왕이 보여준 모습은 아니었다. 검기를 능숙하게 지치지 않고 날리는 모습을 보면 내공이 강호에서 다섯 안에 쉽게 드는 수준이다.
그런데 수많은 무기를 몸으로 버티면서도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걸 보면 외공 역시 극에 달했다.
더 두려운 건, 외공과 내공의 결합 수준이다. 극에 달하면 서로 통한다곤 하지만, 내공과 외공은 상반되는 길을 걷는 무공이다.
일정 수준까지 서로 품는 게 가능하지만, 경지가 깊어질수록 불가피하게 멀어지기 마련이다.
내공과 외공이 전혀 충돌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불가해한 모습은 절대 고수의 꿈을 안고 독무곡을 찾은 모든 무인의 마음에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냈다.
"불괴검왕은 보름 동안 홀로 독무곡 입구를 지켰는데, 독무곡에 진입한 자는 셋에 불과하네. 그 셋도 몇 걸음 못 가서 다른 고수 손에 죽었고."
- 작가의말
불괴검왕이 누군지 알고 싶어서 막 미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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