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과일격
'넷넷넷, 셋셋셋, 둘둘둘, 하나하나하나.'
무룡은 탄성이 강한 죽검으로 나무를 때렸다. 넷이 가장 느린 속도고 하나가 가장 빠른 속도다.
아직 경지가 낮고 깨달음도 부족해 빨라지는 것만 가능하다. 사부처럼 공격 속도를 내키는 대로 조절하는 건 무룡에게 까마득한 얘기다.
'조금 빨리해보자.'
숨을 크게 들이킨 무룡은 다시 죽검을 휘둘렀다.
'넷넷, 셋셋, 둘.'
공격 속도를 급하게 끌어올리니 둘에서 맥이 끊겼다. 내공이 오 년의 성취만 되어도 이어갈 수 있을 텐데, 순수한 육체의 힘으론 여기가 한계다.
짝짝.
어느새 나타난 화무룡이 박수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대사형께서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무룡이 죽검을 바닥에 던지며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지나가던 길에 소리가 들려 잠시 발걸음을 했소."
"그럼 마저 구경하십시오. 저는 먼저 떠나겠습니다."
"혹시 본산으로 가시오?"
"그렇습니다. 축하연에 모든 제자가 참석하라고 전달받았습니다."
"나도 본산으로 가는 길이니 함께 가는 게 어떻소?"
"먼저 사부를 만나야 하니 사양하겠습니다."
"대사형으로서 동행을 명하오."
무룡은 무뚝뚝한 얼굴로 바닥의 죽검을 주워 허리에 꽂은 후 화무룡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지?"
길 양옆의 나무가 무성하여 멀리서는 보이지도 않고 벌레들이 시끄럽게 울어 낮게 말하면 엿듣기도 힘들다.
"가문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해. 너랑 장문인을 죽일 생각이야."
무룡은 화산을 벗어난 적이 없어서 장안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날릴 비둘기도 없다. 그래서 강호행을 마친 화무룡을 가장 빨리 만날 수 있고, 만날 가능성도 가장 큰 폭포 근처에서 매일 수련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았는데?"
애지중지하는 죽검을 바닥에 던진 일, 포권만 했던 예전과 달리 고개까지 숙인 점,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
총명한 화무룡은 뭔가가 있음을 알고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러나 무룡의 입에서 나온 말은 쉽사리 믿기 어려웠다.
"네 명의 가주가 힘을 보태달라고 사부를 찾아왔어. 사부는 감시당할 것 같아서 날 보낸 거야. 지금도 누군가가 우릴 몰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아버지한테 알려야 해."
노혼이 언급되자 무룡도 의심을 거뒀다. 군사부일체, 주군과 사부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다. 그간 봐온 무룡이 장난으로 말을 만들 위인도 아니고, 사부의 이름까지 거론하며 거짓말을 꾸밀 이유도 없다.
"난 이만 사부한테 돌아갈게."
"아니야. 여기서 갑자기 헤어지면 의심할 거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무룡은 화무룡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 따르기로 했다.
"이 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화무룡이 방향을 틀자 무룡은 짐짓 높은 소리로 외쳤다.
"잠깐 들를 곳이 있소."
무룡은 무표정한 얼굴로 화무룡의 뒤를 따랐다.
다니는 사람이 없어 길도 없는 곳이었다. 짐승의 배설물 냄새나 죽은 벌레가 썩으면서 내는 악취도 없는 걸 보니 사람뿐이 아니라 짐승들도 잘 찾지 않는 곳인 듯했다.
"누구지?"
감시자를 경계해 달리지는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던 화무룡이 우뚝 멈췄다. 멀리 시야에 간신히 들어오는 곳에 익숙한 체형의 화진악 외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
"사부?"
화무룡이 화진악을 멀리서 알아봤듯이, 무룡도 노혼을 바로 알아봤다.
"여기가 내 큰아들이 묻힌 곳임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용케 찾아왔군."
화진악은 암암리에 내공을 끌어올렸다.
"당신 아버지가 날 얼마나 총애했는지 잊지 마시오."
"하긴. 얼굴까지 안 닮았으면 노 사제랑 바뀐 줄 알았을지도."
"여전히 아버지를 싫어하는군. 그래도 오늘은 아버지 덕에 살았다고 생각하시오."
"왜? 오늘이 내 제삿날이 되기라도 한다는 뜻인가?"
"가주들이 반란을 일으켜 당신과 당신 아들을 죽일 생각이오. 그리고 날 장문인 자리에 앉히겠다더군. 장문인 자리가 탐나지만 당신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해서 포기하기로 했소."
화진악은 꽤 놀란 얼굴이었다.
"바라는 게 뭐요?"
"딱히 뭘 바라고 한 건 아니오."
"그거 아시오?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바라는 거 없이 날 찾아와서 이런 비밀을 까발렸다면 난 믿지 않았을 거요."
"세상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마시오."
화진악은 몸을 돌려 노혼에게 등을 보인 채 자그마한 무덤에 얼굴을 비볐다.
"무룡의 형이자 내 첫아들이오. 젖도 못 뗀 나이에 요절했지."
몸을 일으킨 화진악이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이 아이를 죽인 자가 악명청이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죽이라고 사주한 자이지."
노혼의 몸이 격동으로 부르르 떨렸다. 노혼이 무력에 비해 심기가 깊지 못한 탓이다.
"복수로 악명청의 아이를 셋 죽였소. 그런데도 죽은 내 자식이 더 불쌍하고 안타깝더군."
"내게 이 말을 해주는 이유가 뭐요?"
"돌아가서 악명청이 반란을 획책했다고 공표한 후 남은 세 가문과 함께 멸문해버릴 생각이오. 변수도 제거할 겸 나와 내 자식의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당신에게 자하동을 보여주겠소."
노혼이 얼굴을 굳히며 흠칫 놀랐다.
"당신이 자하동에 들어가려고 굴을 많이 판 사실을 알고 있소. 그런데 자하동이 그런 식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자하신공을 화씨 가문이 독차지할 수 있었을 것 같소?"
"알면서 왜 모른 척했지?"
"당신은 야심이 없으니까. 순수하게 자하신공이 익히고 싶었던 게 아니오?"
노혼이 허탈하게 웃었다. 제자이자 함께 사는 무룡조차 모를 정도로 감쪽같이 했다고 여겼는데 결국 화진악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었다.
"자하동은 특정 시간대에 빛이 들어오는데, 그 빛을 받으면 벽에 글자가 나타나오. 손으로 만져도 글자를 찾을 수 없으니 헛수고는 하지 말고. 사흘, 딱 사흘 시간을 주겠소. 사흘 사이에 얼마나 이해하는지는 당신에게 달렸소."
그때 화무룡과 무룡이 달려왔다.
"노 사숙도 계셨군요. 혹시 반란 사실을 알리러 직접 움직이신 겁니까?"
"제가 대사형을 못 찾을까 봐 직접 나서셨군요."
무룡의 말에 노혼은 전후 사정을 알아챘다.
"무룡 사질도 알고 있었던 거요?"
"그렇습니다. 장문."
"그럼 사질도 사부와 함께 자하동에 들어가게."
화진악이 셋을 계곡으로 안내했다. 화무룡과 무룡은 물론, 화산에서 삼십여 년 산 노혼도 모르는 길이었다.
"응? 여긴 조양봉이 아닌데?"
"문이 하나여야 한다는 법은 없소."
화진악은 소매를 늘어뜨려 손을 감춘 뒤 문을 힘껏 밀었다. 두께가 어림짐작으로도 반 장은 되는 무거운 돌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사흘 정도 굶어도 상관없겠지?"
화진악의 말에 노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반란 사실을 알릴 것을 미리 알고 화진악이 함정을 팠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함정이어도 화진악이 힘으로 여는 문을 노혼이 못 열 리 없다.
노혼과 무룡이 들어가자 화진악은 석문을 닫은 후 화무룡과 함께 움직였다.
"아버지. 저자는 조 가주 아닙니까?"
둘이 향한 곳에는 조씨 가문의 가주 조형래가 있었다.
"아들, 잘 봐둬라."
둘을 본 조형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질도 함께 오셨군."
"화무룡이 조 사숙께 인사 올립니다."
"반란 사실은 조 가주가 이미 나한테 다 알렸다. 주동자는 악명청이고 왕유재는 전답을, 주만통은 자하신공을 갖기로 했다."
뜻밖의 전개에 놀란 화무룡은 얼굴을 굳히고 가만히 있었다.
"세 가문을 벌한 후 조씨 가문도 화산을 떠나기로 했다. 화산에서 배운 무공은 직계 혈통한테만 전하고 딸과 외인에겐 절대 전수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조씨 가문이 보유한 화산의 전답은 나한테 넘기고, 난 장안에 있는 장원과 주루들을 조 가주께 양도하기로 했다."
"화산의 속가제자로서 뿌리를 잊지 않겠습니다."
"조 가주는 어서 돌아가 식솔들을 안전한 곳에 숨기시오. 궁지에 몰린 자들이 조 가주께 해악을 끼칠지도 모르오."
"분부대로 행하겠습니다."
조형래가 떠난 후, 화무룡이 질문했다.
"장안의 장원과 주루를 합치면 조씨 가문의 전답보다 훨씬 가치 있습니다. 어차피 노 사숙이 반란 사실을 미리 알렸는데 조 가주를 용서할 필요가 있을까요?"
화진악은 숨을 깊고 느리게 쉬면서 한참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시켰다. 남은 세 가문을 충동질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한 건 조가주고, 그걸 사주한 사람은 나다."
"네?"
"그리고 천하는 머지않아 전란에 휩싸일 것이다. 장안의 장원은 강한 자에게 뺏길 수 있고, 주루는 전란에 휩싸여 불태워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전란이 일면 주루가 지금처럼 장사가 잘될 것 같으냐."
"그래서 조 가주께 내준 겁니까?"
"가진 재물을 지키는 데 힘에 부치면 우리한테 손을 내밀 수밖에 없고, 우린 원하는 금액을 부르고 무력을 빌려주면 된다. 손해를 봐도 조 가주가 보고, 우린 주루가 망하든 말든 고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조 가주가 장원과 주루를 팔고 떠날 수도 있잖아요."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세상은 힘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고. 새로운 곳으로 가서 뿌리를 내리는 게 쉬우면 왜 강한 문파와 세가들이 살기 좋은 장안으로 몰려들지 않았겠느냐. 천시와 지리와 인화. 왜 지리와 인화가 천시랑 같이 언급되는지 생각해 보아라."
멀리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다.
"악씨 가문이다. 네 형을 독으로 죽인 흉수의 가문이기도 하지."
화무룡은 꽉 쥔 주먹을 겨우 펴고 바지에 땀을 닦았다. 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저 요절했다고만 들었다.
"강호는 이렇듯 비겁하고 비열하다. 가족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선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물을 뒤집어쓰는 것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네 할아버지가 그걸 못 해서 지금 내가 이 고생 하는 거다."
- 작가의말
반과反戈는 창끝을 돌려 같은 편이었던 쪽으로 칼을 휘두른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반과일격은 조형래의 행위를 지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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