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비동
장로들과 화씨 가문의 무사들이 조가장에 집결했다. 서재의 밀문을 통해 꽤 긴 통로를 걸어 밀실에 도착한 이들은 인내를 갖추고 기다렸다.
약속한 시각이 되자 남은 세 문이 동시에 열렸다. 화진악이 세 가문에 보낸 간세들이 한 짓이다.
장로와 무사들은 미리 정해진 대로 세 무리로 갈라졌다. 통로를 따라 장원에 침입한 자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고 악가장으로 간 무리는 불까지 질렀다.
남은 두 가문은 고스란히 접수하기로 했지만, 악가장 만큼은 주춧돌 하나 성한 게 보이면 안 된다고 화진악이 엄명을 내렸다.
축하연에서 화진악을 암살할 생각으로 무사 대부분을 끌고 나갔던 세 가주가 황급히 돌아왔다.
"반란을 일으켜 장문인을 암살하고 화산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자들이 지장을 찍은 연명장이다. 여기에 지장을 찍지 않은 자는 지금이라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화산 장문인의 명예를 걸고 절대 추궁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미 가문에 남은 식솔은 다 죽었고, 따르던 무사와 제자 대부분이 칼자루를 돌려 잡았다.
남아서 끝까지 저항한 사람은 세 가주와 몇몇 장로, 그리고 의리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일부뿐이었다.
"화 장문, 노혼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입니까?"
어느새 다시 모습을 드러낸 조형래가 질문했다.
"자하동에 들여보냈소."
원래는 노혼까지 제거 대상이었다. 그런데 무룡이 기척을 들키는 일로 변수가 생겨 노혼이 반란에 동참할 것을 승낙했다. 네 가주의 손을 빌려 노혼을 제거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래서 조형래가 증언하여 노혼에게도 반란죄를 뒤집어씌우기로 했는데, 노혼이 먼저 화진악을 찾아 반란 사실을 알렸다.
여기까지는 그냥 화진악이 억지를 부려 그런 적 없다고 우기면 될 일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화무룡과 무룡이 나타나서 산통을 깼다.
"설득한 겁니까?"
"자하동의 문을 열 사람은 천하에 나밖에 없소."
한편.
무룡은 흥분한 마음으로 사부 뒤를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노혼은 벽파검법에 딸린 심법인 벽파공만 익혔다. 당연히 제자인 무룡 역시 벽파공을 익혔고, 상성이 안 좋아 내공이 일 년 성취도 이루지 못했다.
'자하신공이 나랑 잘 맞을지도 모르잖아.'
즐거운 상상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무룡은 사부의 등에 코를 박았다.
"독인가?"
사부의 말에 무룡은 다급히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옷이 썩어 사라졌다."
그제야 무룡은 자신이 어느새 알몸이 된 사실을 깨달았다. 자하신공의 구결을 접한다는 흥분으로 옷가지가 썩어 사라진 것도 몰랐다.
"다행히 검은 그대로구나."
노혼은 가죽 신발과 가죽 허리띠, 그리고 허리띠에 달린 검만 남았다.
"어, 내 죽검."
무룡의 허리띠는 천으로 만든 거여서 썩어 사라졌고, 허리띠에 꽂은 죽검도 당연히 없었다.
"새는 모이를 탐하다 죽고 사람은 재물을 좇다 죽는다. 명심하거라."
노혼 역시 흥분으로 옷이 썩어 사라진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기에 속으로 크게 반성했다.
"잡념을 지우겠습니다."
'죽검도 썩어 사라진 건가?'
아무리 흥분했어도 죽검이 바닥에 떨어졌다면 무룡이나 노혼이 전혀 몰랐을 리 없다.
'지필묵을 준비해도 썩어 사라져서 머리로 기억할 방법밖에 없겠구나.'
다섯 가문 중 화씨 일가만 자하신공을 익힌 비밀이다. 한 명만 성공하면 수련 방법을 후대에 전해 구결을 몰라도 일정 성취에 이를 수 있다.
남은 네 가문은 자하신공을 익혀내는 데 실패했기에 계속 구결을 붙잡고 헤맬 수밖에 없었다.
"무룡아. 사흘이면 비급을 전부 외울 자신 있느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룡의 덩치만 보고 사람들이 우직하고 우둔하게 보는데, 초식 이해가 빠르고 기억력 역시 뛰어나다.
사부와 제자는 알몸으로 걸었다. 그렇게 한참 걸으니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커다란 공동에 이르렀다. 손을 뻗으면 자기 손가락도 보이지 않는 통로와 달리 사물 윤곽이 어슴푸레 느껴졌다.
"여기인 것 같구나. 여우가 노래하는 것처럼 들리는 소리는 아마 빛이 들어오는 구멍으로 바람이 드나들며 생긴 듯하다."
통풍이 잘되는지 통로를 걸을 때보다 호흡이 훨씬 편했다.
"구결이 나오면 내가 깨울 거니까 마음 놓고 푹 쉬어라."
사흘 동안 굶어야 한다. 원체 식사량이 큰 무룡이기에 구결을 외우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활동량을 줄이는 게 좋다.
활동량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잠이다.
알몸을 웅크리고 팔 하나를 벤 무룡이 어느새 약한 코골이를 하며 깊은 잠에 빠졌다.
노혼은 눈을 반쯤 감은 채 명상했다. 그러나 잡생각으로 정신을 모을 수 없었다.
'내가 저 아이보다도 못하구나.'
어느새 코를 쿨쿨 고는 무룡을 보며 노혼이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나 자하신공의 구결을 곧 볼 수 있다는 흥분은 아무리 애써도 가라앉지 않았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무룡아. 어서 깨거라."
노혼의 묵직한 부름에 무룡이 눈을 번쩍 떴다. 곧 양손을 비벼 따뜻하게 한 다음 얼굴을 세게 문질러 정신을 차리더니 벌떡 일어나 달렸다.
"뭐 하는 것이냐?"
"소피가 급해서요."
내공 고수는 운기가 항시 되어 몸에 노폐물이 잘 쌓이지 않는다. 그래서 대소변을 평범한 사람보다 훨씬 적게 본다.
그러나 무룡은 내공이 일천하고 식사량이 많아서 하루에도 측간을 몇 번씩 들락거린다.
"사부, 냄새 괜찮습니까?"
"큰 부상으로 주검 더미에서 사흘 지낸 적도 있다. 저깟 냄새가 대수겠느냐."
공동의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빛이 점점 굵어졌다.
"외우거라."
무룡은 외우는 역할을 맡고 노혼은 구결을 해석하려 했다.
구결을 보고 받은 첫 느낌이 해당 무공을 익히는 방향을 정하는 결정적 요소이기에 노혼은 구결을 외우기보다 해석하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무룡은 입을 꾹 다문 채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벽에 나타난 글자들을 순서대로 외웠다.
약 일각의 시간이 흘러 빛이 사라졌다. 노혼은 안타까운 마음에 글자가 나타났던 벽에 가서 손으로 더듬었다.
화진악의 말대로 글자로 유추할 만한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부. 구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의미 있는 단어가 몇 개 없더구나."
"혹시."
무룡이 말을 하다 말았다. 노혼과 달리 장문인에 경외감을 느끼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화진악이 우릴 속인 게 아니냐고? 아마 아닐 거다. 내가 들은 자하비동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화진악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이런 곳을 몰래 만들 수는 없다."
한참 기다려도 빛이 다시 나타나진 않았다.
"그만 자라. 빛이 다시 들어오면 깨우겠다."
벽의 글자를 몇 번 더 외운 무룡이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노혼은 소젖을 먹고 자라서 그런지 소처럼 잘 잔다고 생각하며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주변을 살폈다.
'눈에 띄는 건 없구나.'
둘이 왔던 통로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아무래도 조양봉의 문과 통하는 통로 같다고 생각했다.
조양봉과 옥녀봉은 거리가 일 리 정도밖에 안 되는 가까운 두 봉우리다. 자하동으로 통하는 문이 조양봉과 옥녀봉에 하나씩 있다고 해도 아주 불가사의한 일은 아니다.
'지금은 의심하기 보다 믿어야 할 때다.'
전혀 연관성 없는 글자의 나열에 노혼은 화진악에 대한 의심이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기에 일단 믿기로 했다.
머리가 복잡한 노혼은 소주천이나 대주천을 돌릴 엄두는 못 내고 그저 진기도인眞氣導引으로 기의 흐름을 빠르게 했다.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니 공동 천장에 빛줄기가 생겨났다.
"무룡아."
눈을 번쩍 뜬 무룡이 얼굴을 비비며 달려가 소피를 보고 돌아왔다. 빛줄기가 점점 굵어지더니 이번엔 서쪽 벽을 비췄다.
"아침이구나. 어젠 저녁이었고."
"노을이 질 때 빛이 들어와 구결이 나타나는 듯합니다."
자하신공이란 이름의 유래였다. 아침과 저녁에 노을이 질 때만 빛이 들어와서 벽을 비춰 구결을 보여준다.
빛줄기가 적당히 굵어지자 수많은 글자가 나타났다. 무룡은 또 입을 꾹 다물고 외웠고 노혼은 가로나 거꾸로 읽으며 벽에 나타난 글자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도 의미가 맞지 않고, 밑에서 위로 읽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사선으로도 읽어보고 한 글자 건너, 두 글자 건너씩 읽어도 소용이 없었다.
채 일각도 안 되어 빛줄기가 사라지고 다시 어둠이 몰려왔다.
"자 두어라."
"사부, 저 소 아닙니다."
꼬박 일곱 시진을 잔 무룡이다. 또 자는 건 타고나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그럼 내가 자마. 혹시 곤하면 바로 날 깨우거라. 절대 둘 다 잠들어서는 안 된다."
노혼은 억지로 눈을 붙이고 잠들었다. 무룡은 사부의 잠을 방해할까 봐 숨소리조차 죽인 채 두 번 외운 구결을 속으로 계속 되뇄다.
"사부, 빛이 생겼습니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는지 천장이 조금씩 밝아졌다. 잠에서 깬 노혼은 눈을 비벼 정신을 차리고 벽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무룡아. 어제와 글자가 똑같으냐?"
"세 글자가 다른데, 아무래도 제자가 잘못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무룡은 계속 외우는 데 집중하고 노혼은 글자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일각이란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한 번 더 확인한 다음 문으로 돌아가자."
"사흘 시간을 준다고 했는데요?"
"사흘 시간이라고 했지만, 언제 열어준다고는 약조하지 않았다. 미리 가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자하신공의 구결을 확인할 수 있다는 흥분은 이미 가셨다. 거기에 푹 자고 나니 머리가 맑아져 이제껏 떠올리지 못했던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제발 아니어야 하는데.'
그 치밀한 화진악이 문을 열 시각을 말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나야 삶에 미련이 없지만, 저 아이는 안돼.'
- 작가의말
화진악이 그린 큰 그림. 하지만 하나 간과한 게 있습니다. 악역은 주인공이 아니기에 아무리 뛰어난 계책도 완벽한 성공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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