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추영
남궁세가의 무사복으로 갈아입은 무룡은 삿갓을 깊이 눌러쓰고 추영이 탄 마차 뒤를 따랐다.
'여긴 뭐지? 천당인가?'
장안을 한 번도 구경한 적 없는 무룡이다. 중간에 말을 팔려고 큰 도읍에 들르긴 했지만, 분변 냄새가 심한 마시장이 번화가에 있을 리 없다.
촌놈을 능가하는 화산의 시골 소년은 처음 보는 소주의 번화한 거리에 정신을 못 차렸다.
다행히 남궁세가의 규율이 엄정하여 뜨내기 무룡을 비웃는 사람이 없었다.
가끔 아이들이 달려와 무사의 옷깃 혹은 검에 달린 수술을 만지고 도망쳤다. 남궁세가 무사들은 익숙한 일인지 여상스럽게 대처했다.
마차 바로 뒤에서 걷는 것도 있지만, 무룡의 어마어마한 덩치 때문에 접근하는 아이가 없었다. 꿈에서조차 본 적이 없는 번화한 시가지 풍경에 넋을 반쯤 잃은 무룡에겐 참으로 다행이었다.
'정기관보다 열 배는 더 크겠다.'
일행은 무룡이 이제껏 본 가장 큰 건물인 옥녀봉의 정기관보다 훨씬 큰 장원 앞에 멈췄다. 실제로 정기관의 삼십 배 크기의 면적을 차지한 남궁세가 소주 분가였다.
"소주와 양주는 분가라서 항주의 본가보다 훨씬 작단다. 여기만 보고 남궁세가가 별 볼 일 없는 곳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돼."
말을 하인 손에 넘긴 남궁인이 다가와서 농을 걸었다. 그러나 반쯤 정신이 나간 무룡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혹시 세가에 금광이라도 있습니까?"
대문 안에 들어온 남궁세가 무사들이 끝내 못 참고 배꼽을 잡았다. 깔보아 비웃는 게 아니라 오랜만에 듣는 순수하고 직설적인 화법에 웃음 주머니가 터진 것이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여긴 내 지인의 아들 무혼과 딸 춘영이다. 지금까지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무공만 수련하다가 큰 세상을 보러 나왔다. 강호를 유람하다가 갑자기 경지가 크게 상승할 고비가 와서 잠시 남궁가에 몸을 기탁하러 온 거다."
무사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경지가 크게 상승한다는 말은 그냥 무인이 아닌 고수의 반열에 발을 들인다는 뜻이다. 약관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벌써 강호 어디에서도 고수로 인정받는 경지로 진입한다는 말에 흠모의 마음이 절로 일었다.
"내 지인은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강호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다. 괜한 소문이 퍼져서 간악한 무리가 꼬이지 않도록 입단속을 철저히 하여라."
"받들겠습니다."
관의 요청으로 황하 상류 지역에 소금을 나르는 배를 호송하고 두 달 만에 돌아온 무사들은 바로 해산하고 각자 집으로 갔다.
무룡과 추영은 장원의 가장 북쪽에 있는 단독 별채에 짐을 풀었다. 방이 다섯 개나 되고 비단 이불에 도자기들도 비싸 보였다.
무룡은 몰랐지만, 삼백 년 자란 홍목으로 만든 탁자는 은자로 백 냥인데 없어서 못 구한다.
방 구경을 마친 무룡은 바로 비단 이불을 덮고 잠에 빠졌다. 관선의 침대가 불편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흔들림이 없을 수 없고 별채의 침대처럼 크고 편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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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찾아갔는데 곤히 자는 듯해서 깨우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다녀가신 줄도 모르고 혼몽했군요."
"너무 예를 차리진 말아라. 네 사부한테 빚진 내 목숨을 갚는 거라고 편히 생각해라. 그래야 나도 편하다."
남궁영천은 예의를 차리며 거리를 두고 남궁인은 친근하게 다가가는 방식이었다. 강호초출에 심기가 단순한 무룡은 두 노강호의 거미줄에 걸려 발버둥도 치지 못했다.
"삼촌께서 분가주와 다른 장로들을 설득하고 있다. 내 권한으로도 널 지원할 수 있지만, 세가를 설득하면 더 확실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고마움을 마음에 간직하고 더는 입에 올리지 않겠습니다. 이후 작은 성취라도 얻어 힘이 생기면 꼭 보답하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고맙구나."
남궁인은 무룡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
"우리 형제는 총 열일곱인데 여자들은 다 시집가고 남자 형제만 남았다. 그중 몇 명은 양주 분가나 항주 본가에 있고 소주 분가엔 우리 여섯이다."
무룡은 남궁인의 형제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여긴 내 정실부인이고 이 셋은 첩실이다. 내가 맨날 밖을 나돌다 보니 아직 아이는 없구나."
처음 겪는 분위기에 무룡은 시종 굳은 얼굴로 뻣뻣한 움직임을 보였다. 특히 남궁인 형제의 자식들이 무룡을 훔쳐보며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자주 하는 바람에 더욱 긴장했다.
'추영 말대로구나.'
미리 귀띔받지 못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테지만, 남궁인과 그 형제들이 은근슬쩍 여식 자랑을 하며 자신의 반응을 살피는 걸 알아챘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바다로 오해받을 정도로 큰 태호와 가까워 물산이 풍부하고 운하가 지나는 교통 요충지이기까지 한 소주는 말 그대로 없는 걸 빼면 다 있었다.
비록 남궁인의 가족 식사지만, 무룡이 들어본 적도 없는 신기한 음식이 가득했다.
색도 좋고 향도 좋고 맛도 좋은 음식이건만, 잔뜩 긴장한 무룡은 고기를 씹어도 고소함을 모르고 두부를 먹어도 부드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를 정신 없는 저녁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며 담소까지 나눈 무룡은 양손을 뒤로 묶고 조양봉을 등정한 사람처럼 축 늘어져 별채로 돌아갔다.
"꼴을 보니 여간 험난했던 게 아니구나."
"사람이 아니라 잡아먹으려고 내놓은 돼지를 품평하는 눈빛이었어. 비참하고 무서웠다고. 우리 그냥 떠나자."
"사내가 마음이 그리 약해서 어디에 쓰겠니."
어떻게 구했는지 추영이 꿀물 한 대접을 무룡에게 권했다. 달콤한 꿀물을 마시니 갑갑하던 마음이 풀리고 더부룩하던 속도 괜찮아졌다.
"나에 대해서도 많이 물었지?"
"응. 시킨 대로 네가 사부의 의붓딸이라고 했어. 양친을 잃고 사부를 찾아와서 몇 년 전부터 화음현에서 키웠다고 말했어."
추영은 남궁가가 자신의 가짜 신분을 알아내는 데 걸릴 시간을 계산했다. 화음현은 약초꾼과 사냥꾼이 많이 지나다니고 화산에 볼일이 있는 사람도 자주 드나든다.
외지인이 많은 곳이어서 화음현에 춘영이라고 불리는 계집이 살았는지 확실히 알아내려면 최소 달포는 걸릴 것이다.
거기에 소주부터 화산까지 왕복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두 달 정도로 추측된다.
'충분하지.'
추영은 처음부터 남궁가의 저의를 의심했지만, 아는 정보가 적어서 무슨 꿍꿍이인지 유추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이용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에 무룡에게 남궁가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시기가 성숙하면 무룡과 함께 남궁가를 떠날 생각이다.
"넌 당분간 수련에 집중해. 남궁가의 저의가 뭔지는 내가 알아볼게."
자존심이 센 무룡에게 남궁가의 호의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추영이 강하게 주장하자 고집을 부리지 않고 따르기로 했다.
무룡의 머리로는 어느 선택이 바른지 알 수 없기에 자기보다 총명하고 믿을 수 있는 추영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식사를 핑계로 남궁인 형제의 여식들과 얼굴을 익혔다. 그러나 무룡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남궁인은 결국 포기하고 무룡을 세가에 넘겼다.
"전후 사정을 다 들었네. 남궁가에 있는 동안 몸도 마음도 편하게 지내시게."
남궁가의 대장로가 직접 무룡을 만나 덕담했다.
그뒤로 무룡은 남궁세가 소주 분가의 여러 가문을 순회하며 장원에 사는 남궁가의 모든 여식을 만나봤다. 모두 남궁의 성을 쓰지만, 계파는 제각각이었고 성격과 말투도 조금씩 달랐다.
'제갈무후가 신기묘산으로 앞일을 척척 알아맞힌다고 들었는데, 추영이 바로 제갈량이 아닌가 싶구나.'
일의 진행이 추영의 예측대로 흘러가자 무룡은 적잖이 놀랐다.
그러는 중에 추영도 놀고만 있지 않았다. 분과 연지 그리고 꿀과 꽃가루로 화장하는 비법을 미끼로 삼아 남궁세가의 여식들은 물론 귀부인들까지 휘어잡으며 종횡무진으로 활동했다.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남궁가 사람들과 식사하는 무룡보다 추영이 얻는 정보가 훨씬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그렇게 달포가 지나면서 무룡은 점점 남궁가의 생활에 적응했다. 추영이 수작을 부려 남궁가의 여식들이 무룡을 싫어하게 만들었기에 식사 자리도 그렇게 부담되지 않았다.
마음이 편해지니 수련에 진전을 보였고, 자하신공 일 단계의 완성이 보이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명확히 보였다.
'일 단계 성취를 이루면 추영을 은거지로 보내주고 난 자하동으로 돌아가야겠다. 남궁가의 호의는 고맙지만, 자하신공의 다음 단계에 이르려면 반드시 자하동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추영의 생각은 달랐다.
"슬슬 여길 떠나야겠다."
"갑자기 왜?"
"순수한 호의가 아니고 꿍꿍이가 있는 거 같아."
무룡의 촉이 드물게 발동했다.
"내가 보기엔 네가 꿍꿍이를 품은 것 같은데?"
추영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고, 솔직히 얘기해서 무룡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그간 남궁가의 창고를 조사했어. 내일 주루와 점포 그리고 상인들에게서 세금이 들어오는 날이래."
"응?"
"내가 말했잖아. 부잣집 하나 털어서 자금을 마련하면 바로 은신처로 갈 수 있다고."
"그 돈을 도둑질하려고?"
"내일 저녁에 필요한 만큼만 빌릴 거야. 사정이 되면 갚을 거고. 이렇게 큰 장원을 세 개나 보유한 곳인데 고작 은자 수백 냥으로 문제가 생기진 않아."
무룡은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추영이 나쁜 짓을 하겠다고 하니 왠지 괴로웠다.
"어딘데 돈 없으면 못 가는 거야?"
"말을 타면 여물값이 들고 배를 타면 뱃삯이 들잖아. 하다못해 걷더라도 신발값이 있어야 해. 자세한 건 얘기 못 하지만, 돈이 꼭 필요해."
"차라리 솔직히 말하고 빌리자."
"멍청이. 남궁가에서 널 곱게 놔줄 것 같아? 진짜 목숨을 빚져서 널 돌봐준다고 생각해? 저들도 다 속셈이 있는 거라고."
- 작가의말
김용 선생은 실패한 혼인을 여러 번 겪으면서 아주 환상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었습니다. 황용, 소용녀, 조민, 임영영 등이 있죠.
실패가 뭔지 모르는 저로선 여성 캐릭터를 구축하는 게 참 힘듭니다. 그래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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