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강호
천방기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쭉한 약을 국자로 휘휘 저었다.
자하구가 무룡의 몸에 들어가고 육 년이 흘렀다.
양의 성질인 자하괴독을 순양공이 제어하고 음의 성질인 이룡의 독은 마환기공이 제어했다. 거기에 독룡유가 끊임없이 독룡담으로 독을 보내면서 일정한 흐름이 생겼다.
거기에 천방기사가 먹인 약들 덕분에 무룡이 용케 목숨을 부지했다.
위기 상황에 자하구도 빠르게 성장했다. 점점 많은 기운을 안정적으로 품게 되며 나름대로 균형을 맞춰갔다.
덕분에 시간이 얼마 안 흘러 말은 못 해도 눈을 뜨고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이는 수준으로 회복했다.
천방기사는 그런 무룡을 천환서고에 데려다가 책을 읽게 했다. 어차피 생각만 해도 책장이 절로 넘어가기에 눈만 뜰 수 있으면 아무 지장도 없었다.
무룡은 책의 지식을 흡수하여 독을 점점 훌륭하게 제어했다. 그래서 육 년이 조금 지난 현재 말은 여전히 못 하지만 팔다리를 움직일 정도까지 회복했다.
"이 구룡탕이면 아우 몸이 한결 나아지겠지."
지네, 지렁이, 뱀, 잉어 등 길쭉한 것들 아홉 가지를 온갖 약초와 함께 끓인 탕이다. 이름만 구룡탕이지 실제론 순수하게 약초의 효용뿐이다. 용을 닮았다며 넣은 아홉 짐승은 그냥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구룡탕을 들고 천환서고에 도착한 천방기사는 놀라움에 사흘 내내 정성껏 달인 약을 쏟치고 말았다. 천환서고를 떠나기 전만 해도 거동이 불편하던 무룡이 사라졌다.
"목숨 걸고 아우를 찾아야겠다."
자하구가 품은 독은 세상을 절반 죽이고도 남을 정도로 많다. 혹시 무룡이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흑석산도 천방기사의 목숨을 지켜주지 못한다.
황급히 여행에 필요한 것들을 챙긴 천방기사는 가장 먼저 마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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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눔아, 말 좀 해."
벽력문주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무룡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나 무룡은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제가 해보겠습니다."
벽력문 넷째가 나섰다. 그날 무룡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세상을 구한 공이 인정받아 다음 대 벽력문주로 내정 받았다.
소문주가 된 벽력문 넷째는 훨씬 의욕적으로 변해 모든 일에 나서고 싶어 했다.
"필요한 게 있어?"
무룡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필요한 게 있답니다. 내줄 겁니까?"
"대답도 안 했는데 무슨 소리냐."
"마음이 통했습니다. 필요한 게 있어서 왔답니다."
"귀찮으니까 그냥 내줘."
소문주는 다시 질문했다.
"그게 혹시 영약이야?"
"벽력단을 줄까?"
문주의 참견에 소문주가 손사래를 치며 가만히 있으라고 닦달했다.
"영약 아니면 검 줄까?"
"벽력검 새로 만든 거 있는데 줘서 보내."
"검도 아니라고? 그럼 혼원수를 알려줘?"
"그건 안 된다."
"설마, 법보가 필요한 거야?"
벽력문주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들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아버지, 무룡이 아는 우리 벽력문의 법보가 뭐 있습니까?"
"그 괴물 상대할 때 자모침 보여준 거 빼곤 딱히."
"그거랍니다. 어서 벽뇌자모침을 무룡에게 주세요."
"그건 안 된다."
벽뇌자모침은 벽력문의 법보가 아닌 벽력문주 화뇌의 법보다. 벽력문 소유라면 아쉬운 마음으로 내줄 수 있는데, 개인 소유여서 내주기 너무 아까웠다.
"아버지. 뇌공의 당부를 잊으셨습니까."
여동빈과 달리 뇌공은 천계로 간 신선이다. 천계와 하계가 천라지망으로 완전히 분리되었는데 꿈을 통해 말을 전했다.
무룡을 전력으로 도우라고.
천계에서 하계로 말을 전하느라 얼마나 많은 법력이 아깝게 소실되었을지 짐작도 안 간다. 그러니 무룡이 마누라를 달라고 해도 애써 웃으며 내줘야 하는 게 벽력문 공식 입장이다.
"제길."
벽력문주가 소매에서 벽뇌자모침을 꺼내자 무룡이 손을 내밀었다. 혹시나 아들이 장난치는 게 아닐까 하던 일말의 기대마저 사라진 화뇌는 자모침을 넘기자마자 슬픈 몸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모침을 받은 무룡은 모침을 자기 배에 꽂았다. 그리고 자침을 모침에 넣은 다음 소문주를 멍하니 바라봤다.
"천뢰가 필요해? 용뢰? 사뢰? 호형뢰?"
온갖 이름을 대던 소문주가 얼굴을 굳혔다.
"설마 전신뢰戰神雷?"
벼락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전신. 가장 강하고 빠른 벼락으로 알려진 전신뢰. 이걸 펼치려면 벽력문에도 몇 알 없는 혼원벽력주를 소모해야 한다.
"친구, 너 그러다 죽어."
한참 무룡의 눈을 들여다보던 소문주가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뭐가 그리 자신감 넘쳐."
그때 화뇌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다시 나타났다.
"혼원벽력주는 안 된다. 그거 이천 년 동안 겨우 다섯 알 찾아냈는데."
그날 벽력문 넷째는 혹시나 괴물을 처리하지 못할 경우를 걱정해 혼원벽력주를 들고 대기했다. 혼원벽력주라면 괴물이 심장이 두 개 남아도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 위력을 자신하는 혼원벽력주를 이렇게 소모하는 것도 아깝고, 무룡에게 쓰는 것도 주저되었다. 괴물의 심장 두 개를 없앨 위력을 무룡이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그냥 쏘아도 모르겠는데 벽뇌자모침으로 몸속에 넣으려니 더욱더 걱정이었다.
"진심이야? 안 그럼 큰일이라고? 네가 용이 돼?"
"용이 되다니 무슨 소리야?"
"시간이 더 흐르면 자기가 여의주의 짝이 된다는데, 무슨 개소린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엔 화뇌가 난리 피울 차례가 되었다.
"빨리, 혼원벽력주를 써서 전신뢰를 불러. 저놈이 하자는 대로 해. 저놈이 용이 될 거면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나아."
소문주는 한참 더 주저하다가 입에서 구슬 하나를 토했다. 벽력문 전체에서 유일하게 혼원벽력주를 다루는 소문주여서 보관하는 임무도 맡은 것이다.
"무생유, 유원일, 일생이, 이연삼, 삼생만물."
무에서 유가 생기고 유는 하나였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으로 번성하더니 어느새 만물이 되었도다.
소문주의 주문에 따라 벽력혼원주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안에 꽉 뭉친 벼락이 드러났다.
"바람보다 빠르고 불보다 뜨겁고 물처럼 형상이 없고 나무처럼 뿌리를 내린다. 혼돈 이래 최강의 전사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전신이어라."
혼원벽력주가 품은 벼락의 힘이 주문에 반응하여 위력이 가장 강하다는 전신뢰가 되었다. 전신뢰는 바로 벽뇌자모침의 자침에 반응했다.
전신뢰를 품은 자침은 바로 모침의 속을 통해 무룡의 몸에 들어갔다.
자침이 멈춘 위치는 단전이었다.
"어어."
화뇌가 경탄했다. 자침이 무룡의 몸속으로 사라지자마자 모침도 무룡의 몸으로 들어가 버렸다.
"인간의 몸으로 법보를 흡수하다니."
벽뇌자모침과 전신뢰를 흡수한 무룡은 그대로 몸을 돌려 천천히 걸었다. 뭔가 천재지변에 준하는 변화가 무룡의 몸에서 나타나려니 하고 기다리던 화뇌와 소문주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멀어지는 무룡을 입을 헤 벌리고 바라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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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기사는 세세겁화봉으로 갔다가 황급히 도망쳤다.
세세겁화봉은 마교가 아닌 정의연이 차지하고 있었다. 정의연은 중원 출신이 대부분이기에 천방기사한테 원한을 품은 자가 있을 가능성이 마교보다 천 배 정도 많다.
보이는 공격은 안 무섭지만, 화무룡 정도만 돼도 기습으로 천방기사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
천방기사는 더 신중하게 움직여 독무곡으로 갔다. 독무곡 입구는 열 개가 넘은 진법으로 보호되었다.
다 대단한 진법이긴 한데, 천방기사 눈엔 삼척동자의 소꿉장난으로 보였다.
진법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통과한 천방기사의 눈에 옥신각신 다투는 두 청년이 들어왔다.
"사형, 사내가 손이 고와서 뭐 합니까."
보통 시커먼 사내자식이라고 하는데, 대화하는 두 남자는 손이 진짜로 시커멨다.
"매화가 싫다잖아. 가슴 못 만지게 하잖아."
천방기사는 눈에 기운을 모아 관찰했다. 둘은 마교의 흑응조를 약간 변형하여 익혔는데 화후는 각각 오 성과 삼 성 정도로 보였다.
사형이라는 작자가 삼 성으로 화후가 사제보다 낮았다.
"고작 가슴 만지겠다고 약물을 새로 개발하라고?"
천방기사는 사제라는 남자한테 흥미를 느꼈다. 아직 서른도 안 된 것 같은데 흑응조를 수련하는 데 필요한 약물을 바꾸다니.
처음 가류를 봤을 때 느낀 그 흥분이 떠올랐다.
"약초 세 개만 바꾸면 돼."
기척도 없이 다가와 대화에 불쑥 끼어든 천방기사 때문에 덕구와 계혼은 깜짝 놀라며 물러섰다.
"나 독무곡주 찾으러 왔다. 무룡이 내 아우야."
"사부님 지인이셨군요.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저희도 사부 못 본 지 육 년 넘었습니다."
"내가 데리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사라졌다. 여기로 온 거 아니었어?"
"사부는 건강합니까?"
"말을 못 해. 그리고 몸에 세상을 없앨지도 모를 막대한 양의 독을 품고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볼 때까지만 해도 팔다리를 겨우 움직였는데 어떻게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계혼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사부는 언제 죽을지 모를 위험에 처했는데 자신은 매화 가슴을 만질 생각이나 하고 있다.
"마교 소교주 여기 있어?"
"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냥 물어본 건데? 무룡 아우 찾는 데 도움 좀 받으려고."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리 치밀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검극과 싸워 오십 합이나 버틴 소교주의 무력을 믿기에 크게 주저하지 않고 천방기사를 안내했다.
"은밀한 얘기니까 단둘이 하자."
소교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주는 그날 검극에게 가슴을 뚫린 다음 사라졌다. 소교주가 어떻게든 버티려 했으나 검극의 공격을 오십 합 정도 받는 게 한계였다.
그마저도 검극이 심검을 연속으로 펼치며 약해진 덕분이었다.
결국엔 세세겁화봉을 포기해야 했고, 무룡의 지시로 독무곡 제자들이 오래전부터 준비한 피난처에 몸을 숨겼다.
목적을 달성한 정의연도 세세겁화봉을 차지한 후 굳이 큰 희생을 치르면서 소교주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육 년 동안 독무곡에 숨어서 쌀만 축내고 있는 거였다.
"그날 검극이 물어본 말 무슨 뜻이야? 사마월이냐는 그 말."
"몰라서 묻는 건가, 알아서 묻는 건가?"
"사마월, 사마영. 쌍둥이잖아. 사마영이 마교 교주고."
"교주가 가짜였어. 내 아버지 사마영이 아니라 쌍둥이 형 사마월이었어."
"월영심법인가?"
"그렇지."
쌍둥이만 익힐 수 있는 괴이한 무공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 무공의 이름이 월영신공이었다.
사마월과 사마영 형제는 월영신공을 익혀 서로 무공을 공유하게 되었다. 사마월이 익힌 무공을 사마영이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반대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내공을 수련해도 한 명이 하면 둘 다 늘고 둘이 같은 심법을 수련하면 효과가 몇 배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무공을 익히고 같은 힘을 품어도 우열은 명확했다. 자질이 훨씬 뛰어난 사마영이 결국 마교 교주가 되었고 사마월은 자취를 감췄다.
"설마 월영신공이 기억을 공유하는 수준에 이른 건 아니겠지?"
"나도 당신처럼 아는 게 없다. 그저 삼십 년 전쯤에 교주 혼자서 괴물을 죽이겠다고 나섰을 때 바뀐 게 아닌지 의심할 뿐이다. 근데 이거 무룡 찾는 거랑 무슨 상관이지?"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은 거고, 본론은 아직 시작 안 했어."
- 작가의말
벙어리 삼룡이 말고 무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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