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살인
"거절하겠소."
손청우가 나섰다. 추향의 모두에게 하대하는 말투 때문에 괜한 시비가 걸릴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제 시비를 걸어 우리 동해문의 제자에게 내상을 입히지 않았소? 그 제자가 내상을 이기지 못해 오늘 아침 죽었소. 그러니 꼭 생사결을 해야겠소."
"작심하고 왔구나."
손청우도 더 말하면 입이 아플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거기 여섯 협객은 저쪽으로 가시오. 일이 끝나면 우리 술사가 문을 열어 밖으로 보내드릴 것이오."
백투산이 자신만만한 말투로 여섯 사내를 얼렀다. 서로 눈치를 보던 여섯 사내는 추향 일행에게 살짝 포권하여 미안함을 표한 후 백투산이 가리킨 곳으로 움직였다.
강호 초출이면 몰라도, 명황성에서 몇 년이나 굴러먹은 자들답게 괜한 의리를 지킨답시고 목숨을 걸진 않았다.
"많이도 끌고 왔구나."
손청우도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넘었음을 인정하고 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겸사겸사."
백투산이 살짝 상기한 얼굴로 대답했다. 고작 셋을 상대하려고 칠십 명이 넘은 인원을 끌고 온 건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렇다면 저 여섯을 살려두지 않을 가능성이 크겠구나."
추향의 지적에 백투산이 움찔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섯 사내가 이를 갈며 무기를 뽑았다.
그냥 오합지졸의 무리면 몰라도 동해문 정도의 명성을 갖춘 유서 깊은 문파가 이런 비열한 짓을 했다는 게 강호에 알려지면 파장이 크다. 그러니 당연히 목격자인 여섯 사내를 살려서 보내지 않을 거다.
"석 당주가 앞장서고 손 호법이 엄호하시오. 난 상황을 봐가며 손을 보태겠소."
여섯 사내를 미끼로 던져 상대 전력을 일부 분산했다. 아직 정식으로 칼을 섞진 않았으나 이미 싸움은 시작된 셈이다.
추향은 상대의 움직임을 기다리지 않고 선제공격으로 활로를 열 방도를 찾았다.
"어디로 갈까요?"
"저 백투산이라는 자가 있는 곳으로."
동해문 문주인 백투산이 있는 곳엔 고수들이 운집했다. 대신 머릿수는 확실히 다른 곳보다 적었다.
약한 대신 숫자가 많은 자들을 뚫으려다 지체되면 오히려 낭패될 수 있다. 실력에 자신 있는 셋은 가장 강한 고리를 끊고 탈출하기로 했다.
생각대로 풀려 백투산을 비롯한 동해문 고수들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 추적을 방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동해문의 핵심이 되는 자들이 빠지면 도주가 용이할 가능성이 크다.
손청우는 추향의 속셈을 바로 이해했고, 석군도 확실치는 않지만 어렴풋이 뜻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추향이 신호를 주자마자 서슴없이 자신보다 훨씬 강한 백투산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서 도망쳐서 다른 무리에 동해문이 소탕하러 왔다고 알리시오."
손청우가 석군의 뒤를 따르며 외쳤다. 소탕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절검문이 정기적으로 하는 행사로, 마수 위주로 닥치는 대로 죽이는 걸 말한다.
남은 하나는 지금처럼 큰 무리가 들어와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여 재물을 빼앗는 걸 말한다.
수십 명이 드나들 문을 여는 술사가 드물기에 성질이 다른 두 행사에 같은 이름이 붙었다.
"제길."
백투산은 머릿수를 믿고 특별한 계획을 짜지 않은 걸 후회했다. 상대는 세 치 혀를 간단히 놀려 포위망을 허술하게 만들었고 힘으로 그 틈을 키우려 하고 있다.
'앞장선 자가 우리 호법이랑 맞먹는 고수란 말이지.'
세상에 나오기 전의 석군은 고수로 불리기 조금 아쉬운 수준이었다. 그러나 벽파검법을 높은 수준으로 익히며 깨달음을 얻은 덕분에 지금은 화후만 부족할 뿐 어디에서도 고수 소리를 들을 법하다.
"저놈은 내가 맡을 테니 당신들은 뒤에 따르는 자들을 견제하시오."
동해문의 고수들이 백투산의 말에 따라 뒤를 따르는 손청우와 추향을 덮쳤다.
'어림없는 수작.'
손청우는 강호 경험이 풍부하지 않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라면 누구도 부럽지 않다. 다른 사람이 강호에서 십 년 굴러야 쌓을 전투 경험을 짧게 한두 달씩 강호에 나갈 때마다 겪은 덕분이다.
괜히 장문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광서생이라는 별호가 붙은 게 아니다.
한눈에 상대의 전략을 파악한 손청우는 벽파검법을 펼쳐 자신과 추향을 덮치는 자들을 한꺼번에 공격했다.
강한 파괴력은 없으나 작은 힘이 끊이지 않고 계속 휘몰아치는 바람에 손청우와 추향을 견제하기로 한 고수들이 손청우 한 명에게 묶였다.
"노도격랑."
추향의 말이 울리자 석군은 반사적으로 초식을 펼쳤다. 그리고 추향은 보조 초식으로 석군을 도와 백투산을 공격했다.
"제길."
백투산은 욕설도 제대로 뱉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현재 석군과 추향이 펼친 합격은 차분히 한 시진 고민해도 막을 엄두가 안 나는 대단한 공격이다. 백투산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괜한 호승심으로 맞서다가 갈기갈기 찢겼을 정도로 강한 초식이기도 했다.
"회두망월回頭望月."
추향은 백투산이 물러설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바로 몸을 돌려 손청우에게 묶인 자들의 배후를 공격했다.
화산 무공을 숨겨야 해서 벽파검법만 사용해야 하는 둘과 달리 추향은 벽파검법 외에도 출처가 불분명한 무공을 잔뜩 알고 있다. 그래서 대응 능력이 둘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렇단 말이지.'
추향이 굳이 초식 명을 외친 건 습관인 것도 있지만, 손청우에게 자신이 뭘 할지 알리려는 목적이 컸다.
"암도흉용暗濤凶湧."
손청우도 이름을 외쳐 자신이 뭘 할지 알렸다.
'주공을 내게 맡겨?'
추향은 바로 구검천하九劍天下를 펼쳤다. 하나의 초식에 강剛유柔쾌快변變환幻허虛실實경勁중重의 아홉 검의가 깃든 대단한 초식이다.
"백련구엽白蓮九葉? 마교인가?"
구검천하는 마교의 백련구엽의 장법을 소교주가 검법으로 바꿔서 추향에게 가르친 거다. 백투산이 생각보다 견식이 넓은지 검법으로 변환한 백련구엽을 바로 알아챘다.
"그럼 이건?"
아홉 명에게 쉽게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힌 추향이 바로 몸을 돌려 백투산을 공격했다.
"종남파의 선학서귀仙鶴西歸?"
곧고 시원한 찌르기를 피하며 백투산이 놀라움에 겨운 외침을 쏟아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당백호가 익힌 선학서귀 초식이 추향과 상성이 별로여서 백투산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가 아니었다.
"이건?"
이어서 펼친 건 공동파의 청상검법靑霜劍法이었다.
"누, 누구냐?"
"네 할머니다."
그새 손청우가 남은 자들을 뿌리치고 합류했다. 추향은 자신들을 따라왔던 여섯 사내가 모두 죽은 걸 확인하고 도주를 결심했다.
"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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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로 유인하여 차도살인한다."
석군은 몰라도 손청우와 추향은 내공이 심후하다. 그러나 뼈대 있는 문파인 동해문의 제자들도 쉽게 상대하기 힘들었다.
유류검법을 비롯해 강호에 유명을 떨칠 정도의 강한 무공은 없지만, 그렇다고 어디서 쉽게 당하는 수준도 아니다. 무공은 물론 사람도 수비적인 경향이 심해서 실력 격차가 커도 간단히 죽이기 힘들다.
게다가 상대의 무리엔 술사가 여러 명 포함됐다. 자세만 봐도 대충 성향이 드러나는 무인과 달리 술사는 사부가 누구고 어떤 법술을 익혔는지 알아도 상대가 뭘 할지 예측하는 건 어렵다.
"쉽게 속을 것 같지 않소."
추향은 두 요괴의 영지 사이의 틈을 찾아내 동해문을 유인하려 했다.
누구든 실수로 요괴의 영지를 밟으면 바로 공격을 받는다. 영지를 확실히 느끼는 추향이 있기에 꽤 괜찮은 계획인데, 문제는 상대 무리의 술사도 영지 결계를 느끼는 재주가 있는지 모른다는 부분이 걱정이다. 또 그런 재주가 없다고 쳐도 상식은 있을 테니 쉽게 유인에 걸려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나도 그렇게 쉽게 생각한 거 아니야. 근처에만 데려오면 돼."
"설명 부탁하오."
"방금 요괴 영지로 들어가서 법보를 훔쳤어."
손청우가 놀라움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떻게?"
"내가 누군지 잊지 마."
추향이 턱을 치켜들며 우쭐했다.
요괴의 영지는 간단히 말해 요괴의 세상이다. 대부분 요괴는 누군가가 영지에 침입하기만 해도 바로 알아챈다. 그런 상황에 몰래 들어가서 요괴가 목숨처럼 애지중지하는 법보를 상대도 모르게 훔쳐낸다는 건 정말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그럼?"
"지금은 가짜를 만들어서 거기에 뒀기에 요괴도 몰라. 놈들을 근처에 유인한 다음 진짜 법보를 동해문에 던져주면 요괴가 나타나서 다 해치울 거야."
"요괴가 이기면 어떻게 하오?"
웬만하면 동해문의 승리를 점치겠지만, 법보를 얻은 요괴라면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다.
"영지 밖이니까 굳이 우리까지 공격하지 않을 거야. 혹시 이성을 잃고 우릴 공격한다면 옆에 영지로 유인하면 돼."
인간과 요괴가 동시에 영지에 침입했다면 결과는 뻔하다. 영지의 주인은 인간보다 요괴를 우선하여 공격할 거고, 셋은 그 틈을 타서 도주하면 된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참는다는 건 실력이 비슷하단 의미겠지. 그렇기에 내 계책은 천의무봉이다."
그때 동해문의 무리가 헐레벌떡 몰려왔다. 추향이 흔적을 최대한 지우긴 했지만, 세상에 잘난 사람은 많았다.
"야, 너희 진짜 목적이 뭐야?"
추향이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외쳤다. 법보를 토둔술土遁術로 몰래 동해문 쪽으로 보내며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소리를 숨기려는 속셈이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고작 삼류 수준의 제자 하나 죽었다고 이러진 않을 것 같아서. 우리 노도문에 고수가 얼마나 많은데 이런 사소한 일로 생사결을 하냐고."
노도문은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문파다. 그러나 와호장룡의 세상인 걸 생각하면 처음 듣는 문파라고 쉽게 얕보면 안 된다.
더구나 노도문은 거의 매일 문을 열 수준의 술사를 보유했다고 소문이 널리 난 상태다.
먼저 시비를 건 동해문이 복수 운운할 상황이 아니다. 진짜 노도문이 먼저 시비를 걸었고 내상을 입은 제자가 정말로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거 없소."
누가 들어도 뭔가 구린 구석이 있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추향도 굳이 동해문의 진심을 알 생각이 없었다.
"나도 상관없어."
토둔술로 보낸 법보의 봉인이 벗겨지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동시에 추향 일행의 왼손편에 있던 영지에서 커다란 범 요괴 한 마리가 뛰쳐나와 동해문의 무리를 덮쳤다.
- 작가의말
차도 살인 - 술 마신 사람이 운전했을 때 아닐 때보다 훨씬 큰 확률로 발생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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