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진담
"대사형, 우승 축하합니다."
"강호행 돌아오면 재밌는 이야기 많이 들려주세요."
"대사형, 제가 요즘 풀리지 않는 초식이 있는데 봐줄 수 있어요?"
나이가 최소 대여섯 살 많은 사제와 사매들이 몰려와 화무룡의 눈길 한 번 받고 한 마디라도 나누려고 애썼다.
'이들 입장도 이해 안 가는 건 아닌데.'
화산파가 관리하는 땅에 소작하는 장정만 삼천 명이 넘는다. 이들을 관리하는 중간 관리자는 오다가다 떨어지는 떡고물이 어마어마하다.
'그래도 피곤하군.'
그때 세찬 소리와 함께 집채 같은 파도가 화무룡을 덮쳤다. 급히 검을 뽑은 화무룡은 자하검법으로 파도를 물리쳤다.
'뭐지? 어떻게 내 검법이 아버지보다 더 훌륭하지?'
일 검에 자신을 덮치는 파도를 벴다. 화무룡은 자신을 감싼 붉은 놀을 보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아부를 떨던 사제들도 어느새 사라지고 주변 지형도 처음 보는 낯선 곳으로 바뀌었다.
'환술인가?'
믿기지 않지만, 강호에는 진법과 약 따위로 환각을 만들어 고수도 속이는 특이한 작자들이 있다고 한다. 방문좌도로 여겨 깔보긴 하지만, 척을 지면 엄청 골치 아픈 족속이라고 들었다.
푸른 파도가 다시 덮쳤다. 화무룡은 검을 휘둘러 파도를 벴다. 파도가 갈라지며 덩치가 커다란 맹수가 나타나 긴 발톱을 휘둘렀다.
발톱 하나하나가 오 척이나 되었다.
"무룡?"
맹수의 발톱이 무룡의 장검과 닮았다.
"내 우승을 빼앗고 강호행에 합류해서 기분 좋으니?"
얼굴의 맹수 탈을 벗은 무룡이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더니 곧 양손의 열 개 장검으로 화무룡을 난도질했다.
바로 어머니가 대신 막아준 노도박안의 초식이었다.
"헉!"
벌떡 일어난 화무룡은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목을 소매로 문질렀다. 꿈에 무룡의 검에 난도질당한 부위들이었다.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찾아가서 강호행에 빠질 테니 무룡을 넣어달라고 할까?'
화무룡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바로 부정했다. 다른 대안이 있다면 모를까, 외동아들인 자신은 반드시 다음 대 화산 장문인이 되어야 한다.
이번 강호행은 강호의 유명 문파와 세가들을 일일이 방문하는 것이기에 화무룡은 반드시 합류해야 한다.
강호에는 기인이사가 많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 일초반식이라도 배우면 평생 그 효용을 누릴 수 있다. 게다가 배우고 가르치며 맺어진 인연이 화산의 무게에 더해지며 화무룡의 장문인 자리를 더 굳건하게 해준다.
'차라리 무룡처럼 고아인 게 나아.'
철없지 않아 배부른 투정이라는 걸 알지만, 화무룡의 생각은 반쯤 진심이었다. 무공에 재능이 뛰어난 화무룡은 글을 익히고 강호의 세력 분포와 관계를 배우는 시간에 순수한 마음으로 검만 휘두르고 싶었다.
잠이 깨끗이 달아났다. 한참 뒤척이던 화무룡은 벌떡 일어나 우물에 가서 시원한 물로 몸의 땀을 닦았다.
그러나 몸은 상쾌해져도 마음에 철썩 들러붙은 찝찝함은 그대로였다.
화무룡은 무복을 입고 검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오늘 대결을 벌인 연무장에 가서 한바탕 검을 휘둘러야 속이 좀 후련할 것 같았다.
훙, 후웅!
연무장엔 선객이 있었다.
'무룡?'
그제야 낮의 상황이 또렷이 떠올랐다. 노혼은 패배를 인정한 무룡을 내버려 두고 경공을 펼쳐 홀로 떠났다.
'설마 여태껏 조양봉에 안 돌아간 건가?'
조양봉에는 자하동이 있다. 검으로 때려도 흠집 하나 안 나는 단단한 문이 있긴 하지만, 화산파의 뿌리가 되는 곳이어서 장문인이 가장 신임하는 사람이 지킨다.
현재는 노혼이 무룡을 데리고 자하동 앞의 모옥에 산다.
'사부한테 버림받은 건가? 나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든 화무룡은 기척을 죽이고 무룡이 떠나길 기다렸다. 그러나 무룡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검을 휘두르다 물러나고 다시 검을 휘두르다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노도박안!'
달빛이 어두운 탓도 있고, 벽파검법을 익히지 않은 것도 있어 화무룡은 무룡의 초식을 겨우 알아봤다.
'저 위치는 무룡이 날 공격하던 곳, 그리고 물러나는 곳은 어머니한테 초식이 막힌 곳.'
화무룡은 전율을 느꼈다.
지금 무룡은 화산파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인 어머니한테 초식이 막힌 것이 분해 오밤중에 대결이 벌어진 연무장을 찾아 그 장면을 곱씹으며 이유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노혼 때문에 견제하는 줄 알았는데, 저 아이 자체가 박옥璞玉(다듬어지지 않은 옥)이구나.'
노혼은 성정이 고고하여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무리를 이루지도 않는다. 권력욕이나 재물욕도 전혀 없고 그저 무공 수련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 노혼을 왜 견제하나 싶었는데, 다음 장문인 경쟁자로 무룡이 유력하다면 얼개가 얼추 들어맞는다.
'뭐지?'
검을 휘두르다 말고 무룡이 기쁘게 웃었다.
'파훼법을 찾은 건가?'
화무룡의 어머니 초민향은 옥녀검을 익혔다. 내공이나 초식보다 검의를 훨씬 중요시하는 옥녀검이기에 검에 대한 이해는 화산에서도 수위를 다툰다.
그런 어머니의 검을 뚫고 공격에 성공할 방법을 일 년도 한 달도 아니고 하루 만에 찾아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무룡은 화무룡이 얼마나 큰 곤혹을 느끼고 있는지 모르고 즐겁게 어깨를 들썩이며 옥녀봉 밑으로 내려갔다.
"거기 누구요?"
경공을 펼쳐 먼저 산자락에 도착한 화무룡이 짐짓 근엄하게 외쳤다.
"화산파 이십삼 대 제자 무룡입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지요?"
"칠사제였군. 나 화무룡이요."
"무룡이 대사형을 뵙습니다."
무룡의 몸짓이나 표정엔 낮의 패배에 대한 어떤 원망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 밤중에 어인 일이오?"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 산책하는 중입니다."
"마침 잘 됐군. 나도 가슴이 답답하여 산책하는 중이었네."
화무룡은 좋은 곳을 안다며 무룡을 이끌고 달렸다. 나이보다 내공이 많은 화무룡과 체력이 뛰어난 무룡이기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화산에 이런 곳도 있었군요."
시원하면서도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폭포 소리를 감상하며 무룡이 감탄했다.
"무룡. 너랑 나랑 열네 살로 동갑이고 입문 시기도 얼마 차이 안 나는데 그냥 편하게 친구로 지내면 안 될까?"
화무룡은 화산의 법규에 따라 만 세 살이 되자 정식 제자가 되었다. 어린아이가 요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에 생긴 규정이다.
갓난아기를 정식 제자로 받아들였다가 요절하면 대제자가 죽었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지게 된다. 어떤 사정인지와는 상관없이 소문만으로도 화산의 이름에 오점이 생긴다.
무룡 역시 비슷한 시기에 노혼의 제자가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무룡이 두 번째 제자여야 하는데 네 가문의 자식들이 제자가 되며 조금씩 밀려나 일곱 번째 제자가 되었다.
"진심이지?"
화무룡의 눈을 한참 들여다보던 무룡이 되물었다.
"그럼. 그리고 오늘 낮에 일은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힘없는 낙엽이 물살에 쓸리는 건 옳은 일이야. 그러기 싫으면 묵직한 바위가 되어야지."
"이번엔 내가 물살이잖아."
무룡이 고개를 젖히고 소리 내어 웃었다. 폭포 소리가 세차 무룡의 웃음소리는 멀리 가지 못했다.
"너도 장문 사백도 다 낙엽이야. 강호의 물살에 쓸리고 있지."
무룡의 말에 화무룡도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버지가 이번 강호행에 화무룡을 꼭 데리고 가려는 것도 남은 네 가문의 힘에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화씨 가문의 힘이 강해 남은 네 가문을 무시할 수 있다면 아버지도 입방아에 오르면서까지 자신에게 우승을 억지로 안겨주지 않았으리라.
'결국엔 내가 못난 탓이구나.'
화무룡은 자괴감을 빠르게 털어버렸다. 요즘 내공 화후가 빠르게 깊어지고 있기에 마음의 동요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안 그러면 주화입마가 와서 폐인이 될지도 모른다.
"이해해주니 고맙구나."
"어차피 난 다른 사람보다 성장이 빠른 것뿐이야. 네 근골이 완전히 잡히고 내공이 심후해지면 난 널 이길 수 없어. 여섯 살부터 내공을 수련했는데 아직 일 년 성취도 못 이뤘거든."
무룡은 세상 다 산 노인처럼 덤덤한 말투로 얘기했다.
"무룡, 우리 평생 친구 하자."
화무룡이 불쑥 말했다. 무룡은 화무룡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내 쌍둥이 형제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장문인 수업을 다 너한테 미루고 난 검술 수련만 할 텐데."
무룡이 손을 쓱 내밀어 화무룡의 눈을 가렸다.
"뭐가 보여?"
"네 손바닥."
무룡이 손을 뒤로 당겼다.
"이젠?"
"네 손바닥이랑 얼굴 포함해서 이것저것?"
"난 사부와 함께 강호하고도 화산하고도 한 걸음 크게 떨어져 있어. 그래서 잘 보이는 것뿐이야. 내가 보기엔 여러 검법을 높은 수준으로 익힌 네가 훨씬 대단해."
이번엔 화무룡이 무룡의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내가 부러운 무룡의 자유보다 훨씬 크고 가치 있는 것들이 내게 있구나.'
화무룡이 무룡을 부러워하는 것 이상으로 무룡도 화무룡이 부러웠다. 화진악과 초민향이 화산파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인 건 제쳐두고, 부모가 곁에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수많은 사제와 사매들이 화무룡과 친해지고 말 한마디라도 더 나누려고 애쓴다. 인사하기 싫어서 무룡이 보이면 방향을 트는 것과 선명하게 대조된다.
"그런데 왜 패배를 인정했어? 편들어줄 사람도 많은데."
"거기서 내가 버티면 사부가 말려드니까. 난 사부가 나 때문에 수련을 방해받는 게 싫거든."
'난 불평만 했지 부모님을 위해 뭔가 할 생각은 한 적도 없구나.'
무룡과 대화하며 깨닫는 게 많았다. 지금껏 싫은 일을 억지로 하면서 효도하는 거로 생각했다. 그저 반항심을 누르기 위한 핑계임을 무룡과 대화하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일 저녁에도 여기서 볼까?"
- 작가의말
군더더기를 다 뗀 템포가 빠른 글입니다. 그러나 상상하면서 느긋하게 읽으면 더 재밌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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