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계획
가류의 채찍이 허공을 가르고 무룡의 등을 때렸다.
금속 실에 맹수의 힘줄을 꼬아서 만든 채찍은 매서운 소리를 내지 않았다. 보통 채찍으로 때리면 찰싹 찰진 소리가 나는데 가류의 채찍은 몽둥이로 나무를 때린 것처럼 둔탁한 소리를 냈다.
양손으로 뒤통수를 감싼 무룡은 바닥에 바짝 엎드려 가류의 채찍질을 묵묵히 받아냈다.
'바라는 바다.'
가류의 채찍질 한 번이 대제자를 비롯한 십여 명의 제자들이 밤마다 때린 매보다 나았다. 채찍질 하나하나에 하룻밤 얻어맞은 만큼의 마환기공 성취가 올라 무룡은 가끔 일부러 가류의 성질을 은근히 긁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아주 위험한 수련 방법이다. 공격에 저항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서 전신에 분산하는 마환기공은 커다란 약점이 있다.
무룡의 몸이 견딜 수 없는 강한 힘을 받으면 그냥 목숨을 잃고 만다.
일반인의 다리를 고수가 강한 힘으로 때리면 다리를 잃는 거로 끝난다. 그러나 마환기공을 익혀 타격을 전신으로 분산하는 무룡은 목숨을 잃는다.
차라리 경지가 낮으면 분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다리를 잃는 것으로 끝날 수 있으나, 단전을 잃으며 자하신공의 운기 경로도 마환기공에 합류하는 바람에 성취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지금 무룡은 목숨을 걸고 수련하는 셈이다.
"당분간 곡을 비워야 한다. 남은 제자 중에서 네가 서열이 가장 높으니 일반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여라. 그리고 내 방과 서재도 매일 청소하고."
분이 어느 정도 풀린 가류가 채찍질을 멈추고 축객령을 내렸다.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공손히 인사한 무룡은 몸을 움츠린 채 뒷걸음질로 나왔다. 방에서 나온 후에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살았구나. 대단해."
멀리서 기다리던 제자들이 걸어서 나오는 무룡을 보고 환호했다.
무룡이 가까이 오자 다투어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입에 고기와 떡을 넣어줬다.
"당분간 곡을 비운다고 하는데 어디로 가고 얼마나 있는지 아는 사람 있어?"
"약초 구하러 가는 거 아닐까? 지난 몇 달 동안 환자를 치료하면서 창고가 텅텅 비었잖아."
"아니야. 평소에 쓸 약초는 이미 장만했어. 다음 싸움을 대비한다기엔 너무 일러."
무룡의 말에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덩치만 보고 무식하게 여길 수 있지만, 무룡은 독무곡의 제자 중에서 글자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다.
약초와 독초는 효능 기간이라는 게 있다. 아무리 잘 말리고 가공해도 일정 기한이 지나면 약효나 독성이 약해진다.
일부 미리 따서 일정 기간 숙성해야 하는 약초가 있긴 하지만, 그런 약초도 아직은 준비할 시기가 오지 않았다.
"확실한 건 아닌데, 사부가 뭔가 대단한 독을 만들려고 재료를 수집하고 있다는 말을 지나가다 들은 적 있어."
화로에 넣었다 꺼낸 것처럼 뜨겁던 몸이 드디어 식었다. 무룡은 옷을 추슬러 입은 후 자신을 둘러싼 제자들에게 말했다.
"당분간은 사부가 없으니 편하게 지내. 그리고 마교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신경 쓰고. 내 감이긴 한데, 분명히 몇 년 사이에 큰일이 벌어져. 미리 알고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도 사형들처럼 허망하게 목숨을 잃을지 몰라."
약초가 떨어지는 바람에 평소라면 살릴 수 있는 목숨이 죽었다. 비록 자신들을 괴롭히는 나쁜 사형들이지만, 그들이 죽은 바람에 언제 자신들 차례가 올지 모른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 차라리 욕하고 때리며 괴롭히는 사형들이 계속 살아서 사부의 매를 막아주길 바랐다.
"알았어. 그리고 우린 네가 대제자가 됐으면 좋겠어."
일반 문파의 대사형과 달리 독무곡의 대제자는 권한이 매우 크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곡주를 대신해 온갖 대소사를 처리하며 제자들에게 일을 배당할 권한도 있다.
일을 잘하는 대제자는 목숨을 오래 부지한다. 자신이 관심을 두는 것 외엔 모든 게 귀찮은 가류이기에 일 잘하는 놈은 채찍질할 때 본능적으로 힘을 빼게 된다.
지금도 채찍질을 잘 버티는 무룡이 대제자가 된다면 몇 달 전부터 무룡을 따르기 시작한 제자들은 가류의 매질에 죽을 걱정이 사라진다.
"내가 사부 눈에 들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진득하게 기다려."
포섭한 제자들과 작별한 무룡은 자신에게 차려진 집으로 갔다.
"늦었구나."
"오늘은 삼십 대 맞았습니다."
대제자가 측은하게 여기는 눈으로 무룡을 바라봤다. 이득에 따라 간에도 쓸개에도 붙는 가벼운 놈이지만, 지금 눈빛만큼은 진심이었다.
대제자 역시 실수하면 가류의 채찍을 맞아야 하고, 가끔은 영문조차 모르고 맞아야 했다.
"난 지금 목숨을 내놓고 네게 말하는 거다."
대제자가 드물게 진중한 얼굴을 했다.
"사부는 십여 년 전부터 어떤 독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무슨 용도인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지만, 내가 그간 요해한 바로는 본인이 직접 복용하려고 한다."
"말씀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무슨 독인지 알아내라. 나와 달리 넌 글자도 많이 읽을 줄 알고 사부의 신임도 두텁다. 몸도 튼튼해 들키더라도 사부의 매를 다 받아내고 살 가능성이 크다."
고개를 푹 숙인 덕분에 무룡의 눈을 스친 살기가 대제자한테 들키지 않았다.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결국 자기는 알고 싶은데 죽을까 봐 무서워서 못 하는 일을 무룡한테 시킨 것이다.
'무룡아, 무룡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무룡은 드디어 대제자를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할 결심을 내렸다. 사부의 복수를 이루고 추영을 구하기 위해선 대제자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건 맞지만, 사부한테 부끄럽고 추영의 얼굴을 보기 미안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주저했었다.
'소를 지키려고 대를 해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주저했느냐. 그리고 대협객이 못 되고 협객이 못 되면 또 어떠하냐. 복수와 추영을 위해서라면 더한 일도 해야 한다.'
무룡을 감싸던 껍질 하나가 깨졌다. 마음에 남았던 거리낌을 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해져서 사부의 복수도 이루고 추영도 구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단번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된 건 아니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진 건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었다.
"누구의 분부인데 감히 거절하겠습니까. 성심을 다해 알아내서 사형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제자의 눈에 득의의 빛이 잠깐 스쳤다. 그러나 독무곡 이인자 자리를 꽤 오래 차지한 자답게 바로 표정을 수습하고 덕담을 늘어놓았다.
대제자를 보낸 무룡은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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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은 가장 꼼꼼하고 조심성이 강한 제자 둘을 불러다 사부의 침실과 서재 청소를 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서재의 책을 하나씩 꺼내 자세히 읽었다.
'독도 참 어려운 학문이구나.'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내공이나 외공보다 추상적인 설명이 많은 독이 오히려 어려웠다. 더구나 가류는 독에 꽤 조예가 깊으나 바탕은 의원이다. 의술에 관한 책은 꽤 체계적으로 모았지만, 독에 관한 서적은 중구난방 제멋대로였다.
무룡은 기억력이 뛰어나지 머리가 그렇게 좋은 게 아니다. 독무곡 제자는 집에서도 버림받은 자식이 대부분이라 글자를 아는 놈이 얼마 없어서 제갈공명 취급을 받는 거지, 강호에 나가면 평균보다 조금 높은 축에나 겨우 낄 정도다.
제대로 배우고 경험도 쌓인다면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지금의 무룡은 천재나 기재는커녕 수재에도 간당간당한 수준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수록 머리에 낀 안개가 짙어졌다.
"사형, 이 책부터 읽는 게 어때?"
무룡의 서열이 더 높아 사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나이만 따지면 무룡보다 열 살 가깝게 많은 제자다.
"왜?"
"이건 나도 아는 글자가 꽤 있거든. 뭐든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지 않을까?"
'멍청이. 주둥이로만 겸손했구나.'
무룡은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매일 되새기며 자기를 일깨웠다. 복수의 험난함을 잊지 않고 자신이 게을러지는 걸 경계한 탓이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엔 은근히 자신을 대단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독무곡에서 잡일이나 하던 놈이 가류의 신임을 얻고 따르는 제자들이 생기자 저도 모르게 우쭐했다.
"고마워. 네 덕분에 큰 걸 깨달았어."
"역시 대단해. 내가 대단한 얘길 한 것도 아닌데."
아무리 하찮은 자라도 무룡보다 나은 부분이 꼭 있다. 하다못해 방귀 소리가 무룡보다 우렁찰 수 있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데 더 나은 재주를 가졌다고 타인을 무시하다간 복수도 추영의 구출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아직 간절하지 않아서야. 간절함이 부족해.'
이해가 안 되는 구절은 열 번도 더 곱씹으며 서재의 책을 하나하나 탐독했다. 그리고 책에서 배운 지식으로 창고의 독초를 슬쩍해 복용했다.
곰의 쓸개를 매달고 매일 맛을 보며 망국의 고통을 상기했다던 옛날의 어느 군왕을 흉내 내는 것이기도 하고, 마환기공이 슬슬 독으로 수련해도 괜찮은 경지에 이른 이유도 있다.
원래라면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는 수련도 해야 하지만, 가류의 채찍질 덕분에 해당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 칼로 베고 창으로 찌르는 건 수련 효과가 미미하여 독을 복용하는 단계로 바로 넘어가기로 했다.
번잡한 일들은 다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한테 맡기고 무룡은 서재의 책을 탐독하는 것과 장부를 교묘하게 조작해 창고의 약초와 독초를 빼돌리는 데 전념했다.
빼돌린 독초와 약초는 서역에서 중원으로 가는 상인들에게 괜찮은 가격으로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물론 일부는 무룡의 뱃속으로 들어가 마환기공의 경지를 높이는 데 유용하게 쓰였다.
몸이 편한 데다가 무룡 덕에 돈까지 버니 따르는 제자들의 충성심이 점점 깊어졌다.
그리고 무룡은 대제자를 죽일 독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대제자의 무공은 단전을 잃기 전의 무룡보다 못하다. 독무곡 자체가 죽기 쉬운 곳이라는 인식이 강해 내놓은 자식들이나 진짜 갈 데가 없는 놈들이 오는 곳이다.
그러니 대제자라고 해도 무공이 그렇게 강하지 않다. 그렇다고 쉽게 볼 수준은 또 아니어서 무룡은 독을 준비하고 완벽한 독살을 계획했다.
- 작가의말
서버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네요. 내일쯤 비축분을 모두 예약 연재로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일일 연재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네요. 제발 비축분이 동나기 전에 문피아가 해외 아이피 차단을 풀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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