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독경
나돌아다니는 머저리가 집에만 박힌 똑똑이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무인은 머리보단 몸을 쓰는 쪽에 가깝지만, 힘세고 몸만 날렵해서 고수가 되는 건 아니다.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에 아무나 정확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대련으로 전투 경험을 쌓아야 하고, 결국엔 강호에 나가 실전을 경험해야 한다.
물론, 문파에서도 아무나 강호에 내보내지 않는다. 키워도 좋을 튼튼한 싹을 믿음직한 보호자와 함께 강호에 내보내 경험을 쌓아준다.
문제라면 화산파에 믿음직한 보호자가 몇 명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의 강호라면 화산의 명호에 기대 대충 배분이 높은 장로와 함께 강호에 내보내도 되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선 화산의 이름이 바닥까지는 아니어도 꽤 낮은 위치로 떨어졌고, 다음으론 세상이 예전보다 수백 배는 흉흉해졌다.
간단한 체술조차 익히지 못한 일반인들이 함정이나 독 등을 이용해 무인을 습격하는 일이 다반사다. 보통 무인은 부자라는 인식이 있고, 그게 아니어도 들고 다니는 무기로 꽤 많은 양의 식량을 바꿀 수 있다.
무려 장문인인 손청우가 직접 석군을 데리고 강호에 나온 이유다. 문파를 관리하는 일은 석람이 오히려 훨씬 잘하기에 손청우도 아무 부담 없이 자리를 비울 수 있었고.
사부와 함께 강호에 처음 나온 석군은 새로운 세상을 보며 인식을 넓혀갔다. 그 과정에 불가피하게 들어서 알던 것과 실제의 괴리 때문에 고민하게 되었고, 그런 고민을 통해 빠른 성장을 보였다.
이는 원래 아주 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만, 정서적으로 불안한 부작용이 있다.
석군은 객잔에서 화산파를 욕하는 무사들과 말다툼을 벌였고, 상대의 기습에 그만 어깨를 베이었다. 강호에 나오면서 석군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절대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이에 눈이 돌아버린 손청우가 검을 뽑았다.
"무명소졸 상대로 최선을 다할 순 없지. 다리 하나 팔 하나 안 쓰겠다."
손청우는 금계독립金鷄獨立의 자세를 취한 채 왼손을 뒷짐 졌다. 금계독립으로 다리 하나로만 몸을 지탱하기에 측면과 후면의 공격에 취약하여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었다.
상대는 기회다 싶었는지 두 명이 석군을 견제하고 남은 자들은 사방에서 손청우를 동시에 덮쳤다. 그런 자들을 상대로 손청우는 이월매화二月梅花의 초식으로 검기를 날려 얕보고 덤비는 자들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삼월이면 봄이다. 겨울에 피는 매화는 다른 꽃과 다르게 봄이 오면 시든다. 시들기를 앞둔 이월의 매화는 가장 강한 생명력을 뿜어내기에 검기를 날릴 수 있는 초식에 손청우는 이월매화라는 다소 밋밋한 이름을 붙였다.
동료들의 죽음에 흔들린 둘은 석군이 손쉽게 해치웠다.
그리고 수백 명 무인이 둘을 쫓았다. 군대와 수적이 힘을 합쳐서 만든 철혈방이라는 방파는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 공개적인 장소에서 단 두 명에게 열 명에 가까운 자가 손도 제대로 못 써보고 죽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비열한 수단을 써서라도 둘의 목을 잘라 성문에 높이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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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라 할 만한 자는 하나도 없는데 상상도 못 한 기괴한 방법으로 우릴 괴롭혔소."
손청우는 그때를 회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고, 석군 역시 이를 갈았다.
"그래서 차라리 우두머리를 제거하려고 했소. 원래 큰 나무가 쓰러지면 거기 살던 원숭이는 사방으로 흩어지기 마련이니까."
똥오줌도 편하게 못 싸는 상황에 제대로 뿔이 난 손청우는 석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방향을 바꿔 철혈방의 본진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런 편지를 찾았소."
철혈방을 붉게 물들인 손청우는 노잣돈이나 좀 챙기려는 속셈에 방주의 방을 뒤졌다. 그리고 쇠로 된 자물쇠로 단단히 잠근 함에서 서신을 발견했다.
거기엔 패도문이 철혈방에게 언제까지 어디로 모이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
"편지에 적힌 장소가 화산 근처였소. 놈들이 객잔에서 화산을 언급한 게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에 패도문이 어디 있는지 알아봤소."
대도보다 더 북쪽에 있는 음산의 패도문은 중원에 잘 알려진 문파가 아니다. 문파의 대부분 제자가 서역인 혹은 유목민으로 중원에 잘 오지도 않았다.
그러다 대도의 봉인진이 파훼되며 청동괴가 사방으로 퍼진 기회에 세력을 급속히 불려 중원으로 진출했다.
원래부터 척박한 북부인데 청동괴로 농사도 사냥도 방해를 받는 바람에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워져 어쩔 수 없이 문파를 옮겨야 했다.
중원으로 온 지 채 삼 년도 안 된 패도문이고 인원 구성이 워낙 난잡했기에 손청우는 어렵지 않게 잠입했다.
"거기에서 놈들의 음모를 엿들었소."
무언독왕이 남긴 독경毒經이 현재 독무곡에 있다.
패도문을 비롯해 수십 개 문파가 강호에 퍼뜨릴 헛소문이다.
홀로 남궁세가를 멸문하고 정의연의 수천 명 무사를 도살한 무언독왕의 무공이 출현했다는 정보를 들으면 웬만큼 욕심이 있는 자는 바로 무기를 챙겨 서쪽으로 달릴 것이다.
무룡이 독무곡의 곡주인 걸 아는 손청우는 바로 이 소식을 알리려 했다. 그런데 밖에 숨었던 석군이 놈들에게 들켜 싸움이 벌어졌고, 그때부터 패도문의 고수들이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까마귀를 불러서 바로 소식 전할게."
무룡이 바로 무언독왕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궁가의 남궁인을 비롯해 채 열 명이 되지 않는다.
남궁가의 무인 중에 혹시 눈치를 챈 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무룡이 두려워서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거다.
추향은 당백호 때문에 이 사달이 났다고 추측했다.
옥새를 찍은 편지는 명분이 된다. 아무리 힘이 우선인 난세라지만, 명분의 힘은 무시하기 힘들다.
그 명분의 힘을 등에 업으려는 자들이 황제의 옥새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덕분에 코빼기도 안 비치고 성지만 내리는 황제의 명령에 강제성이 생겼다.
난세를 바라는 누군가에겐 반갑지 않은 현상이다.
아마 놈들은 역추적하여 서신의 출처가 독무곡인 걸 알아내고 이런 계책을 꾸몄을 것이다. 무언독왕의 무공을 탐내 무인들이 독무곡에 몰려드는 틈을 타 옥새를 훔치거나 뺏거나 혹은 없애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추론을 끝낸 추향은 바로 주문을 외워 까마귀를 불렀다. 까마귀는 천방기사와 운명적으로 연결되었기에 서로 소환 계약을 맺지 않았다.
덕분에 추향은 까마귀와 소환 계약을 맺었다. 세상 어디서든 주문만 정확히 외우면 일정 법력을 대가로 까마귀를 불러올 수 있게 되었다.
'이게 심마가 되진 말아야 할 텐데.'
눈을 살며시 감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는 추향을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는 석군. 그런 석군의 모습에 손청우는 심마로 남지 않길 바랐다.
아무리 편애해서 생각해도 추향의 짝으로 석군은 전방위적으로 너무 모자랐다.
"제길. 문제가 생겼어."
주문을 다 외우고 한참 기다리던 추향이 발을 구르며 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문제요?"
"진법인지 법술인지 모르지만, 이 일대를 누군가가 봉쇄했어."
"그렇다면 더욱더 빨리 빠져나가서 소식을 전해야 하오."
진법과 법술에 관해 손청우도 들은 바가 있다. 그러나 법술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재밌는 이야기고 진법에 관한 소문도 과장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동괴가 생기고부터 술사들의 활동이 잦아져서 법술도 무공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일로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술을 사용하는 술사는 보기 드물다. 술사 대부분이 구주의 남은 여섯 도시 근방에만 머물며 안에 생긴 요괴와 마물을 처리하는 데 몰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술사들의 법술이 신묘하긴 해도 일정 경지에 이른 무인 상대로는 큰 힘을 쓰지 못한다. 대부분 법술이 전투나 살상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벽을 뚫고 지나간다거나 몸을 숨긴다거나 등 신기한 게 대부분이지 공격적인 부분에선 무공에 한참 못 미쳤다.
이렇듯 대부분 술사의 능력으로 비추어 보면 일정 범위를 봉쇄하는 법술 혹은 진법은 쉽게 펼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대단한 자를 이렇게 쉽고 빠르게 동원했다는 건 이번 일의 배후가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괜찮아. 마교와 독무곡의 저력을 무시하지 마."
정의연에 한 번 크게 패한 마교이긴 하지만, 수백만이나 되는 충성심 가득한 교도를 보유했기에 회복이 빨랐다.
그리고 세세겁화봉을 잃은 당시 마교가 독무곡에 몸을 숨기고 정의연과 싸웠다. 그 과정에 독무곡은 나는 새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할 정도로 철옹성이 되었다.
"왠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린 것 같소."
"뭔지 알아. 그리고 엄마나 아빠라면 바로 알아챌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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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향의 예상대로 추영은 강호의 소문을 듣자마자 당백호의 목숨과 옥새를 노린 누군가의 계략임을 바로 알아챘다.
"부군. 이제 그만 수련을 열심히 하여 공력을 회복해야겠습니다."
독무곡에 돌아온 무룡은 의술과 침술 그리고 독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마저도 열심히 안 하고 툭하면 사람을 불러 술판을 벌였고, 무공 수련은커녕 산책도 게을리했다.
"나는 아무래도 전생에 많은 빚을 세상에 진 것 같소."
쉬는 것도 수련이다. 수련으로 길든 정신과 몸이 휴식을 통해 외연의 확장을 가져올 수 있고, 그렇게 커진 그릇을 채우는 과정에 새로운 걸 깨닫는다.
무룡은 단지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것을 담았기에 다른 사람보다 휴식 기간이 훨씬 길었을 뿐이다.
"이번 생에 소녀를 만났으니 다음 생에도 고생하겠네요."
"다다음 생에도 고생해도 좋으니, 부디 부인을 또 만났으면 좋겠소."
그렇게 둘이 화기애애하게 깨를 쏟고 있을 때, 천방기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우, 큰일이다. 내 제자의 종적이 사라졌다."
추향은 석군과 손청우와 함께 화지위뢰畵地爲牢의 법술에 갇혔다. 추향의 추측처럼 봉쇄한 게 아니라 세상과 분리한 것이기에 하계의 술사 중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실력자가 된 천방기사도 찾을 수 없었다.
"형님은 하던 일을 마저 하시오. 향아의 행방은 우리 부부가 찾겠소."
"고맙구나. 잘 부탁한다."
용건을 마친 천방기사는 훨훨 날아서 사라졌다.
"우리 딸인데 고맙기는."
추영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만큼 우리 아이를 아낀다는 뜻이 아니겠소."
"어디서 객사할 아이는 아니니 급할 것 없어요. 부군은 일단 공력부터 회복하세요. 저도 강호행을 준비할게요."
- 작가의말
사장이 직접 영업을 뛰어야 할 정도로 세상이 흉흉합니다. 화산파 사정도 조금 딱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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