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식의원
추영은 시녀들이 이마를 맞대고 수군거리자 궁금함을 못 이겨 몰래 다가갔다.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
"그림으로 그리면 다 잘생겨 보여. 매화 너도 그림으로 그리면 시집오라는 남정네가 줄을 설걸?"
갑자기 뒤에서 쿵 소리가 들리자 시녀들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낯이 하얗게 질린 추영이 멍한 눈으로 쓰러져 있었다.
아파선지 넘어진 게 창피해선지 눈가에 눈물도 고였다.
"성녀 언니, 괜찮아요?"
추영의 눈과 귀가 되어 온갖 정보를 물어오는 두 시녀는 일부러 거리를 두며 호칭도 성녀로만 불렀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추영을 돌보는 시녀들은 친근하게 언니라고 했다.
"너희 그거 뭐야?"
"독무곡 신임 곡주래요. 괴물 곡주는 독을 만들어 먹고 죽었대요."
가류가 죽은 건 추영도 들어서 알고 있다.
"독무곡 곡주면 용한 의원이겠지? 요즘 자꾸 식욕도 없고 머리가 어지러운데."
무룡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부터 식사량이 두 배로 는 추영이다. 그러나 시녀들은 추영이 아프다는 말을 의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성화전에 있어요. 제가 불러올게요."
그림을 보고 잘생겼다고 칭찬하던 매화가 치마를 걷고 뛰었다.
"어휴. 시집가겠다고 맨날 노래 부르는 년이 저리 경망해서야."
시녀들이 혀를 쯧쯧 찼다. 치마만 안 입으면 사내로 여길 정도로 성격이 콸콸한 매화다.
"너희는 다과를 준비하거라."
한편.
무룡은 예전에 후문영이 소교주에게 전하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성화령이 없다는 의미 모를 말인데 지금껏 잊고 있었다.
'아직 상대의 꿍꿍이를 모르니 일단 얘기하지 말자.'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의형제를 맺긴 했는데 소교주의 의도가 뭔지 확실치 않아 일단 후문영이 했던 이야기는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난 오살공五殺功을 익혔거든. 이 무공의 약점은 죽이는 것밖에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화무룡 그놈한테 당했어. 교주께서 화무룡이 자하신공을 익혔는지 알아내라고 했거든. 그리고 절대 죽이지 말라고 했어."
"자하신공은 왜?"
"그건 말해줄 수 없어. 근데 너도 알 텐데? 우리한테 정보를 준 게 가류거든."
화무룡이 나쁜 것 하나 안 보고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면 소교주는 볼꼴 못 볼 꼴 다 봤는데 심성이 바르게 자란 장난꾸러기 같았다.
'마교에 나쁜 놈이 많은 건 맞지만, 무조건 나쁜 건 아니구나.'
진짜 갈 데 없는 놈들만 모인 독무곡도 살기 좋아지니 대부분 착하게 행세한다.
'지시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게 교주일까 소교주일까?'
후문영이 했던 말에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근데 넌 내상을 치료 안 해?"
"오살공은 정신만 차리면 알아서 움직여. 그래서 난 잘 때를 빼면 무적이야."
무룡은 오살공이 어떤 무공이고 왜 이름이 오살공인지 묻고 싶었지만, 아무리 의형제를 맺었다고 해도 첫 대면에 무공을 캐묻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 이만 가봐야겠어. 경공을 몰라 독무곡까지 말을 타고 가야 하거든."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이어서 어두우면 움직이지 않는다.
"너 외공을 익혔는데 뭐가 잘못됐다고 했지?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날 불러. 내가 때리는 거 하나는 기막히게 잘하거든."
"소교주가 그렇게 한가해?"
"그럼. 교의 일은 장로들이 다 알아서 해. 교주도 사실 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소교주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무곡 곡주가 된 무룡은 매일 뭔가를 확인하고 결정하고 해결해야 했다.
"다음에 또 보자. 진짜 간다."
무룡은 소교주한테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초면인데 낯선 느낌이 없었고 친근한 감정이 들었다.
'마교에는 사람 마음을 홀리는 요사한 무공이 많다고 했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조심하자.'
기억력을 더듬어 성화전 밖으로 나가는데 치마를 살짝 걷어 올린 소녀가 큰 보폭으로 달려 무룡에게 접근했다.
"독무곡의 잘생긴 의원님 맞으시죠?"
"독무곡 의원은 맞습니다."
"성녀께서 몸이 불편합니다. 어서 절 따라오세요."
말을 마친 소녀는 무룡의 동의도 얻지 않고 몸을 돌려 달렸다.
'진짜일까?'
가빠지는 숨을 애써 가다듬는 무룡의 머리에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함정은 아니겠지?'
자신이 성화전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추영이 사람을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무룡이 아는 정보에 따르면 성녀는 모종의 이유로 갇혀 지내며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함정이면 어때.'
그러나 추영을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생각을 다 지웠다. 설사 상대가 함정이라고 알려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따라가고 싶은 심정이다.
빠른 걸음으로 소녀를 따라간 곳은 성화전의 중심에서 동남쪽에 있는 장원이었다.
"누구지?"
문에는 보초를 서는 무사가 둘 있었다. 꽤 멋진 검은 장포를 입은 두 무사는 그저 문을 지키기에 아까운 사람으로 보였다.
"독무곡의 곡주예요. 성녀께서 아파요."
성녀가 아프다는 말에 두 무사는 무룡을 순순히 안으로 들여보냈다.
'예상했던 것처럼 나쁜 상황은 아닌데?'
무룡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원의 넓은 마당은 온갖 종류의 나무로 가득했다.
"성녀께서 나무 키우는 걸 좋아해요."
숲 사이에 난 좁은 길이 끝나고 집 몇 채가 나타났다. 무룡은 가장 큰 건물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만요."
눈이 앙칼지게 째진 시녀가 그림을 들고 무룡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무룡 본인이 맞는지 확인하는 절차로 보였다.
"성녀는 심약한 분이십니다. 놀라지 않게 언행을 조심하세요."
무룡은 너무 떨려 입을 열 엄두를 못 내고 고개만 끄덕였다.
시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주발 뒤에 앉은 추영이 보였다. 주발에 가려져 얼굴이 전혀 안 보이고 형체도 흐릿하지만, 무룡은 냄새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독무곡 신임 곡주가 성녀께 인사드립니다."
최대한 마음을 다잡은 것 같았는데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가까이 와서 앉으세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가슴이 울컥했다. 무룡은 떨림을 감추려고 작은 보폭으로 조심스럽게 걸어서 탁자 앞의 방석에 앉았다.
"다과를 드세요."
접시에 놓인 과자 두 개를 한입에 먹어 치운 무룡이 찻잔도 단숨에 비웠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않고 삼킨 게 하필이면 녹두 과자였다.
주발 앞에 선 두 시녀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대부분 사람이 성녀 앞에서 보여주는 흔한 모습이어서 딱히 무룡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진맥을 부탁합니다."
추영이 주발 사이로 왼손을 내밀었다. 무룡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굵직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손목에 얹었다.
아주 건강했다.
"처방전을 적어드리겠습니다."
"넌 가서 지필묵을 가져오고 넌 의원님이 좋아하는 과자 한 접시 더 내오거라."
두 시녀가 추영의 지시를 받고 방을 나갔다.
시녀가 사라지자 추영이 주발을 걷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는 추영의 얼굴을 보며 무룡은 내심 감탄했다. 전혀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추영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목소리엔 떨림이 하나도 없었다.
추영이 갑자기 상의를 걷었다. 비록 부부 사이지만, 갑자기 배를 걷는 추영의 행동에 무룡은 기겁했다.
"아이를 낳은 날, 탯줄을 자른 가위로 자궁을 찔렀어요. 그때부터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 되었죠."
추영의 배에 흉물스러운 상처가 있었다. 힘겹게 참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난 지금까지 뭘 망설였던 거지?'
추영은 결백을 지키려고 자궁을 찔러 여인임을 포기했다. 그런데 자신은 악인이 분명한 대제자를 죽이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자신과 주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류를 죽인 것도 못내 찝찝하게 생각했다. 아직도 협의나 양심 따위를 버리지 않은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때 추영이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아니, 글자를 모른다고요? 어떻게 의원이 글자를 모릅니까?"
할 말을 마친 추영이 걷었던 주발을 다시 펴고 자리로 돌아갔다. 무룡도 황급히 눈물을 닦고 마음을 진정했다.
녹두 과자와 지필묵을 가지러 갔던 두 시녀가 돌아와서 계속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무룡을 힐끔거렸다. 무룡의 눈가가 붉은 걸 보고 글자를 모른다고 성녀한테 혼난 것 때문에 울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처방을 쭉 불러주세요. 제가 적을게요."
추영이 붓으로 먹을 듬뿍 찍으며 말했다.
"당귀 셋, 사삼 셋, 천엽자 둘."
무룡은 소화를 돕는 처방 열 개를 연속으로 읊었다.
"끓이는 방법도 알려주셔야죠. 가서 종이를 더 가져오고, 넌 차를 덥혀 오거라."
두 시녀가 나가자 추영이 주발 사이로 종이 한 장을 무룡에게 건넸다. 무룡은 황급히 추영이 건넨 종이를 소매에 넣었다.
"사삼은 팔팔 끓인 다음 반 각 정도 식힌 물하고 섞어 빻아서 즙을 내면 됩니다. 당귀는 물에 넣고 끓여야 하고 천엽자는 물이 끓은 다음 넣어야 합니다."
무룡은 약초를 끓이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좋아요. 효과가 좋으면 다음에도 찾을게요. 매화야, 의원한테 치료비를 드리거라."
"글자도 모르는 의원한테 줄 돈은 없네요."
그림을 보고 호감을 느꼈던 매화는 무룡이 글자를 모른다는 말에 심통이 났다. 무룡은 전혀 모르는 사이에 매화의 신랑감 후보가 됐다가 잘못한 것도 없이 제명당했다.
"치료비예요."
다른 시녀가 은두 두 개를 챙겨줬다. 무룡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원치 않는 걸음을 옮겨 장원을 떠났다.
'꿈은 아니겠지?'
안에 최소 일각은 있었는데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누군가가 무룡의 머릿속에서 가위로 방금 있은 일을 잘라낸 것처럼 추영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배의 흉터를 빼면 떠오르는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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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동에 괴물을 제압할 비밀이 있습니다. 그걸 찾지 못하면 우리 아이가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질지도 모릅니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무룡은 자꾸 약해지는 마음을 채찍질하며 뭐가 중요한지 자신을 일깨웠다.
'자하동의 비밀이 이거였구나. 자하신공을 익힌 자를 확보하려는 것도 이거고. 후문영은 누구의 지시를 받고 자하신공을 익힌 사람을 없애려 했을까?'
정보가 적으니 그럴듯한 유추를 할 수 없었다.
- 제 목숨이 필요하면 갖다 써도 되니 제발 아이를 구해주세요.
자긴 괜찮으니 아이만이라도 구해달라는 말이다.
'해야 할 일이 늘었다.'
그러나 오히려 힘이 났다.
'지켜야 할 사람이 많다는 게 꼭 나쁜 일은 아니구나.'
노혼의 복수와 추영을 마교의 손아귀에서 구해내는 일은 무룡에게 한 번도 부담으로 느껴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무룡이 매질과 채찍질을 버티고 과감히 독을 삼키도록 등을 떠미는 추진력이었다.
'내가 잘해야 아이와 빨리 상봉할 수 있다. 마음을 독하게 먹자.'
- 작가의말
은두銀豆는 콩알 크기로 뭉친 은덩이를 말합니다.
사삼沙蔘은 더덕의 약재 명칭입니다.
무룡은 매화한테 차였습니다. 본인은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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