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이몽
이백사십이 개의 혈도에 순서대로 내공을 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하동에 있을 땐 중독으로 잡생각이 사라져 그럭저럭 해냈지만, 지금은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우보천리라고, 느리지만 확실한 진전을 보이며 자하신공의 성취가 깊어갔다.
"허, 저놈 살찐 거 보소."
기가 막히는지 천노가 혀를 찼다.
직사광선이 안 들어오는 땅속에 갇혀 지내다 보니 피부가 하얘졌다. 그래서 살이 찐 것처럼 보였다. 전에 자하동에 삼 년 있었던 기간까지 합치면 해를 못 본 지 오 년 반이나 되기에 피부가 시커멓게 그을린 채로 있는 게 더 이상하다.
그리고 맨날 배불리 먹다 보니 실제로도 살이 쪘다.
"천노. 혹시 자하신공을 익히려면 아침저녁으로 노을을 봐야 하는 건 아닐까?"
천노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그렇게 말하면 자하동 안에선 어떻게 수련할까?"
'멍청이. 자하동에도 노을이 들어와.'
저녁엔 일각 정도, 아침엔 일각에 조금 못 미치는 기간 빛이 들어온다. 물론, 비나 눈이 내리거나 구름이 해를 가려 안 들어오는 때도 있지만, 조양봉이 있는 곳은 대체로 맑은 날이 많다.
"반년밖에 안 남았어."
천노가 말했다. 추영은 못 들은 사람처럼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반년이면 넉넉해. 흐름은 이미 잡았고 이제부턴 벽파공으로 가속하면 되거든.'
넉 달 정도만 수련하면 자하신공 일 단계를 이룰 것 같다. 그럼 계획대로 저들을 자하동에 유인해 처리하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만 돌아가자. 자하동의 문을 열고 비밀을 푸는 데 반년으론 부족해."
"삼 년을 채우기로 약속했잖아."
"내가 말한 삼 년은 자하동의 비밀을 푸는 시간까지 포함해서야."
"약속대로 삼 년을 채워."
"내 계산으론 반년 갖고 어림도 없어. 그러니 그만 어리광부리고 돌아가자."
'안돼. 이대로 포기하지 마.'
이들이 포기하고 무룡을 순순히 풀어주면 모를까. 살인멸구라도 하면 큰일이다. 죽는 건 딱히 두렵지 않지만, 노혼의 복수를 못 하면 저승에서도 눈이 감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련이 깊어진 덕분에 몇 달 전부터 둘의 대화를 엿들은 걸 들켜도 문제기에 자하신공을 넉 달 안에 익혀낼 수 있다고 외칠 수도 없었다.
"협상의 여지가 없는 거야?"
추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년 반 사이에 키도 부쩍 크고 볼살도 빠져 어엿한 소녀가 되었다. 목소리도 귀여움이 다 빠지고 시원함만 남았다.
"더 늦었다가 사고라도 터지면 천산파까지 끝장이다."
"좋아."
'안돼!'
"대신 조건이 있어."
무룡은 작은 기대를 품었다. 그간 든 정도 있고 하니 자신을 놔주자고 제안하지 않을지 상상했다. 엄밀히 따지면 무룡과 두 사람은 아무 원한도 없는 사이다.
"붉은 비단으로 만든 궁장, 푸른 비단으로 만든 모자, 노루 가죽에 검은 비단을 기워 만든 신발. 죽을 때 입을 옷이야. 그걸 해주면 말썽 안 부리고 따라갈게."
"그래. 당장 다녀오마."
천노는 바로 떠나지 않고 감옥 주변에 진법을 쳤다. 며칠이나 열흘 이상 다녀올 때는 진법을 크게 쳤지만, 이번엔 용건이 간단하기에 감옥과 그 위에 지은 모옥 주변에만 쳤다.
'날 어떻게 하려는 걸까? 원하는 걸 포기했다면 굳이 날 죽일 필욘 없을 텐데.'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무룡을 살려둘 이유도 없었다.
'솔직히 얘기할까? 자하동의 비밀을 알고 넉 달이면 일 단계를 완성할 것 같다고?'
천노는 몰라도 추영은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간 엿들은 대화를 생각하면 시종 조급해하던 천노보다도 추영이 더 절실해 보였다.
'그런데 저들이 목적을 이루고 살인멸구 하면? 아니지. 내가 선수를 써서 저들을 없애면 돼.'
감옥 문이 열리며 추영이 들어왔다. 얼굴을 굳힌 추영은 평소와 달리 인사도 없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날 도울 수 있어?"
소매에서 쇠꼬챙이 두 개를 꺼낸 추영이 대답도 안 기다리고 무룡의 팔다리를 잠근 사슬을 풀었다.
"어떻게?"
"일단 안전한 곳에 가서 얘기할게."
사슬을 푼 추영이 무룡에게 등을 보이고 걸었다. 무룡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추영의 뒤를 따르며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모옥으로 들어간 추영이 짐을 간단히 챙긴 후 몸을 돌려 무룡에게 말했다.
"천노가 친 진법은 잘못 밟으면 변화해. 그러니까 실수하지 말고 내가 오른발로 밟은 곳은 오른발로 밟고 왼발로 밟은 곳은 왼발로 밟아. 위치가 같아야 할 뿐만 아니라 발도 헷갈리면 안 돼."
무룡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추영의 뒤에 가서 똑같이 걸었다.
"아직 아니야."
모옥 밖으로 나간 추영은 손바닥을 앞으로 펼친 다음 느리게 걸었다. 그러다 뭔가를 감지했는지 얼굴을 굳히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부터야. 정신 바짝 차려."
무룡은 고개를 푹 숙이고 추영의 발만 보며 따랐다. 그렇게 바짝 긴장한 상태에서 반 각을 움직이니 주변 풍경이 갑자기 확 바뀌었다.
화산 옥녀봉의 것보다 훨씬 큰 폭포가 눈앞에 나타났다.
"따라와."
추영이 폭포로 몸을 던졌다. 그러나 한참 지나도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룡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을 때, 폭포에서 나뭇가지 하나가 불쑥 나왔다.
폭포 뒤에 동굴이 있고, 추영은 동굴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무룡은 내공을 돌려 몸을 가볍게 한 뒤 나뭇가지가 있는 곳으로 힘껏 뛰었다. 폭포를 지나니 바닥에 물기가 가득한 동굴이 나타났다.
"깊은 곳엔 물이 없어."
무룡과 추영은 동굴 깊은 곳으로 향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몇 번 반복되고서부터 바닥도 벽도 습기가 전혀 없었다.
"이건 다 뭐야?"
동굴 끝에는 기름종이로 잘 감싼 크고 작은 꾸러미가 가득했다.
"음식. 지난 이 년 반 동안 내가 준비한 거야."
천노가 밖으로 나갈 때마다 추영은 잘 상하지 않는 음식을 만들어 동굴에 저장했다.
"바로 도망가는 게 낫지 않아?"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 몰라? 그리고 우린 여기서 최대한 버틴 다음 도망쳐야 해. 지금 도망치면 흔적이 들켜 금세 잡힐 거야."
무룡은 추영의 심계에 탄복했다. 추영은 처음부터 천노를 믿지 못했고 무룡이 자하신공 일 단계에 실패할 것을 대비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무룡이 성공할 것을 기대하지도 않고 천노의 손에서 벗어날 궁리만 했을지도 모른다.
"너 혹시 귀한 물건을 훔쳤어?"
"무룡. 네가 죽으면 수십만 명이 살 수 있어. 대신 넌 진짜 고통스럽게 죽어야 해.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할 거야?"
예전의 무룡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죽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난 지금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 그게 아니면 수십 만 명을 살리는 것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난 딱히 살아야 할 이유는 없어. 그런데 살고 싶어."
추영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자하동의 비밀을 풀면 된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넉 달 정도만 수련하면 될 것도 같아."
무룡은 추영을 이길 자신이 없다. 혼자 힘으로 천노를 뿌리치고 화산까지 갈 자신도 없다. 그래서 추영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거 신빙성이 없는 정보야. 천노를 설득하려고 믿는 척했던 거야. 그간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 미안해."
무룡은 추영이 자신을 이용하려고 일부러 약한 척하는 거로 생각하여 절대 경각심을 늦추지 말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럼 어쩔 생각이야?"
"말했잖아. 여기서 최대한 오래 숨었다가 밖으로 나가서 멀리 도망가겠다고. 평생 숨어서 살 거야."
무룡은 추영이 당분간 움직일 생각이 없다고 판단했다.
'일단 자하신공 일 단계를 이룬다. 그리고 추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며 화산으로 갈 방법을 찾는다.'
생각을 대충이나마 정리하자 어지럽던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러고 나니 이때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옷을 딱 한 벌만 챙겼어.'
그간 추영이 무룡에게 보여준 옷만 해도 오십 벌은 된다. 그러나 추영은 입은 옷 외에 딱 한 벌만 챙겼다.
'일부러 이쁜 옷을 좋아하는 척했구나.'
추영은 오늘을 대비해 그간 천노한테 옷을 사달라고 매번 졸랐다. 덕분에 천노는 추영이 비단옷을 사달라는 말에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속에만 담아두기엔 무룡의 심계가 깊지 못했다.
"강호의 사람은 다 너처럼 머리가 좋고 심계가 깊은 거니?"
추영은 무룡의 눈길이 자신의 옷에 있는 걸 보고 피식 웃었다.
"이건 오래 생각해서 짠 계획대로 움직인 거야. 진짜 머리가 좋은 사람은 돌발 상황에도 남을 감쪽같이 속이지."
무룡은 불현듯 노혼이 떠올랐다. 비록 목숨을 잃었지만, 세 번째 마교 장로를 암파유동으로 해치운 건 참으로 대단한 심계였다.
자세한 과정은 모르지만, 검을 버리고 눈을 가리고 손 하나 뒤로 빼면서 상대를 자극했던 것은 확실히 기억에 있다. 평소 봐왔던 노혼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고, 무룡은 당시 노혼이 뭔가 절박한 상황이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너도 뭔가 간절히 지켜야 할 게 있는 거야?"
"응. 내 목숨. 내가 추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이거든."
무룡은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일단 말해도 되는 부분은 솔직히 토로하기로 했다.
"난 화무룡이 아니라 벽파검 노혼의 제자이고 성이 없이 그냥 이름이 무룡이야. 화무룡은 굳셀 무이고 난 안개 무를 써."
"네가 화무룡이 아닌 걸 알아. 소문으로 들은 화무룡은 굉장한 미남자라고 했거든."
"알면서도 날 이용했단 말이지? 네 목숨만 귀하고 내 목숨은 싸구려야?"
알게 모르게 생겼던 호감이 사라지고 증오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자기 목숨이 귀하니까 남의 목숨을 희생하는 거 아니겠어?"
- 작가의말
그렇습니다.
감금의 시간 동안 주인공은 매일 여섯 끼씩 먹고 수련에만 열중하고, 천노가 영약을 갖다 바치고 추영이 패션쇼를 보여주고.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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